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86)
“오늘은 샤페릴을 잘 아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갈 겁니다.”
“저를 잘 아는 사람이요?”
샤페릴의 친척이나 누군가인가?
고개를 갸웃하자, 엔프리제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친척이라기엔 표정이 너무 무섭다. 대체 누굴 만나러 가는 걸까.
“누군데요?”
어차피 혼자 생각하는 건 내 성격에 안 맞다. 대놓고 물어보자 엔프리제가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자 엔프리제 대신 곁에 있던 엘마레가 대답했다.
“레이디 리베테, 오늘 갈 곳은 형님과는 조금… 일이 있는 곳이라 제가 동행하게 될 것 같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일이 있는 곳?
엔프리제 성격이 누구한테 원한 살 성격은 아닐 텐데. 누가 너무 모욕한 나머지 검이라도 휘둘… 아니, 검을 휘두를 바엔 밉살맞은 말을 할 사람이지.
그럼 설마 안 좋은 말 좀 들었다고 그러는 건가?
“예전에… 제가 제레닉 드 카운이라는 자를 입에 올린 걸 기억하십니까?”
으음….
기억 안 나는데. 누구지?
고개를 갸웃하자 엔프리제의 굳은 얼굴이 조금 부드럽게 풀렸다. 다정한 목소리가 설명을 덧붙인다.
“저택에 침입자가 있었던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제가 말씀드렸던 남자입니다.”
“…아? 아, 기억나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름은 기억 안 난다. 그저 그런 사람을 언급했던 기억이 날 뿐.
애초에 난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란 말이야! 소설 속 조연들의 이름은 대충대충 넘기면서 본다고! 특징만 대충 기억하고!
로판 이름은 어렵고 복잡한 게 많아서 다 외울 수가 없단 말이다!
“그 남자를 만나러 갈 겁니다.”
아, 혹시 일이라는 게 그때의 침입자에 대한 건가?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이 엔프리제한테 뭐라고 할 게 아니지. 싫다는 사람을 강제로 납치해 가려고 했잖아!
…아, 그러고 보면 엔프리제도 납치범이긴 하지, 일단은.
“꼭 만나야 해요?”
“네. 예전의 당신에게는… 아주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소중한 사람.
설마 샤페릴의 연인이라도 되는 건가? 그런 설정을 본 기억은 없는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제 슬슬 읽었던 부분에 대한 기억도 거의 사라지고 없다.
계속 되뇐 부분만 남아 있을 뿐.
그게 대체 언제 적 일인데.
“제가 사랑하던 사람이나… 그런 건가요?”
대놓고 물어보자 엔프리제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그 대신 엘마레가 끼어들었다.
“제레닉 드 카운, 카운 백작가의 영식으로 레이디 리베테의 약혼자이기도 했습니다.”
아, 하. 그렇군.
그래서 그 침입자는, 가지 않겠다는 내 말에 그토록 충격을 받았던 거구나. 아마 그 사람은 샤페릴에 대해 알고 있기에 그녀가 봤다면 냉큼 따라갈 사람이었던 거겠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던 건가, 샤페릴에게는.
“귀족가에서는 사랑으로 결혼을 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레이디 리베테, 당신께서 그 영식을 사랑했는지 아닌지는 저희가 알 방법이 없습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낸 오랜 친구이기도 하다고 들었습니다.”
아하.
소꿉친구 포지션의 남자구나. 그럼 샤페릴이 그 남자에게 느꼈을 감정은 아마도 사랑이 아닐 것이다. 여주인공이 보통 그 포지션의 남자들에게 느끼는 건 한없이 우정이나 가족애에 가까운 감정이거든.
사랑이 아니라.
어쨌건 그 남자도 정리해야 할 문제인 건 확실한 것 같다. 또 저택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꼴은 사양이니까.
“알았어요. 근데 엔프리제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엘마레와 이야기해 봤는데, 그 가문의 사용인과 다툼이 있었던 제가 가면 대화가 원활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뭐, 그야 그렇겠지….
반사적으로 내 눈이 엘마레에게로 향했다. 엔프리제에 비하면 턱없이 작고 가녀려 보이는 몸. 물론 나에 비하면 단단한 체구인 것 같긴 한데….
저 남자가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날 지킬 수는 있는 걸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디 리베테. 저도 일단은 황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은 몸입니다. 형님의 검 솜씨에는 도저히 댈 수 없지만, 레이디를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은 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불안하다. 소설 보면 꼭 이렇게 남주랑 떨어져 있을 때 일이 나더란 말이지.
게다가.
뭐랄까…. 엔프리제는 이 막냇동생을 신뢰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뭐라고 꼭 집어서 설명할 순 없는데….
황제랑은 다르다. 엔프리제와 템버, 그리고 자하와는 아예 다르다.
뭔가… 믿음이 가질 않는다.
기분 나쁘다고 해야 할까.
“플리도 데려가도 되나요?”
“그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플리에게도 전투를 할 수 있는 무언가의 기능이 추가되었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플리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분명 날 지켜 줄 테니까.
“엔프리제.”
“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무엇을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잠시 엔프리제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눈동자 속에서 금색이 하늘하늘 움직인다. 그 안에서 흔들리고 있는 건 엔프리제일까?
아니면 나일까.
“…다녀올게요.”
결국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엔프리제는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가만히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눈을 감자, 그가 작게 속삭였다.
“근처에 있을 테니 위험한 상황이 되면 언제든 부르십시오. 다만….”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더 들어간다. 그리고 방금 속삭였던 것보다도 더 작은, 거의 바람 소리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만약… 정말 만약 당신이 모든 걸 기억해 내시고 제게 돌아오고 싶지 않아지셨다면 엘마레만 돌려보내십시오. 그러면 전….”
팔에는 힘이 들어가는데, 나를 끌어안는 힘은 점점 약해진다.
바보 같다.
무슨 남주가 이래? 자신감도 없고 집착도 약하고. 하다못해 두부도 이 남자보다 더 단단하겠다. 물러 터져 가지곤.
어떻게 저렇게 예쁘게 뚫린 입으로 저런 말을 내뱉을 수가 있을까. 얄밉고 또 얄밉다.
처음에 밉살스러운 말을 내뱉으며 틱틱거리던 엔프리제보다 지금의 엔프리제가 더 밉다. 그리고.
한없이 사랑스럽다.
어쩌겠어.
당신이 이런 사람이니까, 내가 이런 사람이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된 거겠지. 소설 속 멋지고 패기 넘치는 남자 주인공들을 보며 흐뭇해하던 그 감정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 샘솟아 버린 거겠지.
그러니까 당신이 이토록 사랑스러운 거겠지.
“엔프리제.”
엔프리제의 허리에 팔을 감고 꽉 끌어안았다. 내가 이 가는 팔로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세기로.
절대 놓지 않겠다는 마음을 담아.
“나 나오면 바로 마중하러 와 줘야 해요. 알고 있죠?”
“…네.”
낮게 잠긴 목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이나 끌어안은 채 서 있었다.
* * *
“…….”
마차 안은 침묵이 가득했다.
엔프리제랑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카운 백작가에 이미 방문을 통보했기 때문에 엔프리제의 모습이 보이면 격앙된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며 따로 떨어져 오겠다고 했다. 덕분에 마차 안에는 나와 플리, 그리고.
“……”
이상하게 신뢰가 가지 않는 남자만이 타게 되었다.
엔프리제랑 있을 땐 마차가 너무 넓게 느껴졌었는데, 이 남자랑 있으니 너무 좁게 느껴진다. 숨이 막힌다고 해야 하나. 답답한 느낌이 든다.
“형님께서는… 레이디의 기억을 되돌리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 엘마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 너무 다정한 분이셔서 그러시겠지요.”
그건 다정이 아니다.
엔프리제가 겁쟁이라서 그런 거다. 너무 많이 상처 입어 왔고, 너무 많은 상처를 받고 있기에.
그는 내가 자신을 거절하게 되는 게 두려운 거다.
내가 그렇듯이.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형님의 저런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레이디와 행복한 미래를 꾸려 나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엘마레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이 남자가 일부러 내 눈을 바라보고 있다. 마주치도록 유도하며.
자신이 진심이라는 걸 억지로 확인시키려 한다.
…그런 느낌이 든다.
“그런데 왜 엔프리제를 도우시는 거예요?”
“형님은 확신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동생으로서 도와드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타당한 의견이긴 하다. 거짓말을 한 채로 관계를 진전시켜 봤자 분명 문제가 생길 테니까.
그런데도 뭐랄까.
왜 이렇게 위화감이 드는 걸까.
“그렇죠….”
“하지만… 알아주세요, 레이디 리베테. 형님은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
아, 위화감이 드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가면을 쓴 배우와 이야기하고 있는 느낌이다. 지극히 당연한 소리를 지극히 당연한 상황에서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하는.
‘상냥하고 형님을 잘 따르는 동생’이라는 역할을 부여받은 배우.
템버도 엔프리제도 나를 대할 때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자하 역시 예의를 차리긴 했지만, 거짓으로 날 대하진 않았다.
심지어 황제조차도.
하지만 이 남자는 다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심을 본 적 없는 느낌이 든다.
“엘마레 님께서는 정말로 엔프리제를 잘 따르시는군요.”
“형님은… 정말로 대단한 분이십니다. 제가 형님의 상황이었더라면 분명 달랐겠지요. 그 다정함과 상냥함을 유지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엘마레가 살짝 상기된 얼굴과 격앙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누가 봐도 엔프리제에 대한, 넘치는 애정이 느껴지는 얼굴과 표정.
그런데 왜 나는 이토록 이 남자에게 믿음이 가질 않을까.
내 느낌이 틀린 거라면 좋을 텐데.
“엘마레 님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저는 엔프리제의 사랑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의심을 감추고 싱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엔프리제는 내가 솔직한 사람이라고 했다. 감정이 얼굴에 드러난다고.
하지만 지금의 나는 분명.
“그리고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겁니다.”
이 남자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