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85)
마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속이 안 좋아졌다.
이미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을 터다. 나와 엔프리제가 처음 만난 것이 6월 초. 샤페릴은 그보다도 훨씬 전에 엔프리제의 저택에 갔으니까.
이미 여름도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도 참극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불길한 냄새가 났다.
매캐한 불과 재의 냄새. 제대로 치우지도 않은, 저택이 있었을 터였던 자리에는 아직도 새까맣고 새하얀 재가 하늘거렸고 화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참극의 냄새가 마차에서 내리기도 전부터 나를 괴롭혔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들의 죽음. 내가 이 세계에 오기도 전에 벌어졌던 참극.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샤페릴.”
“괜찮…, 우, 우욱…!”
풀썩 주저앉자 플리가 내 등을 타고 올라와 목을 감싼다. 나를 보호해 줄 셈인 걸까. 아니면 치유해 줄 셈인 걸까.
걱정 가득한 손길로 등을 쓸어 주는 엔프리제와 플리 덕에 점점 헛구역질이 잦아들었다.
“…후우.”
“아직… 너무 일렀나 봅니다.”
“뭐가요?”
“이곳에 오는 건….”
리베테 저택의 참극.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어선 안 된다. 나는 피식 웃곤 엔프리제의 손을 꽉 잡았다.
“탄 냄새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져서 그래요. 전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걸요.”
“…그랬죠.”
엔프리제의 부축에 맞춰 몸을 일으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몸 상태가 영 좋지 않다. 마치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로 인해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처럼.
샤페릴의 정신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걸까. 아니면 이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것뿐일까.
“마차에 다시 오르시겠습니까?”
“괜찮아요. 엔프리제는, 여기서 제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던 거잖아요?”
“너무 일렀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엔프리제가 또 한 번 자책의 말을 입에 담는다. 내가 샤페릴이었다면 분명 지금쯤 혼절했거나 이성을 잃고 엔프리제를 탓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아요.”
나는 조용히 웃고 도리어 엔프리제를 토닥였다. 엔프리제는 그런 나를 복잡한 감정을 품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정된 내 상태에 대한 안도. 내가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확신. 그에 따른 안심인 듯한, 실망인 듯한 기묘한 감정.
그런 것들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모르겠어요. 처음 오는 곳이니까요.”
“…….”
말해야 할까.
굳이 샤페릴의 상처를 들쑤시고 소금을 뿌려 아픔을 다시 자각시켜야만 하는 걸까. 이대로 그냥 넘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참 서투른 남자다. 그냥 모든 것을 묻고 세뇌를 하든 감금을 하든 제 좋을 대로 기억 잃은 나를 마음대로 하면 될 텐데.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제 불안을 고백하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이곳은… 당신께서 나고 자라신 곳입니다. 리베테 가문의 저택이 있던 땅입니다.”
황량해진 허허벌판.
남아 있는 잔해는 반은 재가 되었고, 반은 그을리고 검댕이 가득한 흔적이 되어 남은 공간. 나는 천천히 그곳을 눈으로 훑었다.
“여기가 제 집이었던 곳이에요?”
“네.”
“아무것도 남지 않았네요.”
“…네. 본래라면 작위를 내리고 땅을 영지로 하사했던 황실에서 이 참극을 수습했어야 하지만…, 아직도 흔적을 채 치우지 못했습니다.”
저번에 봤던 황제를 떠올렸다.
이상할 정도로 재수 없다고 느껴지던 남자. 엔프리제는 계속 그에 대해서 나쁘지 않게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를 보자마자 속이 메스꺼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런 자신이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샤페릴, 당신은 리베테 백작가라는 가문의 막내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두 명의 오빠와 함께 이 저택에서 생활하셨습니다.”
오빠도 있었구나, 샤페릴에게는. 부모님에 대한 언급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하긴 기절하기 전에 들었던 마지막 소리가 부모님의 비명 소리니. 분명 큰 충격이었겠지.
“훌륭한 분들이셨습니다. 샤페릴의 부모님은…, 드물게도 귀족을 위해 영지민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영지민을 위해 귀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셨지요. 당신의 오빠들도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라고 들었습니다. 늘 영지 일을 돌보느라 바빠서 저는 거의 만나 뵌 적이 없었지만.”
오호….
귀족이란 사교계에서 입 털고 무도회에서 춤추는 게 일인 종자들이 아니었구나. 하긴 여주의 부모님쯤 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겠지.
“제가 당신을 이 저택에서 데리고 나온 밤, 그분들은 불한당의 습격을 받으셨습니다. 이 저택에서 일하던 자들도, 당신의 가족들도… 모두 변을 당해야만 했었습니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아마 이 저택을 습격한 도적들도 같은 생각으로 그랬었던 거겠지. 영지민들의 고혈을 쥐어짜 사병단을 유지했더라면 변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현실은 언제나 그렇다. 창작물 속에서는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경우가 많고, 속 시원한 사이다가 탄산 뿜뿜 하며 보는 이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 주지만….
현실은 이토록이나 갑갑하다.
“당시 엘마레의 방에 있던 제가 이 참변을 알아채고 달려왔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었습니다. 그때는 다행히 저택 전체에 불이 번져 있지는 않았기에 뛰어들어 당신을 구해 나올 순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이미….”
왜 샤페릴은 살았던 걸까.
만약 지금 샤페릴의 의식이 살아 있었더라면 그렇게 생각했겠지. 가족에게 정을 준 적도, 마음을 준 적도 없는 내게는 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지만….
엔프리제를 만난 지금은 알고 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나를 채워 주는 일인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이 얼마나 나를 채워 주는 일인지.
단 한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조차 이토록 특별할진대,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에게 사랑받은 샤페릴의 삶은 얼마나 특별했을까.
그리고 그 속에서 홀로 살아남아야만 했던 샤페릴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나는 엔프리제가 날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괴로운데.
“…죄송합니다.”
“왜 사과하는 거예요?”
“제가 더 빨리 도착했더라면 무언가가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글쎄.
그랬더라면 이 소설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테니 더 빨리 알아챘더라도, 더 빨리 도착했더라도 분명 이 저택에서 살아남는 건 샤페릴뿐이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건 내가 이 모든 것이 소설 속 세상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엔프리제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건 그 모든 게 엔프리제에게 있어서는 현실이기 때문이고.
“…….”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위로? 원망? 격려? 나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이야기?
그 무엇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은 건지 내가 무언가를 떠올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엔프리제는 이야기를 멈추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에서 철저하게 타인인 나는 그저.
행복의 잔해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후….”
힘들다.
조용히 이야기만 들었고, 마차 안에 실려 있기만 했는데 왜 이리 힘든 걸까.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가씨, 템버입니다.”
템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졸음이 몰려온다. 마차 안에서는 긴장돼서 그런가 잠도 오지 않아서 오가는 시간 내내 눈이 말똥말똥했는데. 방에 돌아오니 형광등이 점멸하는 것처럼 머리가 깜빡깜빡한다.
힘없이 대답한 소리를 어찌 들었는지 템버가 조용히 방에 들어왔다. 침대 위에 널브러진 날 보고는 낮게 웃은 템버가 가까이 다가왔다.
“피곤하시죠?”
“조금요…. 저녁은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 이대로 잠들 것 같아서….”
“이런. 아가씨께서 매콤한 게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저녁은 매운 향신료로 맛을 낸 스튜를 준비했는데….”
템버가 아쉽다는 듯한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렸다.
매콤한 스튜. 평소라면 맛있겠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입맛이 없었다.
“죄송해요…. 기껏 준비해 주셨는데.”
겨우 몸을 옆으로 돌려 템버를 보았다. 한 손으로 뺨을 감싼 채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나를 보더니 엷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와, 저런 포즈는 만화에서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실제로 하는 사람이 있구나. 심지어 잘 어울린다.
“많이 피곤하신가 보군요.”
“조금요.”
“그러실 만하지요. 방금 한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아가씨. 아가씨께서 식사를 거르시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한 소리니까요.”
…아, 그런 거였어?
난 당연히 그건 줄 알았는데. 기껏 음식을 해 놨더니 먹지도 않고 버리다니 아깝다, 뭐 그런?
생각해 보면 템버가 내게 그런 마음을 품을 리가 없는데. 왜 나는 자꾸 템버에게 엄마를 겹쳐 보게 되는 걸까.
“미안해요, 템버.”
“왜 사과하세요, 아가씨. 피곤하시면 입맛이 없는 게 당연하지요. 하지만 식사를 거르시면 건강에 좋지 않아요. 묽은 미음이라도 끓여 드릴 테니 마시고 주무시는 게 좋겠어요. 금방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으음…, 네….”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자 템버가 드물게도 빠른 몸놀림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엔프리제도 템버도 상냥하고 다정하다. 그 사람들에게 오냐오냐 받으며 지낼 수 있는 나는….
가지고 싶은 건 뭐든 가질 수 있고, 먹고 싶은 건 뭐든 먹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그래서… 이곳이 내게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