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79화 (79/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79)

“으으, 짜증 나!”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이겨 내지 못하고 결국 침대에 드러누웠다. 어지럽게 엉겨 있는 이불을 펴려다 열 받아서 몇 번 허공에 발길질을 했다.

“삐?”

무슨 일이 있나 싶었는지 플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다리로 서서 나를 본다. 플리에게 손을 내밀자 쪼르르 달려와 내 팔을 타고 올라왔다.

“플리이. 엔프리제가 부족해!”

계속 붙어 있었기에 몰랐다. 이렇게까지 엔프리제 중독이 되어 있었을 줄은!

그 작은 저택에 있을 때는 늘 달라붙어서 책도 읽고 간식도 먹고 알콩달콩하니 재미지게 살고 있었는데, 이 더럽게 넓은 저택으로 옮기자마자 이 꼴이다.

설마 이런 어려움이 존재할 줄이야!

“등이 시려! 책도 읽을 맛이 안 나! 다 재미없어!”

가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것도 못 하고. 맨날 안고 있다가 혼자 있으니까 뼈가 시린 것 같고.

원래 사람 들어온 자리는 티가 안 나도 나간 자리는 티가 난다더니, 딱 그 짝이다. 언제 스몄는지 모르게 스며들더니 나가고 나니까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다.

템버가 완성된 드레스를 가져와서 전시해 주었지만, 그것도 시큰둥하다.

“만나러 갈까? 근데 어디 있는 줄 알고 만나러 가?”

나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정보 수집도 하고 견제도 하고 로비도 하는 모양이던데.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거라는 건 알지만.

글쎄. 솔직히 이게 나를 위한 게 되는 걸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든다. 이래서 소설 속 남주 여주가 그렇게 싸우고 오해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 하는 일이 생기는구나.

아무리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전해지지 않는 게 있다. 혹은 전해졌음에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 과거를 모르는 엔프리제는, 그 작은 저택을 천국이라고 여기던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설령 과거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하겠지.

나 역시 엔프리제가 이해되지 않는다. 굳이 행복한 두 사람의 시간을 깨어 가며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그곳에서 날 꺼내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해서, 혹여라도 내가 그를 떠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설마 날 떠나게 하려는 게 목적은 아닐 테고.

“플리, 넌 알아? 엔프리제가 어딨는지.”

“삐?”

킁킁거리며 내 냄새를 확인하던 플리가 고개를 갸웃한다. 몸이 길어서 그런지 마치 물음표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쓴 적이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플리한테는 연락 기능도 있잖아.

써 볼까.

“…하지만 방해가 되지 않을까?”

“삐?”

둘만 있었을 땐 신경 쓰지 않아도 됐던 것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이런 게 싫어서 거기서 나오기 싫었던 건데.

…하.

언제까지고 한탄만 해도 별 의미는 없다. 결국 그곳을 나오기로 결정한 것은 나고, 여기서 잘 해 보자고 다짐도 했었잖아.

“일단 템버를 불러서 엔프리제의 일정에 대해서 물어보자. 그게 낫겠지.”

그렇게 정하고 설렁줄을 당기려 몸을 일으키는데.

“샤페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기다리고 기다리던 목소리.

조금 전까지 뭉그적대던 나는, 쏜살같이 일어나 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대답 대신 벌컥 문을 열었다.

거기엔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뜬 채 나를 내려보는 엔프리제가 있었다.

“샤페릴…?”

“왜 이제 와요!”

분명 조금 전에 앞으로 잘 해 보자! 라고 다짐했었는데, 엔프리제의 얼굴을 보니 나오는 건 원망 섞인 말이었다. 그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자 엔프리제가 잠시 멈칫하더니 나를 마주 안았다.

“계속 혼자 둬서 죄송합니다.”

뭘 잘못했는지는 아는구나.

이 낯선 데에, 이 낯선 사람들 사이에 나를 방치하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 샤페릴? 손님이 있습니다.”

…응? 손님?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난감하다는 얼굴로 날 보며 웃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둥글고 커다란 안경을 쓴 학자 같은 차림새의 중년 남자. 책 속 세계라 그런가. 이 사람도 잘생겼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리베테. 저는 마탑에서 결계 마법을 가르치고 있는 가르함이라고 합니다.”

…….

아니, 잘생겼네라고 말하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자, 괜찮아. 당황하지 말자. 이 정도는 연인끼리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엔프리제가 데려왔다는 건 어느 정도 우리 사정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뜻이잖아?

진정해.

나는 일단 엔프리제의 허리에 감았던 팔을 풀었다. 아침에 플리가 복숭아를 가져다가 뭉개는 바람에 옷도 갈아입어서 차림새도 문제없다. 아까 침대 위에서 바둥거릴 때 머리카락이 좀 흐트러지긴 했을 테지만, 머릿결이 워낙 부드러워서 크게 티는 나지 않을 테지.

괜찮아. 침착해.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며 책에서 본 대로 가볍게 예를 갖추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가르함… 님?”

아차. 호칭을 생각 안 했다.

이게 맞나 싶어서 슬쩍 엔프리제를 쳐다보자 그가 피식 웃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샤페릴, 당신 방에 결계 마법을 걸 겁니다.”

왜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이 저택의 사람들이 얼마나 엔프리제에게 적대적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가르함이 내 방문에 손을 댔다.

“잠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레이디께서는 방을 나가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 보고 있으면 안 되나요?”

마법 쓰는 거 본 적 없어서 좀 궁금한데. 가르함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결계 마법은 계산도 복잡하고 좌표 지정을 많이 해야 하는 작업이라, 곁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아무래도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레이디께는 죄송하지만 자리를 비워 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나.

“끝나면 곧바로 응접실로 가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가르함.”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가르함을 뒤로하고 엔프리제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순순히 그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으으윽!”

묘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중년의 남성은.

“…시, 실례지만, 이 아이를 좀… 데리고 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손가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플리를 내밀었다.

* * *

“갑자기 손님을 데려가서 죄송합니다. 최대한 서두르려 하다 보니….”

“괜찮아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저보다는 그분이 더 놀라지 않았을까요. 괜찮으려나.”

“괜찮을 겁니다. 입이 무거운 남자니까요.”

아니, 소문나는 건 상관없는데.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될까 봐 걱정돼서 그렇지.

“이제 바쁜 일은 다 끝난 거예요?”

“아직…. 그래도 조금만 더 하면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흠….”

“오늘, 가르함이 일을 마친 후에 계약서를 하나 쓸 겁니다.”

“계약서요?”

자고로 계약서에 함부로 도장 찍는 거 아니랬는데. 대체 무슨 계약서이길래.

“가르함은 마탑의 대표로 여기에 온 겁니다. 일전에 이야기했던, 연구에 대한 계약을 할 겁니다.”

아, 그거….

뭘 시키려나. 연구라고 하면 뭔가 과학자가 수상한 기계로 알 수 없는 괴물체를 생성해 낸다거나, 묘한 상황을 일으키거나…. 그런 거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중요한 계약인 만큼 마법 계약서를 쓸 겁니다.”

“마법 계약서…. 읽은 적 있는 것 같아요.”

마탑의 역사에서 읽었던가. 아니면 편리한 마법 도구 100선에서 읽었던가.

일반적인 계약서와 다를 게 없지만, 마법 계약서의 경우 강제력이 부과된다. 무슨 뜻이냐면 어겼을 때 처벌이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엔프리제는 매일 샤페릴에게 케이크 하나를 제공한다는 계약을 맺었다고 쳐 보자. 실수로 엔프리제가 내게 줄 케이크를 땅에 떨어뜨려서 주지 못했다. 일반적인 계약이라면 ‘내일 하나를 더 줄게요’라든가 ‘오늘은 케이크 대신 마카롱을 드릴게요’ 등의 타협을 볼 수 있겠지만 마법 계약서는 다르다. 적혀 있는 내용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두 사람이 동의하여 작성한 처벌이 실행된다.

처벌 내용은 사소한 것부터 무거운 것까지 두 사람 모두의 동의가 있다면 어떤 것이든 적어 넣을 수 있는데, 쉽게 말하면…. 딱밤 맞기부터 죽음까지 뭐든 적어 넣을 수 있다는 뜻이다.

“샤페릴이 안심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절차라고 생각했습니다.”

뭐, 안심이야 되겠지만…. 반대로 나 역시 계약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처벌받는다는 뜻인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탑 쪽에서는 조건을 적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돼요?”

“원래라면 연구 자체가 불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마탑은 황가의 말에 거역할 수 없으니까요.”

흠. 마법사라는 게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들이잖아. 난공불락의 요새조차 순식간에 떨어뜨릴 정도로. 그럼 그 사람들이 반역자가 되면 어떻게 해?

내 의문이 얼굴에 드러나기라도 했는지 엔프리제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탑이라는 건 처음부터 황가에서 만든 것입니다. 재능 있는 마법사들에게 다른 곳에서는 절대 받을 수 없을 정도의 특혜를 베풀죠. 또한 원하는 연구 역시 인륜에 어긋나지 않는 이상 최대한 지원해 줍니다. 대신 마법 계약을 해야만 하죠.”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주는구나. 하긴 강대한 힘을 가진 세력을 그냥 놔둘 리가 없긴 하지.

“그게 끝나면 또 나가야 해요?”

“…….”

내 말에 엔프리제가 잠시 망설이는 듯 손끝으로 톡, 하고 제 무릎을 두드렸다. 곁에 드러누워 잠든 플리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엔프리제의 곁에 털썩 주저앉자 그가 반사적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많이… 힘드셨습니까?”

“힘들 게 뭐가 있어요? 때 되면 밥 나오고 청소 다 해 주고 빨래도 다 해 주는데. 힘든 게 아니라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요.”

부루퉁하게 대꾸하자 엔프리제가 날 더 꽉 끌어안았다.

“당신께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니 조금만 참아 주세요.”

바보 같은 엔프리제. 나한테는 자유가 필요 없는데.

하지만 차마 그 말은 입에 담지 못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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