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84)
내가 예상한 대답은 당연하게도, ‘충분하다’였다. 더러운 수작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질문이었다. 다른 대답을 할 리 없다는 확신에 찬.
그런데 설마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이야.
나도 모르게 멍하니 넋을 놓고 엔프리제를 보았다. 그는,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일그러진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저는 두렵습니다.”
“두려워요…?”
“지금의 샤페릴은 저를 사랑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혹여라도… 정말 혹여라도 샤페릴의 기억이 돌아왔을 때도 당신은 저를 떠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애초에 기억이 돌아올 일이 없다.
내가 왜 여기에 빙의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작은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나의 간절한 바람과,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던 샤페릴의 바람이 맞물려서 생긴 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여하간 내가 거기로 돌아가고 싶다고 바랄 리가 없으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리는 없다. 없는데.
순간 여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그 끔찍한 악몽.
눈을 떠 보니 원래의 세계가 있었던.
“저는 당신에게 아직 많은 걸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나를 당신은 용서해 줄까요?”
“…….”
그의 불안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내가 살던 세계에서 눈을 뜰지도 모른다. 원래의 샤페릴이 돌아와 지금까지 우리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아무것도 모른 채 엔프리제를 거부할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 모든 걸 부정할 순 없으니까.
하지만 나의 그 짧은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엔프리제가 날 꽉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사실대로 말하면 이대로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탐하고 놓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걸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만에 하나 그게 당신에게 지옥이 된다면.”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한 포옹이었다.
아니, 숨이 막히는 건 그의 중얼거림 쪽일까? 나는 숨조차 멈춘 채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어느 날 기억이 돌아온 당신이, 저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자신의 삶조차 증오하게 되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 하나 상처 입는 거야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삶조차 싫어하게 된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게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
내가 마지막 선을 넘어갈 수 없었던 이유와 엔프리제가 선을 넘어오지 못했던 이유가 같았다. 우리는 서로 불안한 것이다.
나는 엔프리제에게 사랑받을 수 없게 되는 미래가 두렵다. 내가 샤페릴이 아니라는 게 들통나고 그를 속였다는 게 밝혀지는 게 두렵다. 엔프리제의 성격상 그렇다 하더라도 분명 나를 그대로 내치지는 않겠지. 먹고살 수단 정도야 마련해 주겠지.
원래 살던 세계에 돌아갈 수 없게 된 내 처지를 생각해서.
하지만 두렵다.
나는 엔프리제와 달리 이기적이라서 순수하게 그가 받을 상처만 걱정하는 건 아니다. 나만을 향하던 그의 눈동자가, 그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눈빛이 사라지는 것이 싫다. 평생 돌아오지 않을 샤페릴을 그리는 것도, 샤페릴을 잊고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도 싫다.
오로지 나만 알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을 잃는 것이 싫다. 두렵다.
동시에 그가 받을 상처 역시 두렵다. 샤페릴을 향한 엔프리제의 맹목적인 사랑이, 사실은 다른 이를 향했었다는 걸 알면 그는 어떻게 될까. 샤페릴이 아니게 된 나를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자조하지 않을까?
엔프리제는 과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엔프리제와의 생활이 달콤하면 달콤할수록 두렵다. 그래서 마지막 선 하나만큼은 도저히 넘을 수가 없었다. 넘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엔프리제 역시 같은 이유였구나.
“저는… 그날 이전의 제가 엔프리제를 좋아할 거라고 단언할 수 없어요.”
서로 이어질 운명이었던 두 사람이다. 작가라는 신의 손에 빚어진 인연.
하지만 내가 끼어들었던 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단언은 할 수 없지만.
“하지만 분명… 그날 이전의 샤페릴 역시 결국은 당신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과 접하는 방법을 잘 몰랐던 엔프리제. 할 줄 아는 거라곤 가시를 세우고 벽을 치는 것뿐이었던 엔프리제.
솔직하고 사람에게 상처 입은 적 없었던 샤페릴과 당신이 만나 분명 그런 피폐물이 만들어졌던 거겠지. 하지만 지금의 당신이라면 분명 달라질 수 있을 거야.
“처음엔 혼란스러워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엔프리제와 함께 있으면서 분명히….”
당신을 사랑하게 될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떨려서 말을 멈췄다. 무언가 뜨거운 게 뺨을 타고 흐르고 코끝이 간지러워졌다. 금방이라도 콧속에 가득 찬 뜨거운 것이 흘러내릴 것 같아 두려워 나도 모르게 얼굴을 가렸다.
가린 손가락 위로 뜨거운 물방울이 슥 흘러내렸다가 곧바로 차갑게 식었다.
왜일까. 엔프리제를 안심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이래서야 걱정하게 만들잖아.
“샤페릴?”
엔프리제가 이럴 때마다 깨닫게 된다. 나로는 부족하다고.
샤페릴이 아니면 안 된다고.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다소 서로를 아프게 하는 과정을 거치기야 했겠지만, 분명 잘되었을 텐데. 나는 엔프리제의 연인이길 바라면서도, 아니, 바라기에 이런 겁쟁이가 되었다.
사랑받는 방법을 몰라서. 사랑하는 방법도 몰라서.
“당신을 울리려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그저….”
당황한 엔프리제가 어쩔 줄 몰라 한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지만, 이내 새로운 눈물 자국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멈추지 않는 눈물에 도리어 그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미안해요, 샤페릴. 제발 울지 말아요.”
미안해야 하는 건 나다.
나 하나의 욕심으로 모든 걸 어그러뜨린 건 나다. 그런데도 엔프리제가 사과하게 만들었다.
나는.
엔프리제, 나는.
“당신은… 분명 그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사랑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보자, 엔프리제.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웃었다. 웃으려 했다.
* * *
우리가 지냈던 작은 저택에서 대공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었는데, 도리어 수도는 꽤 멀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 혼자 앉아 멍하니 흔들리고 있기를 몇 시간째.
그런데도 아직 창밖의 풍경은 바뀔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시잇-!”
덜컹, 하고 흔들리는 느낌에 놀란 플리가 털을 세우며 실체 없는 적을 향해 털을 세운다. 피식 웃고는 플리의 등을 가볍게 쓸었다.
“미안해. 혼자가 아니었지, 참.”
엔프리제는, 없다.
정확히는 이 마차 안에는 없다. 주변을 경계하고 싶다며 밖에서 따로 따라오겠다고 했다. 나는 그저 웃으며 알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플리, 왜 이렇게 된 걸까.”
“삐?”
곤두선 흰 털을 부드럽게 쓸며 묻자, 플리가 고개를 갸웃한다. 식상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까만 콩 같은 눈동자가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보통 소설에서는 있지, 두 사람이 마음을 확인하기까지가 가장 큰 고비거든. 제일 큰 고구마 구간이기도 하고. 하지만 대신 마음을 확인한 후에는 흔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아.”
그런데, 나는 왜.
그런데, 우리는 왜.
이토록이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걸까.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인데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처음 생각대로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엔프리제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그냥 책 속의 등장인물이라고 생각하며 연극을 구경하듯 구경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게, 아니, 샤페릴에게 향하던 그 눈빛이나 애정이 내게 향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딱 선을 긋고 그 좁은 천국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게 다 엔프리제가 너무 사랑스러운 탓이다!”
“삐?!”
왁, 하고 소리를 내지르자 플리가 놀라 펄쩍 뛴다.
그냥 관용구가 아니라 진짜 펄쩍 뛰더니 마차 여기저기를 점프해서 옮겨 다닌다. 마치 용수철처럼 완벽한 탄성을 자랑하는 움직임에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한참을 삐-!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 쏘아지던 플리가 지쳤는지 진정했는지 겨우 멈춰 섰다.
족제비도 지치면 헥헥 거리는구나.
“괜찮아? 미안해, 놀라게 해서.”
낯선 환경인 데다 나까지 아까부터 계속 평소랑 다른 느낌이었으니 더 스트레스를 받았겠지. 플리를 안아 무릎에 올려놓고 살살 마사지를 해 주었다.
긴 몸통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은 팔다리를 쭉쭉 펴 주다가, 살살 주물러 줬다. 약간 힘을 줘서 등을 쓸어 주고 동시에 머리도 살살 문질러 주자 까만 콩이 사르르 녹아들더니 이내 입을 헤 벌리고 잠에 빠져들었다.
귀엽긴.
족제비는 한 번 잠들면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해, 한 손은 등을 쓸어 주는 움직임을 유지한 채 다른 손으로는 뒷발의 젤리를 조물거렸다.
말랑말랑.
뒷발도 앞발처럼 발가락이 다섯 개다. 요게 여차할 때는 마치 사람의 손가락처럼 여기저기를 꽉 움켜쥔다. 앞발로 고기를 꽉 움켜쥐고 뇸뇸거리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스며들 정도로 귀엽다.
“잘 자, 플리.”
플리의 발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엔프리제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 조금 있다가 잠시 휴식을 취할 때엔 보이겠지. 지금까지도 두 시간에 한 번은 휴식을 취하게 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대공저를 나선 후로 한 번도 엔프리제를 보진 못했다. 안전 확인을 이유로 혼자 바쁘게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다며, 템버가 다정한 미소를 띤 얼굴로 그리 말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엔프리제의 곁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할 것 같은데. 하지만 그 말은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기분 탓일까.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창을 통해 매캐한 불의 냄새가 흘러드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