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87)
“샤페릴.”
부르는 목소리만으로도 알 것 같다. 이 남자가 샤페릴의 약혼자구나.
머리카락이 주황색이고 눈동자가 하늘색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내가 일상에서 보던 평범한 남자들과 별로 다를 게 없다. 몸집도 키도 한국인 남자 평균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다만 생김새는 꽤 단정하고 얼굴이 웃상이라 호감형이긴 하다. 아마도.
유약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경계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엘마레랑 비슷한 과의 남자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도 모르게 목에 감겨 있는 플리를 찾아 손을 올렸다.
잠든 듯 미동도 없는 플리의 털을 살짝 쓰다듬곤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담담하게 인사하자 남자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진다. 그 모습에 미안해지긴 했다.
하지만 그뿐.
“이미 이야기는 들으셨으리라 생각하지만, 지금의 제게는 예전의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도 기억하지 못해요.”
“전하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들었습니다만…, 역시 눈앞에서 당신이 절 처음 보는 사람으로 대하는 걸 보는 건 힘들군요.”
남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나와 엘마레를 향해 손짓을 했다.
“일단 들어오세요. 차라도 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여기 온 이유는 당신에게 확실히 말해 둘 것이 있어서예요.”
“…….”
내 태도를 보고 분명 눈치챘겠지. 내게는 그에 대한 감정이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쯤은. 그러니 할 말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입 밖으로 낸다.
이런 건 짐작만 하기보다 직접 말하고 듣는 게 중요한 거니까.
“예전의 저와 친밀한 관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약혼자이자 오랜 친구라고. 그런 당신께 이런 말을 하는 건 유감이지만… 저는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는 이전과 같은 일을 하지 말아 주시길 바라요.”
남자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런데도 표정은 담담했다.
“샤페릴, 꼭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잠시만 제게 시간을 주세요.”
간절해 보이는 말투와 달리 목소리도 표정도 그리 큰 변화는 없다. 귀족이란 원래 이런 걸까. 다들 엘마레나 이 남자처럼 가면을 쓰고 있는 걸까.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말도 섞고 싶지 않지만, 기왕 온 것 오늘 해결을 보고 가는 게 낫겠지.
“알겠습니다. 다만 이야기가 끝나면 바로 돌아갈 테니 차는 필요 없습니다.”
한 번 더 선을 긋는다. 남자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앞장섰다. 그 뒤를 따르는 내 뒤에, 따라와야 할 사람이 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건.
“……?”
응접실에 도착한 후였다.
내가 들어오자마자 방문이 닫혔다. 거기까지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그럴 수 있다손 치겠지만… 철컥하는 소리가 불길하게 울렸다.
설마, 아니겠지?
소파 앞까지 다가갔다가 다급하게 문 앞으로 돌아갔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돌아는 가는데 문은 열리지 않는다. 철컥하는 건 자물쇠 소리였던 걸까.
“뭐 하는 거예요, 이게?”
“샤페릴, 당신은 그 남자에게 속고 있는 겁니다.”
“그 남자?”
“블레임 대공 말입니다.”
블레임?
엔프리제 드 블레임?
엔프리제가 날 속이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이 남자는. 나는 싸늘한 눈초리로 남자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저를 속인 건 엔프리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돌려보내 주세요.”
“당신의 가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도적이 들이쳐 가문의 사람들을 모두 참살하고 저택을 불태웠다죠.”
“그 속에서 어째서 당신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합니까?”
“…….”
그거야 나도 모르지. 아직 읽지 않은 부분이니까.
다만 여주인공이라서, 가 아닐까 싶었는데.
“처음부터 도적들의 목적은 당신이었습니다. 애초에 그들은 도적도 아닙니다. 그들은….”
남자의 말에 솔직히 관심이 생기지도 않는다.
내 관심은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플리에게 붙어 있는 보석에 손을 댈 것인가. 그리고 여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이 두 가지뿐이었다.
슬쩍 방을 살핀다. 분명 내 방문은 미리 통보해 둔 것이긴 했지만, 기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빠져나갈 구멍이 하나쯤은 분명 있을 텐데.
창에는 쇠창살이 박혀 있다. 문에는 자물쇠가.
수희의 몸이었으면 이깟 자물쇠쯤 있는 힘껏 흔들어 제꼈으면 나사가 헐거워져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샤페릴의 몸은 계속 체력 단련은 하고 있지만 근력이 좀체 붙지 않아 힘들 것 같다.
게다가 저 남자가 얌전히 탈출을 방관하지도 않을 것 같고.
“그들은 블레임 대공에게 고용되어 당신을 납치하고 방해되는 자들은 모두 죽이라 명령받았습니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는데요?”
“붙잡힌 도적이 입을 모아 그리 말했으니까요.”
웃기고 있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비웃음이 스몄다.
“제가 왜 여기에 온 건지 아세요?”
“왕제 전하께서 힘써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틀렸어요. 전 오기 싫었어요. 왜냐면 저는 당신에 대한 기억도, 감정도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제가 여기에 온 건 엔프리제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였어요.”
“…….”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걸까.
아니면 어떻게 대답해야 날 속일 수 있을지 궁리하는 걸까.
“엔프리제는 가기 싫어하는 날 설득했어요. 예전에 당신이 제게 소중한 사람이었다고, 제 기억이 돌아오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만약 그 도적들이 엔프리제가 보낸 사람이라면 절 여기에 보낼 리가 없잖아요. 안 그래요?”
엔프리제의 의뢰라고 치자.
그럼 엔프리제가 그들 중 일부가 붙잡혔다는 걸 몰랐을까? 그리고 엔프리제가 뒷배경임을 실토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까?
백작가 사람인 이 남자도 알고 있는 정보를?
뭐, 그건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렇다는 거고 애초에 말이 안 된다. 그런 의뢰를 했다면 엔프리제는 그 저택에 가면 안 됐다. 그 남자들이 샤페릴을 납치해 오는 걸 조용히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샤페릴을 감금하면 그뿐이었겠지.
거기서 속여 먹든 아니면 강제로 취하든 했으면 그만이다.
게다가 그럴 성격도 못 돼고.
그런 짓을 할 바엔 엔프리제는 차라리 샤페릴을 포기하고 평생 혼자 살 사람일 테니.
“엘마레 님도 당신의 공범인가 보군요.”
“…엘마레 님은 안전한 곳에 계실 겁니다. 제가 당신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잠시 자리를 피해 달라고 했으니까요.”
감싸는 걸까. 아니면 정말 사실일까.
남자가 한 발 내게 다가온다. 반사적으로 한 발 물러나며 플리의 가슴에 박힌 보석에 손을 가져다 댔다. 슬쩍 손가락에 힘을 주자 잠들어 있던 플리가 눈을 떴다.
“삐?”
“…….”
목도리인 줄 알았던 걸까. 남자는 살짝 놀란 얼굴로 플리를 보았다. 그 틈을 타서 난로 옆에 있는 부지깽이를 집어 들었다.
“샤페릴, 내려놔. 그러지 마.”
가면이 녹아내린다.
녹아내린 가면 속에서 보인 남자의 얼굴은 어째서인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내가 이걸로 자신을 습격하기라도 할 거라 생각한 걸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걸까.
“…저는 당신이 알고 있는 샤페릴이 아니에요.”
의자를 든 채 문으로 달려가 있는 힘껏 휘둘렀다. 목표는 문. 아무리 귀족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급조해 단 자물쇠가 그렇게 단단하게 고정되었을 리가 없다.
샤페릴 본인만의 힘으로는 어렵겠지만, 지렛대 원리를 이용하면…!
살짝 벌어진 문틈으로 날카로운 앞부분을 밀어 넣고 돌려 문에 걸리게 만들었다. 왼손으로 손잡이를 잡아 여는 것과 동시에 오른팔로 온몸의 체중을 실어 부지깽이 손잡이를 밀었다. 이게 될까 하는 마음 반,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 반으로 시도한 건데.
“윽.”
손잡이가 얇아서 팔이 아프다. 하지만 꾸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애매하게 떨어진 건지 여전히 문이 열리지 않아 열린 문틈으로 다시 한 번 부지깽이를 돌려 고정한 후 몸으로 밀었다.
콰드드득, 하는 소리에 이어 챙 하고 금속성의 소리가 났다.
떨어졌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열린 문틈으로 나가려 했는데.
“…….”
문 앞을 지키던 남자 둘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만약 엘마레가 이 남자의 편이 아니라면 시간이 흘러 이상을 느끼고 날 찾아올 수도 있겠지. 그러니 이 장소에 날 오래 둘 생각은 없었을 거다. 이 남자들은 날 이동시킬 때 호위로 쓰든 납치 공범으로 쓰든 하려고 데려다 놓은 거겠지.
혹시 엘마레가 공범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엔프리제가 만약 날 순순히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러니 어찌 되었든 날 여기에 두진 않았을 거다.
그러니.
“비켜요.”
이 남자들은 날 상처 입히지 못한다. 그게 내 결론이었다.
내 약혼자라는 저 남자가 이들의 주인일 테지. 만약 정말로 엔프리제가 나쁜 놈이라고 믿고 있어 날 구하려 하는 거든, 날 속여 엔프리제에게서 되찾으려 하는 거든 저 남자는 날 원하고 있다.
그러니 그 명령을 받는 이자들도 날 상처 입히지는 못할 터.
예상대로 내가 억지로 그들 사이를 비집자 곤란한 듯 남자를 보았다.
“샤페릴, 널 위한 거야.”
“날 위한다면 돌려보내 줘요.”
“네 자리는 그 남자의 곁이 아니야, 샤페릴.”
“당신의 곁은 더더욱 아니에요.”
샤페릴의 마음을 조금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니, 여주들의 마음이라고 해야 하나. 황제 감금당하면 좋지 왜 거부하나 생각했는데.
이토록이나 기분 더럽고 벗어나고 싶어질지 나도 몰랐다.
황제 감금 안 당해도 좋으니 엔프리제의 곁이 좋다. 아니, 하다못해 길거리에서 살아도 엔프리제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토록 질색하던 집안일 내가 다 해도 좋고 가난해도 좋으니까.
“난 엔프리제의 곁이 좋아요.”
돌아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마음을 다잡고 기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비켜요. 안 비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