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82)
“엑.”
나도 모르게 어딘가에 깔리는 개구리 같은 소리를 내 버렸다. 샤페릴의 고운 목소리로 이딴 소리를 내다니. 죄책감이 들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더러 황제를 만나라니!
“왜요…?”
엔프리제 역시 내키지 않는 듯 표정이 썩었다. 저 남자가 저렇게 썩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건 처음 본다. 저런 표정도 할 수 있는 남자구나.
…근데 저것조차 귀여운 건 내 취향이 썩었기 때문일까.
“황제 직속 기사단, 카발레이 기사단을 끌고 왔습니다. 아마 제가 당신을 보여 주는 걸 거부하거나 당신께서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하면 무력으로라도 끌고 갈 생각이겠죠.”
“그렇게 대놓고?”
“이 제국에서 황제란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설령 샤페릴이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끌고 가려 한다면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아니, 그렇다면 더더욱 나가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여기 결계 안에 있으면 안전한 게….
하긴 황제면 황실 마법사 같은 것도 데려왔겠구나.
“바르카는 자존심이 강합니다. 지금까지 그를 거부한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분명 샤페릴이 저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한다면 억지로 데려가진 못할 테지요.”
오오.
아니, 이럴 때 보통 나를 거부한 건 네가 처음이야! 같은 전개로 가는 거 아니야? 하지만 황제는 엔프리제의 동생이니….
아니, 이런 경우 보통 가족이 제일 그 사람을 모르던데.
“제가 거부했는데도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하면 어떻게 해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엔프리제가 제 허리춤의 검을 꽉 쥐었다. 무장하고 있었구나. 엔프리제 역시 여차하면, 이라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게 황제에게 향하는 순간 엔프리제는 반역자가 되는 거잖아. 그럼 평생 쫓기는 생활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황족으로서 평생을 살아온 엔프리제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겠지.
“알았어요. 그렇지만, 가급적이면 그 검은 뽑지 말아요.”
신이시여. 제발 바르카라는 놈의 자존심이 하늘을 찔러서 지를 거부하는 저만 미워하게 해 주세요. 기왕이면 저에 대한 흥미가 똑 떨어지게 만들어 주세요.
아니지. 걔가 좋아하는 건 샤페릴이잖아.
엔프리제야 샤페릴을 먼발치에서만 봐 와서 잘 몰랐다고 치지만, 그 남자는 그런 것도 아닐 거 아냐. 가까운 데서 날 보면 정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했던 여자는 어디 가고 이런 촌년이 나타났어?! 같은 느낌으로.
“가죠.”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문을 열어젖혔다.
가즈아, 김수희! 까짓 환상에 빠져 있는 남자 하나 정 떨어지게 못 할쏘냐! 내가 아주 샤페릴이라면 정이 떨어지게 만들어 주마!
라고 생각하며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는 내 뒤에서 엔프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샤페릴!”
“네!”
“이쪽입니다!”
…거참. 미리 말해 주지 그랬어요.
나는 원망의 눈길로 엔프리제를 보았다.
* * *
정말로 데리고 오는 걸까. 그 남자에게는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을 텐데, 왜?
바르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턱을 괸 채 샤페릴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질 않았다. 설마 이러고 있는 동안 몰래 샤페릴을 다른 곳으로 빼돌릴 심산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거라면 지금쯤 카발레이 기사단에서 보고가 있어야 했다. 이 저택의 주변을 감시하도록 명해 두었으니까.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비밀 통로라도 있는 것일까?
그것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저택을 지은 것도, 이 저택을 관리하는 것도 황실에서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 피 도둑놈에게 사람을 구슬리는 재주 따윈 없었다. 심지어 감히 황제의 사람을 구슬려 제 사람으로 만드는 재주 따위는.
그렇다면 대체 무엇일까.
설마, 진심으로 샤페릴이 그 남자를 떠나길 바라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건가?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있을 리가 없지.”
샤페릴이 누구던가.
일견 붙임성이 좋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는 그 누구보다 고고하고 굽히지 않는 신념이 있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피 도둑 따위에게 마음을 줄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이 제국의 황후 자리조차 거부했던 여자가 아니던가.
-저희 가문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전에 없던,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부족한 저를 그토록 좋게 봐 주시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말할 때까지만 해도 긍정의 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거절의 말 따위는 상정하지도 않았다.
제국의 황후란 어떤 자리던가.
귀족 영애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이며, 누구나 탐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그녀가 원한다면 리베테 가문은 백작이 아니라 후작, 공작 가문의 작위까지도 줄 수 있었다. 그녀의 가문 구성원들은 중직에 오를 것이며 세상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면.
하지만.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폐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자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송구하다는 말과 달리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바르카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화살에 꿰뚫리기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주겠소. 무엇을 원하시오?
평소의 바르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었다.
그에게 있어 여자란 트로피 같은 존재였다. 그를 돋보이게 만들어 주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단 뜻이었다. 본래라면 사실 샤페릴 정도의 위치에 있는 여자라면 황후의 자리를 제안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아름다운 여자는 좋은 트로피가 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기에 좋을 뿐이지 정치적인 면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분명 황후가 아니라 정비, 아니 후궁의 한 사람으로 두는 정도로 끝났었겠지.
하지만….
이상했다. 바르카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결정이었지만, 그는. 그녀가 자신의 황후가 되어 주길 바랐다.
그래서 매달리듯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파란 눈동자는 대체 어떤 색을 띠고 있었을까. 어쩌면 애절하게 그녀를 붙잡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제가 폐하의 구혼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세 가지?
-첫째. 저는 리베테 가문의 일원임이 자랑스럽습니다. 리베테 가문은 청렴결백하였으며 늘 제국에 충성을 다 하고 영지민들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리베테가는 땅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이라는 생각으로, 귀족이란 제국민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일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정치적으로는 힘이 없는 가문이기도 합니다. 폐하의 반려 가문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가문입니다.
-그건 이미 잘 알고 있소. 알고도 이야기한 것이오.
-둘째. 저 자신이 폐하껜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귀족 영애로서 필요한 소양은 배웠으나, 저 자신이 귀족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황후가 되면 분명 큰 반발을 부를 만한 일들을 하게 될 겁니다.
-상관없소. 그대가 원하는 일이라면.
그녀가 무슨 짓을 한들 무어 대수일까. 어차피 제국은 황제의 것이었고, 황후는 황제의 반려였다. 그녀에게 반발하는 자가 있다면 숙청하면 그만인 일.
그렇게 생각해서 답하자 샤페릴은 알 듯 말 듯 묘한 미소만 띠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셋째. 이게 폐하의 구혼을 받아들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제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습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샤페릴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설마 그를 택하기 위해 자신을 거절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카운 백작가의 영식.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그는 십 대 때부터 샤페릴의 약혼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전 성년을 맞이했음에도 그가 샤페릴과의 결혼을 미루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지참금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운 가문은, 두 사람이 약혼할 무렵까지만 해도 나름의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영지에 크게 흉년이 들면서 톱니바퀴가 어그러지기 시작하더니 그 후로는 쇠락 일변도.
지금은 얼마 되지도 않는 지참금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비참한 상황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그대의 약혼자는….
-제레닉과 제가 약혼한 지 어언 십 년이 다 되어 갑니다. 설령 당장 저와의 결혼이 어렵더라도 기다릴 생각입니다.
-카운가에서는 이미 약혼을 해지하자는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소.
-제가 거절했습니다. 겨우 돈 때문에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이를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망해 가는, 아니 이미 망한 백작가의 영식과 제국의 황제. 저울질할 것도 없는 두 사람인데 어째서 그녀는 그를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다시 한 번 설득을 해 보려 했으나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입을 여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올곧은 눈동자였다.
그런 그녀가, 설령 기억에 다소 문제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그 도둑놈 따위에게 마음을 줄 리가 없었다. 그러니 하나 더 가능성이 있는 건.
“협박하고 있는 건가.”
바르카의 앞에서 말조심하도록 협박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 샤페릴이 협박 따위에 무너질 리가 없지.
바르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차피 그녀가 내 눈앞에 오기만 한다면 문제는 다 해결된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가문을 잃고 갈 곳 없는 신세가 된 그녀를 이 손안에.
고양감과 기대감으로 몸이 떨렸다. 그리고.
“폐하, 레이디 리베테를 모시고 왔습니다.”
드디어 증오스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까. 순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바르카를 기다리지 않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거기에 서 있는 건.
“…….”
새하얀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샤페릴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낯선.
“처음 뵙겠습니다, 폐하. 샤페릴 드 리베테라고 합니다.”
바르카가 그리고 또 그리던 여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