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78화 (78/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78)

이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 물건이라곤 템버가 만드는 중인 드레스 몇 벌과 액세서리 세 세트가 전부니까. 플리는 이동장에 넣으려 하자 너무 심하게 거부해서 내 목에 돌돌 감겨 있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정말로 들어가기 싫었는지, 평소라면 잠깐 목에 감겨 있다가 내려오는데 지금은.

“싯-! 쉿!”

이동장을 향해 계속 경계하며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귀엽긴.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괜찮아요. 조금 흔들리긴 하지만.”

생각보다 정말 괜찮다.

소설 속에서 보면 돌부리라도 밟으면 마차가 휘청해서 남주한테 폭 안기는 사고도 생기고 하던데. 역시 현실은 시궁창이야.

아니, 물론 그런 사고 없이도 얼마든지 안으면 되긴 하지만. 그 우연에서 피어오르는 두근거림이 좋은 건데.

“…저택에서도 가능한 한 제가 곁에 있을 테지만, 혹여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무슨 일?”

“어떤 일이든 상관없습니다. 샤페릴이 불쾌하다고 생각했거나 불편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

“당연하죠. 제 성격 몰라요?”

싫은 걸 참고 억누르는 건 이제 질렸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입장도 질렸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렇죠.”

엔프리제가 피식 웃더니 새장 속으로 손을 뻗었다. 셰리가 다가와 부리로 콕콕 엔프리제의 손가락을 쪼았다.

“셰리는 얌전하네요.”

“새장에서 나와도 잘 날아다니지 않습니다. 경계 기능을 사용할 때만 돌아다니지 그 외에는 대부분 횃대에 앉아 있다고 합니다.”

너도 집순이구나, 셰리. 아니, 집돌이라고 해야 하나. 얜 성별이 뭘까.

“저 같네요.”

“그런가요?”

엔프리제가 나와 셰리를 번갈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샤페릴보다는 셰리가 더 얌전한 것 같습니다만.”

…이 남자가?!

나보고 좋다고 그럴 땐 언제고! 나랑 비교해서 다른 애를 칭찬해?!

“…저도 엔프리제보다….”

좋은 게.

뭐가 있지.

음.

“…엔프리제보다….”

먹는 거?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랑 먹는 걸 비교할 순 없지. 먹는 건 없어도 괜찮지만 엔프리제는 없으면 곤란한걸.

플리? 플리는 분명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엔플리제는 잘생기고 멋있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섹시하기까지 하니까….

한참을 끙끙거리며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엔프리제보다 좋은 게 생각나질 않는다. 엔프리제가 피식 웃더니 내 뺨을 감싸 쥔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꾹 누르며 속삭였다.

“그래도 그런 샤페릴이 좋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

크흠. 그, 그렇다면야 뭐.

“엔프리제.”

“네.”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요. 엔프리제보다 더 좋은 게 있나.”

“…네.”

표정이 살짝 어두워진다.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왜 눈치채질 못하니, 이 남자야! 둔해 가지곤.

“아무리 생각해도 엔프리제보다 좋은 게 없어요.”

“…….”

아, 빨개진다.

요즘은 스킨십 해도 빨개지기보단 섹시한 얼굴이 되던데. 이런 귀여움은 오랜만이네.

“그리고 분명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속닥속닥,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이자 입술 끝에 닿아 있는 엄지손가락이 파르르 떨린다. 살짝 움직이더니 엔프리제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샤페릴. 당신한테 입 맞춰도 괜찮을까요?”

나는 대답 대신 눈을 감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까실한 손가락이 제 입술이 닿을 곳을 미리 확인하듯 슥 내민 입술 위를 훑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드러운 감촉.

그리고 이어지는.

“삐-!”

플리의 박치기.

“…….”

“…….”

플리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뜬 나와, 살짝 떨어진 곳에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엔프리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하.”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 * *

“어서 오십시오, 전하.”

“어서 오십시오.”

저택에 도착하자 미리 마중 나와 있던 이들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대공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 몰랐던 건 아니지만, 새삼스럽게 피부에 와닿는다.

지금 저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야 한다는 거지? 이건 무슨 고문이지.

나 같이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인데.

“괜찮습니다. 제가 곁에 있으니까요.”

엔프리제는 그렇게 속삭인 후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후.

나는 낮은 심호흡을 한 후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

내….

“……!”

긴 치마를 입어 본 적이 거의 없다.

지난번에 배 타러 나갔을 때도 말에 얹혀 있거나 엔프리제가 거의 안고 다니다시피 해서 발이 땅에 닿은 적이 거의 없었다.

이래서 창작물 속 영애들이 치맛자락을 들고 움직이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이 몸이 앞으로 휙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엔프리제는 가볍게 내 몸을 받아 내 바닥에 놓아주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뭐, 이럴 줄 알긴 했는데.

그래도 순간 치맛자락을 밟고 넘어질 때의 그 섬뜩함은 사라지질 않는다. 심장이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두근거린다. 이래서 흔들 다리 효과라는 게 나온 건가!

엔프리제의 손을 꽉 잡은 채 다른 손은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엔프리제가 피식 웃더니 내 손을 꽉 마주 잡아 주었다. 놓치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는 것처럼.

그 상태로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는데.

“…무슨 조합이야.”

“황가의 피 도둑이랑 사교계의 꽃이라니.”

“지금까지 몰래 숨겼던 거 보면 모르겠어? 분명 아가씨에게 몹쓸 짓을 했던 거야.”

“가엾은 아가씨.”

…….

저거, 지금 들으라고 소곤거리는 거 맞지? 설마 지금 안 들리게 작은 소리로 말한다고 말하는 거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입은 옷은 깔끔하고 단정한데 입이 전혀 단정치 못하다.

어떻게 할까.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엔프리제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다. 황가의 사람들이라고. 그러니까 쟤가 저렇게 경거망동할 수 있는 건 분명 뒤에 있는 황제를 믿고 저러는 거겠지.

하지만 현 황제는, 결국 엔프리제가 황위 계승권을 포기해 줬으니까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거잖아. 엔프리제의 머리카락이나 눈 색 중 하나만 선황을 닮았어도 황제가 되지도 못했을 놈이.

그래도 결국 황제는 황제. 이 나라 최고의 권력자이니 거슬러서 좋을 일은 없겠지만….

슬쩍 엔프리제를 보았다. 여자들의 입방아를 듣지 못했을 리도 없는데 엔프리제는 의아하다는 듯 나를 보고 있다. 아마 왜 멈춰 섰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거겠지.

이런 취급이 너무 익숙해서.

으으, 열 받아. 으으, 터뜨려? 말아?

“왜 그러십니까, 샤페릴?”

“…아니에요.”

일단 어떻게 할 건지 생각을 좀 해 보자. 여기서 무작정 터뜨리기엔 앞으로의 생활도 걱정해야 하고. 나야 상관없지만 엔프리제가 걱정이다.

대체 얼마나 엔프리제를 우습게 보면 저런 소리를 대놓고 하는 건지.

“엔프리제.”

“네.”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이번에는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를 지켜 주고 싶어서.

“꼭 좋은 방법을 떠올려 볼게요.”

“…네?”

엔프리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거면 됐다. 굳이 알 필요도 없고.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 * *

“여기가 앞으로 샤페릴이 쓰게 될 방입니다.”

“오….”

너무 화려한데.

뭐야, 저거 다 금이야? 금삐까가 왜 이렇게 많아. 게다가 가구도 예전 방에 있던 것과는 달리 죄다 문양도 복잡하고 금장 장식 같은 것도 많이 박혀 있다. 눈이 어지러운데.

“마음에 드십니까…?”

으음.

엔프리제를 돌아보았다. 그는 긴장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여기, 엔프리제가 꾸민 거예요?”

“아니요. 시녀들이 꾸몄습니다. 최대한 품질 좋은 제품들로 꾸미라고 명했습니다만, 저는 이런 걸 잘 몰라서….”

그럼 그렇지.

아마 예전에 있던 저택의 내 방이 엔프리제의 취향에는 더 가까울 것 같다. 그리고 내 취향도 마찬가지.

“너무 화려해서 눈이 아파요.”

“그렇습니까?”

“예전 방에 있던 가구가 좋아요.”

“옮겨 오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침대다. 귀족들의 침대가 드럽게 넓다는 걸 몰랐던 바는 아니지만, 저렇게 넓어서야 안정이 되질 않는다. 침구가 고급으로 바뀐 것만으로도 잠을 못 이룬 나인데!

아아,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

“엔프리제 방은 어디에요?”

“제 방은 바로 옆입니다.”

그건 다행이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달려갈 수 있겠네. 소리를 질러도 바로 들릴 테고.

“여기서 큰 소리로 부르면, 엔프리제 방에서도 들려요?”

“들릴 겁니다. 해 보시겠습니까?”

“나중에요.”

방을 둘러보다가 이동 중 잠들어 몰래 이동장에 넣어 둔 플리를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자고 있다.

원래 다른 족제비들도 이렇게 오래 자는 걸까? 야생에서는 대체 어떻게 살아남는 거야, 얘네.

“플리가 방을 보면 깜짝 놀라겠네요.”

“의외로 별 감흥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 하지만 보물 창고가 사라져서 화낼지도 모르겠군요.”

보물 창고…? 아, 그 침대 밑이랑 옷장 뒤. 거기에 마음에 드는 물건이나 내 옷 같은 걸 질질 끌고 가 숨기곤 했었다. 가끔은 맛있었던 음식을 일부 숨겨 놨다가 청소하는 템버에게 들켜서 혼나기도 했지.

물론 플리는 주눅 들지 않았다. 대신 삐-! 를 외치며 템버와 싸웠지.

“템버는요?”

“저택의 정리가 끝나면 바로 이쪽으로 올 겁니다. 여기서도 샤페릴의 시중을 들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건 다행이다.

템버라도 있어야 마음이 좀 안정될 것 같고. 나중에 템버랑 상의해 볼까? 사용인들을 어떻게 엿 먹…, 아니, 길들…, 아니, 음.

조질지를?

어째 단어가 다 이상한데.

“샤페릴?”

“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또 얼굴이 무서웠나요?”

“네.”

크흠, 조심해야지. 앞으로는 표정 관리도 잘 해야 할 테니까.

걱정되는 앞날에 낮은 한숨을 내쉬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은 제가 꼭 지켜 낼 테니.”

그렇게 말하며 엔프리제가 나를 살며시 안아 주었다. 그 넓은 등을 마주 안으며 다짐했다.

나도 이 남자를 꼭 지켜 주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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