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89)
아이, 거참.
왜 하필 그 타이밍에 들어온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엔프리제가 놀란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오해야 이야기를 하면 풀리겠지만….
이 수치스러움은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
“전하께서 이곳에 오지 않는 것이 조건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어째서 여기 계시는 건지요.”
냉정한 목소리가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든다.
나랑 이야기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리고 나는 당연히.
“엔프리제를 부른 건 나예요.”
“샤페릴…?”
“그리고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이름 부르지 마세요. 분명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이제 당신을 모른다고요.”
그렇게 말하며 흘끗 엔프리제 쪽을 본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망토 속에 날 폭 싸 넣었다.
날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걸까. 아니면 내게 저 남자를 보여 주고 싶지 않게 된 걸까. 어느 쪽인진 모르겠지만, 그 품 안이 편안해서 나도 모르게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영식은 나와 내 동생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 같습니다.”
싸늘한 목소리.
이 남자가 내가 아는 엔프리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차가웠다.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 내게 보이던 비아냥거림은 별것도 아니라는 걸 강제로 깨달을 정도로.
그리고 그가 감추고 싶었던 건 분명 나도, 약혼자라는 남자도 아니라….
“무슨 의도 말씀이십니까.”
“내가 샤페릴을 이 저택에 보낸 건 강제로 감금하거나 납치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샤페릴을 처음에 납치하고 감금한 건 대공 전하, 당신이 아니십니까!”
엔프리제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아픈 구석을 찔려서 그런 걸까? 하지만, 엔프리제는 스스로도 그렇다고 인정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저 표정은 화가 났다거나 괴롭다기보다….
무언가 생각에 빠진 느낌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대 역시 같은 짓을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남자가 무언가 항변하기 위해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아마 남자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자신 역시, 자신이 비난하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짓을 했다는 걸.
“내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다면 더더욱 이래서는 안 되었습니다. 샤페릴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 애쓰고 그대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옳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대는 바른 방법 대신 바르지 못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내가 그랬듯이.
딱히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엔프리제의 표정이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괴로워 보이는 그 얼굴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의 팔을 꽉 붙잡아 주는 것뿐이었다.
“…인정하겠습니다. 샤페릴이 제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에 초조해져서 옳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려 했습니다.”
내 탓으로 돌리는 건가.
나는, 나를 감싼 엔프리제의 팔을 살짝 밀어냈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망토가 비껴 나면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엔 유약하고 평범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꽤 비열해 보인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차갑게 내뱉은 한마디에 나를 감싼 팔도, 나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몸도 움찔 떨렸다.
“당신은 저한테 아무 이야기도 해 주지 않았잖아요. 엔프리제에 대한 비난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을 잃기 전에 당신이 제게 어떤 존재였는지, 우리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같은 걸 이야기할 생각조차 없었잖아요. 게다가 제대로 이야기하기도 전에 방문에 자물쇠부터 채운 건 당신이었어요.”
남자가 기사들에게 그런 명령을 하는 기색은 없었다. 애초에 그 기사들은 나와 남자가 방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었다.
처음부터 이 남자는 날 가둘 생각이었던 거다.
“엔프리제는, 나한테 가끔 숨기는 일은 있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요. 내 탓을 한 적도 없어요.”
조금 전의 그 한마디에서 느껴졌다.
이 남자는 나를, 아니, 샤페릴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 감정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것이라고.
설령 이 남자가 자신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나는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집착이나, 혹은 오기. 아니, 그것이랑도 좀 다를까.
“나는 엔프리제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리고 엔프리제 역시 날 사랑하고 있어요. 그러니 미안하지만, 이제 내가 있을 곳은 그 어디도 아닌….”
슬쩍 고개를 들었다.
엔프리제는 고요한 눈으로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 금색의 눈동자를 보며 씩 웃었다.
“여기뿐이에요. 내가 있어야 할 곳도, 있고 싶은 곳도.”
그렇게 내뱉고 엔프리제의 옷 소매를 끌어당겼다.
돌아가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 * *
제레닉 드 카운이 사교계의 꽃을 만난 건 몇 살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 무렵에도 그녀는 사랑스러운 용모를 하고 있어서, 어린 마음에도 가슴이 설레었던 걸 기억한다. 다만 그건 이성으로서의 설렘이 아니라, 뭐랄까.
뛰어난 예술품을 보는 듯한 설렘이었다.
그 단정한 생김새를 보고 있자면 여자로 느껴지는 게 아니라 뛰어난 조각상이라도 보는 느낌이었다. 다만 그녀 자신이 몹시도 생기 있고 자유로운 이였기에, 그 인품 역시 흥미가 솟았다.
제레닉이 샤페릴에게 품은 감정은 그 정도의 것이었다.
그런 그가 모두가 탐을 내는 현신한 천사의 약혼자가 된 이유는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카운 백작가가 나름대로 재력이 있었을 때부터 리베테 백작가와 친밀하게 지낸 사이였고, 몇 대에 걸쳐서 친분이 있었으며….
우연찮게 두 사람의 나이가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친밀하게 지내는 두 사람을 보며 아무래도 양가에서는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고.
그저 그뿐인 이유였다.
아니라고 거절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제레닉은 굳이 말하자면 사랑하는 아내를 찾기보다는 좋은 아내를 찾아야만 했다. 부모님은 낙관하고 있었지만, 카운가의 재정 상태는 두 사람의 약혼 이야기가 나올 무렵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반대로 리베테 가문은 여전히 견고했다.
어릴 때부터 친했고,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이 명약관화하며 가문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상대.
거절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문제는 제레닉이 생각한 것보다 카운가의 붕괴가 더 빨랐다는 것에 있을까.
부모님은 선대까지 모아 놓은 재력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사업을 보는 눈이 없어서 투자하는 족족 망하기 일쑤였고 때로는 사기에 가까운 수법에 당해 돈을 잃기도 했다. 제레닉이 말려 보아도 고집 센 두 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먼 동방의 알려지지 않은 국가에서 들여오는 희귀한 미술품, 이라는 환상에 혹한 부모님은 얼마 남지 않은 가문의 재산을 거의 다 밀어 넣었고….
안타깝게도 무역선은 거친 풍랑을 넘지 못하고 침몰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래도 두 분은 여전히 낙관적이었다. 영지에서 나오는 세금이 남아 있었으니까 먹고사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꾸준히 문제가 생겨 왔었다.
세금을 속이는 이들이 빈번하게 나타났고, 때로는 수확물을 판 대금이 황실에 내야 하는 세금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런 와중에 영지의 곡물을 덮친 역병 탓에 수확물 대부분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고사했다.
아무리 제레닉이라도 그런 상황에서 샤페릴을 붙잡아 두고 있을 정도로 이기적이진 못했다.
-샤페릴, 우리 집 소식은 들었지?
-너무 걱정하지 마.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그래. 우리 가문은 내가 어떻게든 해 볼 거야. 다만 우리 약혼은 파기하는 게 좋겠어.
당연한 일이었다.
도리어 샤페릴이 먼저 요구하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었다. 당장 결혼식을 올려야 할 나이가 지났는데도 얼마 되지도 않는 지참금을 마련할 돈이 없어 식을 올릴 수가 없다니.
하지만 샤페릴은.
-왜?
라고 이야기했다.
제레닉은, 굴욕감을 억누르며 제가 처한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녀가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샤페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왜?
-샤페릴.
-지참금이 중요해? 그런 건 그냥 관습이야. 너와 내가 결혼하는 덴 문제가 안 돼.
-샤페릴, 너도 알겠지만 귀족 사회에서는 그런 관습이 중요해. 특히 너는 사교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어. 그런 네가 지참금조차 받지 못하고 결혼했다고 하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는 알고 있는 거야?
평소에도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샤페릴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부모님조차 그녀의 사고방식을 지지했다.
고여 있는 세계에 미래는 없다. 언젠가는 샤페릴의 생각이 상식이 되는 세상에 올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사고방식을 억지로 현 시대상에 끼워 맞출 필요는 없다.
그녀의 부모님은 공공연히 그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니 샤페릴이 상황 파악을 하고도 파혼에 동의하지 않는 건 그런 기행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제레닉, 나한테 그런 평가는 중요하지 않아. 나는 오래전에 너와 결혼할 것에 동의해서 너와 약혼했어. 그리고 내게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설령 카운 가문의 사정이 어려워졌다고 하더라도, 그게 우리 파혼의 이유는 되지 못해.
문제는, 제레닉은 그녀의 사고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제레닉은 지극히 평범한 귀족 영식이었다. 그런 그에게, 지참금조차 내지 못해 공짜로 신부와 결혼했다는 오명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좋아, 샤페릴. 파혼에 동의할 수 없다면 최소한… 내가 지참금을 마련할 수 있게 된 후에 결혼을 하자. 그때까지 기다려 줘.
카운가의 사정이 알려지게 되면 다른 이들이 샤페릴을 그냥 둘 리가 없었다. 그러면 자연히 다른 이와의 결혼이 결정되어 파혼이 진행될 터.
그렇게 생각했는데.
-뭐…? 샤페릴이?!
사태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