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77)
기대했던 감촉은 찾아오질 않았다.
그렇지. 이게 정석이긴 하지. 하지만 나한텐 현실이잖아. 이럴 때쯤 예상대로 입술에 뽀뽀해 주면 어디 덧…?!
“힉.”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시며 이상한 소리를 내 버렸다.
그냥 어깨에 얼굴을 묻는 건 줄 알았더니 어깨선에다가 살며시 입을 맞춘다. 그냥 그것만인 줄 알았더니 또 안 하던 짓을 한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듯이 말캉한 살덩이가 움직이더니, 날카로운 통증이 뒤따른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이를 세우는데도 입을 막지 않으면 소리가 나올 것 같아 두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아프다기보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마치 내 생명줄을 모조리 그 하얀 치아 앞에 갖다 바쳐 놓고 씹어 먹어 주길 기다리는 느낌이랄까.
불쾌한 듯, 간지러운 듯,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는 듯 묘한 감각.
“…하.”
한참이나 입안에 든 내 살을 잘근잘근 씹어 대던 엔프리제가 쪽 하고 빨아 올리더니 입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살짝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들여다본다.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
다만 눈물로 젖어 있는 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색기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동자였다.
“샤페릴이 너무 사랑스럽다고 느낄 때마다 걱정됩니다.”
“뭐, 뭐가요…?”
“당신을 너무 좋아해서 망가뜨리게 될까 봐서요. 지금도….”
엔프리제의 손가락이 제 입술로 괴롭히던 곳을 슥 문지른다. 까슬까슬한 손가락 탓에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당신에게 내가 만든 흔적이 있다는 게 이토록이나 기쁩니다.”
어음, 그, 그래.
기뻐해 주니 나도 좋네…. 기분은 좀 이상했지만.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당신을 보여 주고 싶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저만이 아는 곳에 가둬 두고, 저만 바라보게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하얀 살결 빼곡히 제 흔적으로 가득 채우고 싶습니다.”
…….
괘, 괜히 피폐 뽕빨물 남주가 아니었다!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남자였어? 지금까지는 하도 조심스럽고 귀엽게 굴길래 원래는 그런 성격인 줄 알았더니!
하긴, 순딩순딩하기만 하면 어떻게 그런 짓들을 했겠어?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당신을 그리 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엔프리제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보였다.
솔직히 모르겠다.
소설을 읽을 때도 이해하지 못했었고, 엔프리제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게 된 지금도 잘 모르겠다. 누군가를 너무 좋아해서 망가뜨리고 싶어질 정도의 애정이라니. 일반적인 애정조차 제대로 받아 본 적 없는 내게는 미지의 세계였다.
떨어지려는 엔프리제를, 내 쪽에서 끌어안았다.
“난 엔프리제가 한 말은 잘 이해 못 하겠어요.”
“그러시겠죠. 그게 당연한 겁니다.”
“그래도….”
엔프리제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품에 얼굴을 묻었다. 엔프리제는 그런 나를 살며시 안아 주었다.
조심스럽게. 부서지지 않도록.
“제가 아프고 힘들어하면 엔프리제도 같이 아프고 힘들 거라는 건 알아요.”
책 속 엔프리제는 늘 차갑고 냉정했다. 언제나 칼날 같은 날카로움을 몸에 두르고 가시를 세웠다.
그건, 엔프리제가 상처 입었기 때문이겠지.
샤페릴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서, 아직 확실한 게 없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던 건 이해한다. 하지만 엔프리제의 이런 욕망도 분명 뒤섞여서 나왔던 거겠지. 책 속의 엔프리제는 알고 있었다. 이래선 안 된다는 것쯤은.
이러다가 샤페릴이 망가진다는 것쯤은.
하지만 엔프리제는 다른 방법을 몰랐다. 모르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행동은 스스로까지 상처 입혔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이 날 상처 입히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어 엔프리제를 보았다. 그리고 엔프리제와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던 때.
“…….”
“…….”
“……?”
엔프리제의 표정이 묘해졌다.
시선이 내게로 향해 있지 않다. 아니, 그보다 방금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았나? 뭔가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닌 듯한….
“플리.”
엔프리제가 내 어깨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쉬잇-!”
…플리, 너 언제 여기 왔니…?
고개를 살짝 돌리자 엔프리제를 향해 위협을 가하는 플리가 보였다. 분명 침대 밑으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언제 올라온 거지?
까만 콩 같은 눈동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왜 그래, 플리.”
“삐!”
“엔프리제가 괴롭힌 줄 아는 거지, 너.”
“삐-!”
피식 웃고는 녀석의 이마를 살살 간질여 주었다. 그러고는 엔프리제를 놓아 주었다.
“아무래도 엔프리제가 절 괴롭히기는 글렀네요. 엔프리제도 절 지켜 줄 테지만, 이렇게 든든한 경호원이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자, 엔프리제는.
“…그렇군요.”
울 것 같은 얼굴로 옅게 웃어 보였다.
* * *
“심장에 나빠.”
“삐?”
식사가 끝난 후 엔프리제는 볼일이 있다며 잠깐 외출했다. 아마 내가 공작저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거겠지.
오랜만에 플리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된 나는, 녀석과 함께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침대 위에만 올려 주면 이불을 굴 파듯 파고들거나 폴짝폴짝 뛰어다녔는데, 한 번 내가 제대로 얼굴을 밟히며 아파한 뒤로는 내가 있을 땐 뛰지 않는다. 대신 내 손 근처에 와서 쓰다듬으라는 듯 드러눕는다.
플리의 목 아래를 살살 쓰다듬어 주자 녀석이 사르르 눈을 감았다.
“요즘 엔프리제가 너무 색기 넘쳐서 심장이 아파. 어쩌면 좋지, 플리.”
“…….”
“확 덮쳐 버릴까?”
“삐-!”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플리가 펄쩍 뛴다. 덩달아 놀라 일어난 내가 플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삐!”
위협은 하지 않지만 항의하는 듯 내 손가락을 살짝 깨문다. 날카로운 이빨의 감촉에 순간 조금 전을 떠올렸다.
뱀파이어한테 물리기라도 하는 기분이었지.
보통 뱀파이어는 매료, 매혹 같은 스킬을 쓸 수 있어서 상대가 반항하지 못하도록 만든 후 흡혈한다고 하니까. 마치 그런 게 걸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분명 밀어냈으면 엔프리제는 얌전히 물러났을 텐데.
손을 들어 아까 엔프리제가 깨문 곳 위를 더듬었다. 남아 있을 리가 없는 잇자국이 느껴지는 것 같아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몸이 간질간질해진다.
“…플리.”
플리를 향해 손을 내밀자 내 팔을 타고 스르륵 올라와 또 어깨에 앉는다. 혹시 빨개졌나? 상처라고 생각해서 보호해 주는 건가.
“우리 이제 이 저택을 떠난대, 플리.”
“삐?”
“더 큰 저택으로 가게 된대.”
이마를 살살 간질여 주자 플리가 다시 눈을 감는다. 아까 화났던 건 이미 다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게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솔직히 별로 가고 싶진 않아.”
여기서는 내 상식 부재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거기서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그리고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제대로 된 전공 의사가 보게 되면 내가 기억 상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행동에서도 의심할 만한 부분이 많았으니까.
기억 상실이라는 게 원래 사람마다 다른 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거짓말을 하는 입장에서는 이게 언제 들킬지 겁이 난다.
사실 이 저택에서 나가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었다.
리베테 가문의 생존자와 만나게 되면 어쩌지. 예전에 샤페릴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날 보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엔프리제가, 내가 샤페릴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면.
“…….”
툭, 하고 플리를 쓰다듬던 손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그랬나. 그래서 계속 망설였던 건가.
나는, 내가 샤페릴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 세계가 내 현실이라는 것도, 여기서 살다 죽게 될 거라는 것도.
그리고.
엔프리제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가졌다는 것도.
하지만 엔프리제는 아니다. 그는 여전히 내가 샤페릴이 아니라는 걸 모르고 앞으로도 알게 될 일은 없을 거다. 누군가가 내가 샤페릴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더라도 닮은 타인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리베테 저택에서 날 구해서 감금하고 있던 엔프리제는 알고 있다.
이 몸이 틀림없는 샤페릴이라고.
설마 속에 든 알맹이가 다른 이가 되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거다.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을 사랑해 주는 게 샤페릴이라고 믿고.
자신이 사랑하는 게 샤페릴이라고 믿고.
내가 샤페릴이 아니라 수희라는 것도 모르는 채.
“…플리.”
“삐-?”
거짓말이란 참 괴로운 거구나.
내가 엔프리제를 만지고 싶다고, 더 가까워지고 싶다고, 나도 그와 그런 행위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안 된다고 스스로 제어했던 건. 그와 서로 마음이 통했음에도 모든 걸 달라고 할 수 없었던 건.
죄책감 때문이었다.
엔프리제를 속이고 있다는.
“말해야 할까?”
말한다고 믿어는 줄까? 아니, 믿어 주겠지. 엔프리제니까.
하지만 그 후에도 날 사랑해 줄까?
샤페릴은 사교계의 꽃이었고, 성녀라고까지 불린 인기인이었다. 예쁘고 사랑스럽고 기품 있는 사람이었다.
수희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친구들은 그런 내게 애정을 주었지만, 그건 분명 동정에 가까운 것이었겠지. 나 같이 둔하고 서툴고 어리석은 사람에게 애정을 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수희는 샤페릴을 절대 대신할 수 없다. 엔프리제에게 사랑받을 수가 없다.
그럼 나는… 평생 샤페릴을 사랑하는 엔프리제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그와 몸을 섞게 된다면 그건 분명.
내가 아니라 샤페릴과.
“어떻게 생각해, 플리?”
“삐.”
언젠가는 나를 완전한 샤페릴로 생각할 수 있게 될까?
수희로 살아온 25년을 잊고 이 세계의 샤페릴이 되어, 엔프리제가 사랑하는 것이 나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될까? 아니, 하지만 분명.
그때가 되면.
그가 처음 사랑하게 된 샤페릴은 내가 아니라는 생각에 괴로워하겠지.
“미안해, 어려운 걸 물어서.”
살살 플리의 등을 쓸어 주며 생각했다.
빙의물 여주들은 정말 대단한 거였어. 물론 대부분 생존을 위해 애쓰는 사이 남주랑 엮였으니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던 거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