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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83화 (83/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83)

첫인상은 그거다.

와, 진짜 재수 없게 생겼다.

일단 되게 거만해 보인다. 지가 뭐 신이라도 되는 거처럼 눈초리도 그렇고 생김새 자체가 거만하게 생겼다. 게다가 되게 사납게 생겼다. 저 얼굴로 노려보면 아마 평소의 나라면 입도 벙긋 못 하지 않았을까. 평소 얼마나 갑질을 해 댔으면 저런 얼굴이 나와?

뭐, 잘생겼다고 말하자면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닌 듯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재수 없다. 왠지 모르지만, 재수 없다.

날 멍 때리면서 보는 것도 왠지 재수 없고.

“폐하?”

“레이디 리베테. 짐을 기억하지 못하시오?”

“네. 이야기를 들으셨겠지만, 저는 이전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폐하를 뵌 기억도 없습니다.”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마다 황제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어떠냐. 정내미 팍팍 떨어지지? 원래 자기는 기억하는데 남은 기억 못 하는 게 제일 열 받는 일이거든.

뭔진 모르지만, 얘랑 샤페릴 사이에 뭐가 있었으니까 얘가 샤페릴을 좋아하게 된 거겠지. 하지만 네겐 인생을 바꿀 정도의 일이 내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자존심에 상처 내고 거기에 소금까지 뿌려 주마!

“…지내는 건 불편하지 않으시오? 원래 지내던 곳이 아니라 불편한 것이 많을 텐데.”

“전혀요. 오히려 너무 잘 해 주셔서 나오기 싫었을 정도인걸요. 사실 지금도 다시 그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바보도 아니고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들었겠지?

나와 엔프리제, 그리고 템버만이 있었던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게 무슨 말인지. 하지만 혹시 모르니 마무리로 엔프리제를 보며 짓궂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긴장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던 그가 날 보며 마주 웃었다.

황제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귀족 영애인 그대에게 제대로 된 시녀조차 붙여 주지 않았나 보오, 제 형님은.”

제대로 치장하지도 않은 내 꼴에 대해 말하는 거겠지. 조금 전에 방에서 뒹굴거리던 모습 그대로 나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근데 그게 뭐?

“설마요. 최고의 시녀를 붙여 준 걸요. 템버는 정말 대단해요. 맛있는 요리를 할 줄 아는 데다가 디저트도 잘 만들고 옷까지 잘 만든다니까요?”

“시녀가 음식을 만든다니….”

“템버는 제 직속 시녀니까요. 다른 시녀나 하녀는 믿지 못하겠어서 제가 싫다고 했어요.”

“믿지… 못하겠다고?”

황제가 붙여 준 사용인을 믿지 못하겠다. 그렇게 말하는 게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는 알고 있다.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하지만.

“제가 처음 이 저택에 온 날, 엔프… 아니, 대공 전하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어요. 제 주인도 그렇게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제가 먹는 음식이나 입는 옷에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요?”

“…그들이 무례를 저질렀군. 사과하겠소.”

“네? 왜 폐하께서 사과하세요? 그 사람들이 잘못한 거잖아요. 폐하께서 시킨 것도 아닐 텐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생글생글 웃었다. 아주 모르는 건 아니지만, 뭐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다. 정말로 모르겠으니까.

이 남자가 엔프리제에게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물론 짐이 시킨 건 아니오. 하지만 형님의 생활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황궁이 관리하고 있고, 그들은 황제인 내가 직접 형님을 모시라 뽑은 자들이오. 그들이 무례를 저질렀다니 관리가 소홀했던 점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오.”

자존심 강한 남자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쉽게 굽히나? 이 정도면 정 떨어질 만도 한 것 같은데.

아니면 남의 것이면 더 불타오르는 성격인가?

“아, 그랬군요. 저는 당연히 대공 전하의 위치가 있으니까 대공 전하 본인이 뽑은 사람들인 줄 알았어요.”

난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게 시치미를 떼자 황제가 표정 관리도 못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이 남자보다는 엔프리제가 더 황제에 어울릴 것 같은데. 속 좁아 터진 선황 놈 같으니.

지가 좋아서 따라다녀 결혼한 아내도 믿지 못하고 머리카락과 눈 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엔프리제를 박해하고 이딴 놈을 편애하다니.

“…불편한 게 없다면 다행이오. 그대가 원한다면 리베테 저택을 재건하여 그쪽으로 거처를 옮겨 줄 수도 있소만….”

“괜찮아요. 저는 여기가 더 좋아요.”

“이 저택은 불편하다 하지 않으셨소.”

“저택의 사람들이야 불편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일부러 엔프리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귓바퀴가 새빨개진 엔프리제. 웃음을 참느라 저런 걸까. 아니면 내가 제 편을 들어 주는 게 기뻐서 그런 걸까.

금색 눈동자가 나를 보고 예쁘게 휘어졌다. 나도 거기에 대고 마주 웃었다.

“여기엔 대공 전하가 계시니까요.”

그 무엇도 필요 없다. 내게 필요한 건 오로지 엔프리제뿐.

그 마음은 틀림없는 진심이었다.

엔프리제에게서 눈을 떼고 황제를 보았다. 파란색 눈동자가 붉게 달아오른다. 색이 짙은 얼굴 역시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핏줄이 솟았다.

분노.

그건 나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엔프리제에 대한 것일까.

어느 쪽이건 별로 상관은 없었다.

“폐하의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는 대공 전하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쐐기를 박아 버리는 내 한마디에, 황제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소파를 강하게 쥐었을 뿐이었다.

* * *

“헉, 미쳤다.”

소파가 다 뜯겼네. 이거 비싼 가죽일 것 같은데. 무식하게 생긴 게 힘만 세 가지고.

내가 너무 화를 돋웠나? 확실하게 정 떼려고 그런 건데.

자존심 강한 성격에게 애매한 거절의 말을 하는 건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엔프리제가 보고 있으니 그렇게 말한다, 라든가 협박받아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혹은 자신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그렇게 말한다고 억지로 생각할 수도 있고.

그래서 중간중간 엔프리제와 눈빛 교환을 한 거였다. 내 진심을 보여 주려고.

진심으로 다른 남자를, 그것도 저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말하는 여자를 쫓아다닐 정도로 자존심이 없는 남자는 아닐 걸로 보인다. 실제로도 순순히 돌아갔고.

“괜찮습니까, 샤페릴?”

“괜찮아요. 너무 화를 돋운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뜯겨 나간 소파 앞에 쭈그려 앉아 그렇게 말하자, 엔프리제가 살며시 내 옆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리고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딱히 균형이 무너질 정도로 세게 감싸 안은 건 아니었지만, 괜스레 툭 옆으로 넘어가 엔프리제의 어깨에 기댔다.

“괜찮습니다. 그 정도로 하지 않았다면 억지로라도 당신을 데려갔을지도 모르니까요.”

“나 잘했어요?”

“무척이요.”

엣헴. 내가 좀 잘하지, 이런 건.

뿌듯한 마음에 살짝 그의 품을 파고들자 순순히 안아 준다. 귓가에 엔프리제의 숨결이 들리고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린다.

두근두근.

기분 좋게 울리는 소리에 사르르 눈을 감았다.

“처음입니다.”

“응?”

“바르카의 앞에서 제 칭찬을 한 사람은 샤페릴이 처음입니다.”

응?

엘마레나 템버는 엔프리제 편이잖아. 하긴 템버가 황제를 만날 일은 거의 없었겠구나. 엘마레는 눈치가 빠르고 약삭 빠른 인상이었으니…, 뭐, 앞에서 대놓고 엔프리제 칭찬을 하진 않았겠고.

“전 만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항상 엔프리제 칭찬만 하는데요?”

“…맞습니다. 그런 사람도 처음입니다.”

“흐흥….”

살며시 손을 뻗어 엔프리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듬직한 가슴팍과 달리 허리는 그렇게 두껍지 않아 손이 겹쳐진다. 꼬물꼬물 손가락을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그것 때문에 엔프리제는 분명 많이 상처 입었겠지만, 사실 저는 조금 기뻐요.”

작가 나쁜 놈!

이라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아무리 엔프리제가 샤페릴에게 반하기 위한 당위성을 위한 것이었다고는 해도, 정도라는 것이 있지 않나? 솔직히 둘이 잘 꽁냥거리기만 한다면 그런 당위성이 뭣이 중하다고!

라고 생각하면서도 잘 짜인 서사를 보면 눈물 훔치던 나였긴 하지만.

크흠.

아무튼 엔프리제에게 그런 고행을 강요한 작가는 밉지만, 엔프리제에게 이런 경험을 준 게 내가 처음이라는 건 솔직히 말하면 조금 많이 기쁘다.

“기쁩니까?”

“아무도 엔프리제가 이렇게 좋은 남자라는 걸 몰랐다는 거잖아요. 저만 안다는 거잖아요. 그게 조금 기뻐요. 만약에 누가 미리 알고 엔프리제 좋다고 따라다니고 했으면 질투 날 뻔했어요.”

“…당신이 기쁘시다면 저도 기쁩니다.”

쪽, 하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엔프리제가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감촉이 아쉬워서 휙 고개를 돌려 그를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당황한 듯 날 보던 엔프리제가 피식 웃고는 다시 입을 맞췄다.

가볍게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입맞춤. 그뿐인 스킨십에도 심장의 고동이 격해지는 게 느껴진다. 분명 내 심장도 그렇겠지.

“저한테도 모든 게 엔프리제가 처음이에요.”

“…….”

“예전의 저에게는 처음이 아닐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의 저는 예전의 제가 아니니까요.”

빙 둘러서 사실을 고한다.

절대로 엔프리제에게 말해선 안 될 사실을. 내 마음속에서 가시처럼 남아 죄책감을 쿡쿡 찔러 대는 사실을.

하지만 꼭 말해야 하는 사실을.

엔프리제는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샤페릴이 돌아온다면 저를 미워하지 않을까요?”

미워…할지도 모른다.

본래 샤페릴의 생각 따위 내가 알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알 일은 없을 테고.

하지만.

“지금의 저로는 안 돼요?”

“네?”

“엔프리제는 기억을 잃기 전의 나에게 사랑받고 싶어요? 지금의 나에게 사랑받는 걸로는 모자라요?”

나는 치사하다. 이런 걸 답정너라고 하는 거겠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내가 그걸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 엔프리제라면 분명 내가 원하는 답을 할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에 두려움 없이 물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모자랍니다.”

놀랍게도, 산산이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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