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88)
“…….”
샤페릴이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카운 백작가에 도착한 엔프리제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저택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안에 샤페릴이 있겠지. 어쩌면 몇 번이나 이 저택에 방문했을 것이다. 그리고 추억도 기억도 이 안에 잔뜩 있겠지.
불에 타 기억에 없는 것이 되어 버린 리베테 가문의 저택과는 달리.
이번에야말로 샤페릴은 모든 걸 기억해 낼지도 모른다. 기억상실에서 회복되면서, 기억상실 상태에서 있었던 기억이나 경험이 모두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건… 분명 몹시도 가슴 아픈 일이겠지.
엔프리제는 그녀가 기억을 되찾기를 바랐다.
그녀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그녀를 취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원하는 대로 살기를 바랐다. 그녀의 자유로움에 동경을 품게 된 것이었으니까.
그녀가 자신이 사랑하던 그녀, 아니, 그녀다운 그녀로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이… 만약 이번에도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한다면.”
그렇게 기대하는 마음 역시 있었다.
이번에도 만약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자신을 사랑해 주는 샤페릴 그대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던 엔프리제가 문득 싸늘한 웃음을 띠었다.
쓰레기.
자신은 쓰레기이자 괴물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녀의 회복을 마음 어딘가에서는 거부하고 있었다.
만약 샤페릴이 지금의 자신을 알게 되어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해 줄까?
“샤페릴….”
저 안에서는 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까.
샤페릴은, 그를 보고 어떤 반응을 했을까. 그는 샤페릴을 보고 어떤 반응을 했을까. 두 사람이 사실은 단순한 정략혼이 아니라 정말로 사랑해서 약혼했던 거라면.
지금쯤은.
질투가, 분노가, 두려움이, 공포가.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흉악한 감정들이 제 몸 안을 소용돌이 친다. 말의 고삐를 꽉 틀어쥔 엔프리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고 싶은 마음을, 들어가서 그녀를 데리고 나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그 탓에 힘 조절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가만히 저택을 바라보던 엔프리제가 흠칫 놀라며 제 손목을 보았다. 혹여나 싶어 가지고 온 알림 장치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샤페릴이 부르고 있다.
엔프리제는 곧바로 고삐를 휘둘렀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한 말은 곧바로 튕겨 나가듯 저택을 향해 달렸다. 마치 주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순식간에 나무 사이를 지나치더니 숲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보이는 저택의 입구에는 사병들이 있었다.
그건 몹시도 이상한 일이었다.
카운 백작가는 지금 백작가의 위치를 유지하는 것조차 아슬아슬할 정도로 재력도, 영지에 대한 통치력도 잃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저 정도 수준의 사병을 어떻게 고용한 거지?
오랫동안 검을 닦아 온 엔프리제이기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들은 황실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실력자들이라는 걸.
그리고 동시에 검집 채 검을 손에 쥐었다.
“막아!”
“침입자다!”
작은 저택 어디에서 쏟아져 나오는 건지 순식간에 십여 명으로 불어난 사병단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이 제국에서는 보기 드문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인만큼 이미 엔프리제가 누군지 알아차렸을 텐데도 멈추지 않는다.
엔프리제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말 위에 앉은 엔프리제의 다리를 집요하게 노리는 은색의 날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말에서 뛰어내렸다. 말은 그대로 저택을 지나쳐 숲속 어딘가로 달려 나갔다. 간 방향을 봐 둔 엔프리제는 곧바로 눈앞의 적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래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수준 높은 기사들을 상대한 경험은 많이 없지만, 그렇기에 더 단판에 승부를 봐야만 했다. 엔프리제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날아드는 검에 살기가 서려 있다.
남자들은 엔프리제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죽일 생각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엔프리제는 상대를 죽일 수가 없었다.
이 저택에는 뒷문이 없다.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문이 없는 독특한 구조. 그렇기에 창문으로 나오지 않는 한 샤페릴이 나올 수 있는 출구는 여기뿐이었다.
하지만 1층에는 창문이 없다.
이런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는 건 여기가 오래전 귀족 중 죄를 범한 이를 가둬 두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2층 창문에는 모두 창살이 쳐져 있는 구조.
그러니 나올 수 있는 곳은 한 곳뿐.
여기서 만약 시체가 굴러다니기라도 한다면.
“큭…!”
호숫가.
시체를 본 샤페릴이 공포에 질려 기절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 열이 올라 몽롱해졌던 그녀는… 몹시도 안쓰럽고 또한.
아아, 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생각인지.
엔프리제는 이를 악물고 자신에 대한 분노를 남자들에게 쏟았다.
가장 먼저 달려온 남자에게 검을 휘둘렀다. 검집을 채운 채로 휘두르면, 벨 수 없는 대신 둔기를 이용해 타격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보통의 둔기와 달리 얇은 편이기에 그 충격 역시 적지 않은 편이었다.
그걸로 있는 힘껏 명치께를 후려쳤다.
명치를 직접 찌르면 사망에 이를지도 모르기에.
역시나 몸을 단련한 기사답게 쓰러지긴 했지만,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하지만 순식간에 다른 이가 그 빈자리를 채워 넣었다.
그때부터 엔프리제는 생각을 멈추고 본능에 따라 검을 휘둘렀다.
빨리. 더 빨리.
샤페릴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를 부르고 있다. 설령 어떤 이유로 부르던 엔프리제는 그 앞에 가야만 했다.
그리고.
“어어! 가까이 오지 마요!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저택 안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샤페릴이 저렇게 큰 소리를 내는 건 처음 들었다. 그 정도로 급박한 일인 걸까. 엔프리제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눈앞을 가로막는 두 명을 후려친 후 저택의 현관으로 내달렸다.
방어 같은 것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날아오는 날카로운 검날을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맞았다.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스치는 상처로 끝났지만,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잠겨 있을 거라 예상한 현관의 손잡이를 잡고 그대로 발로 차 밀어 열었다. 그리고.
“샤페릴!”
내가 여기 있음을 알리려는 외침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오면 확 키스해 버릴 거예요!”
어떻게 빠져나온 건지 샤페릴이 거기에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말을 외치며.
* * *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제가 특이 체질이라 저랑 키스하면 마력이 옮겨 가서 엄청난 통증을 느끼게 된다고 하더라구요.”
알고 있는 것 같다.
남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리고 내 약혼자라는 남자의 얼굴도.
씩 웃으며 까치발을 들어 기사의 얼굴에 내 얼굴을 들이댔다.
“그러니 안 비키면 키스해 버릴 거예요.”
어차피 처음도 아니고, 엔프리제가 아닌 남자와 입술 박치기를 한다는 게 그리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여기를 나가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고 다짐한 내게 그 정도쯤은 상관없다!
“시잇-!”
헤죽헤죽 웃으며 제게 키스를 해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미친 여자와 그 목덜미에서 털을 꼿꼿이 세운 채 위협하는 작은 족제비. 그 요상한 광경에 순간 겁을 먹은 건지 남자가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자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레이디!”
팔을 뻗어 날 잡으려는 남자의 손가락. 닿기 직전의 그 손가락을, 언제 내 몸을 타고 내려간 건지 플리가 꽉 깨물어 버렸다.
“으악!”
남자를 물고 늘어지면 내가 도망치지 못한다. 영리한 플리는 그걸 이해한 건지 남자의 손가락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멍청하긴. 우리 플리 이빨을 막으려면 최소한 쇠로 된 장갑 정도는 장착하고 왔어야지! 우리를 우습게 본 인과응보다!
하긴, 플리를 데려온 것도 몰랐던 것 같지만.
“나한테 함부로 손대지 마요! 우리 플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니까!”
“쉬이이잇-!”
까만 콩 같은 눈을 일그러뜨린 채 앞을 노려보는 플리.
…플리, 미안해. 이런 상황에서 떠올릴 생각은 아닌데….
너 진짜 왜 화내는 것도 귀엽냐.
“침입자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엔프리제. 엔프리제가 온 게 틀림없다.
엘마레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괜히 갔다가 그가 이 남자들과 공범이라면 잡혀서 다른 출구로 날 빼돌리려 할 위험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럴 바엔 빨리 엔프리제와 합류하는 게 낫겠지. 나는 슬금슬금 내게로 가까워지는 남자들을 노려보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어어!? 가까이 오지 마세요! 가까이 오면 확!”
남자들이 다시 흠칫 걸음을 멈춘다.
내가 비록 근력은 약하지만! 달리기도 그렇게 빠르진 않지만!
너희를 행동 불능으로 만들 수는 있거든!
한 번 더 입술을 쭉 내밀며 남자들을 위협한 후 뒤로 돌아 그대로 내달렸다. 내 팔에 와 있던 플리는 꼬물꼬물 내 몸을 타고 가 등 뒤에 가 매달리더니,
“쉬잇-! 쉿-!”
엄청난 위협을 시전했다.
지금 무지 귀엽겠지. 등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위협하는 플리.
조금 보고 싶긴 하지만, 일단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엔프리제를 만나야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
내가 이래서 엔프리제랑 같이 오려고 했던 건데. 꼭 남주를 떠나서 뭔가 혼자 하려고 하거나 하면 일이 터진단 말이야. 플리라도 데려와서 천만다행이지.
좁은 복도를 내달려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간 내 눈에 보인 것은 굳게 닫힌 현관이었다.
안에 걸쇠 같은 게 걸려 있다. 그 나무를 옆으로 움직여서 문을 고정하고 여는 그거.
저게 있으면 밖에서는 문을 열 수가 없을 텐데. 저걸 열어 줘야 엔프리제가 들어올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해서 현관으로 달려가려는데.
“그만두십시오, 레이디!”
“거친 행동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 제발 저희 말에 따라 주십시오.”
“어어! 가까이 오지 마요!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방해꾼이 나타났다.
그리고.
“샤페릴!”
“가까이 오면 확 키스해 버릴 거예요!”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엔프리제가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