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76)
“그렇습니까.”
화요일.
자하에게 최근의 몸 상태를 전달하고 청진을 마친 후 잡담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저택에서 나가 대공저로 옮기게 되었다는 말을 하자 자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만 있는 게 그리 좋은 건 아니죠.”
“왜요?”
“음….”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자하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툭 입을 열었다.
“전 평생 여기서 살 생각도 하고 있었어요.”
“평생요…?”
“여긴 모든 게 다 있잖아요. 엔프리제도 있고, 템버도 있고, 맛있는 거, 갖고 싶은 거 다 있는데 굳이 나갈 이유가 어딨겠어요?”
나만의 좁은 천국. 그래서 좋았는데.
뭐, 그래도 상관없다 싶기도 하다. 어차피 나가도 템버와 엔프리제가 있을 테니까.
“아, 자하도 있구요.”
혹여 기분 상할까 봐 황급히 덧붙이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이내 배시시 눈웃음을 지었다.
“저도 넣어 주시는 겁니까?”
“당연하잖아요. 자하 덕분에 그림도 배웠는데.”
“…감사합니다. 그림은 전혀 늘지 않으시지만.”
…….
아, 거길 그렇게 찌르기 있나요? 명치가 아프다. 나도 모르게 명치 끝을 손으로 꾹 누르자 자하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 아프십니까?”
“방금 자하가 명치를 쳤어요.”
“네?”
“그런 게 있어요.”
내게는 아무래도 미술적 재능이 0인가 보다. 원래 내 몸일 때도 그랬는데 안타깝게도 샤페릴의 몸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니면 안에 내용물이 내가 돼서 그런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네.
글자도 못 읽어, 할 줄 아는 것도 하나도 없어. 엑스트라에 빙의한 것도 아니고 자그마치 여주한테 빙의했는데 왜 있는 거라곤 스트레스 심하게 받으면 마력 과잉 생산하는 체질밖에 없어?
이 죽일 놈의 빙의.
뭐라도 하나 붙여 줄 것이지. 이제 와서 이런 걸 투덜거리는 것도 웃긴 일이긴 하지만.
“그럼, 이제 제가 올 필요는 없겠군요.”
“네?”
“마탑과 교회가 나선다면, 저보다도 더 뛰어난 약사들이 샤페릴의 상태를 살피면서 연구를 진행할 겁니다. 제가 굳이 올 이유가 없죠.”
“무슨 소리예요.”
어이가 없네.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향해 말했다.
“자하가 사라지면 전 어떻게 하라고요?”
“그러니까 마탑이나 교회에서….”
“자하의 역할이 뭐예요?!”
“약사…죠?”
“약사 겸 그림 선생님 겸 제 상담자잖아요!”
매주 화요일, 토요일마다 심리 상담 받는 기분인데! 내게서 왜 오아시스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가!
“제가… 그렇게 많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럼요. 자하랑 이야기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요. 엘마레… 님하고 이야기하고 있을 땐 얼마나 불편했는지 알아요?”
“일단은 제가 모시는 주군이십니다만….”
“아, 그랬지. 크흠. 에이, 뭐 어때요? 원래 안 듣는 데서는 나라님도 욕하는 법인데.”
“나라님…?”
아, 여기는 그런 말 없지. 뭐라고 고쳐야 하지? 황제라고 하면 혼날 것 같고.
“음…, 그러니까…, 주인?”
“가끔 샤페릴은 신기한 단어를 사용하더군요. 어디서 보신 겁니까?”
한국에서요.
그렇게 말하면 당연히 모를 테니, 에, 음….
“말이 헛나왔어요.”
“그렇습니까.”
자하는 이래서 좋다.
누가 봐도 이상한 변명인데, 내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으면 굳이 파고들지 않는다. 대신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것들은 잘 들어 준다. 얼핏 보기엔 대충대충 듣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일전에 물어보신 책 말인데….
-책?
-지지난번 방문 때 샤페릴의 체질에 관한 자료가 있는지 물어보지 않으셨습니까.
-아! 네, 물어봤었죠.
-그 후로 황립 도서관이나 황실 서고, 알고 있는 귀족 가문, 아카데미에도 물어봤는데 아쉽게도 자료가 없다고 하더군요.
뭐랄까.
지나가면서 ‘어, 저거 예쁘네.’ 했더니 일 년쯤 뒤에 ‘너 이거 예쁘댔잖아.’라고 하면서 사다 주는 느낌?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있어서 처음에는 좀 서운했었지만, 지금은 대충 듣는 것 같아 보여도 제대로 듣고 있다는 걸 알기에 아무렇지도 않다.
“이제부터 스트레스도 엄청 늘어날 텐데 자하가 없으면 곤란해요.”
“여기서 나가시면 더 다양한 것들을 접하실 수 있을 텐데요. 저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조차 아까워지실지도 모릅니다.”
“다양한 걸 접한다는 건 다양한 스트레스가 생긴다는 뜻이잖아요. 예를 들어서 다른 귀족들과의 만남 같은 거.”
“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황실의 거스러미와 사교계의 꽃이 이렇게 눈누난나 하는 것도 이야깃거리가 될진대, 내 언행만 봐도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걸 분명 알아챌 터.
자고로 사교계란 이런 남의 약점이나 가십거리에 달려들어 물고 뜯고 씹고 즐기기 바쁜 인종들이다. 날 불러다 조리 돌림 할지도 몰라.
으으, 갑자기 머리가….
“샤페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요.”
“벌써부터 걱정하느라 스트레스를 받는 건 좋지 않습니다. 당신께 안 좋은 일이 생기도록 그냥 두지 않으실 겁니다. 왕제 전하도, 대공 전하도.”
그거야 나도 알지.
아는데 엔프리제가 나를 지켜 주고 안 지켜 주고와는 별개다. 그냥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일 뿐.
게다가 엔프리제라고 스트레스를 안 받겠어?
“게다가 생활도 그래요. 여기서야 우리밖에 없으니까 이렇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거지만, 대공저에서는 그럴 수가 없잖아요? 사용인들도 대부분 황실에서 보낸 사람들이라면서요.”
“…네.”
“그럼 제가 실수로 트림이라도 하면 소문이 쫙 돌겠죠? 사교계의 꽃이라던 사람이 경망스럽게 저게 뭐야, 하면서!”
“트림이라니….”
자하의 얼굴이 곤혹스럽다는 듯 일그러진다.
아니, 하지만 이건 중요한 문제라고. 나도 말이야 여주가 그런 거 한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여주도 그런 거 한다고!
응가도 하고 쉬야도 하고 다 한다고!
설마 내가 변비 걸려서 응가를 못 한다며 비웃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실수로 방귀를 뀌었다고…!
으아!
“생각만 해도 진이 빠지십니까?”
“네.”
“그렇게 말하시는 것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자하가 피식 웃고는 찻잔을 들어 올린다. 엔프리제와 다르게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굳은살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엔프리제가 손이 거친 걸 꽤 신경 썼었지. 뭔가 없으려나.
“네?”
“손이 거칠어질 때 사용할 수 있는 연고 같은 게 있나요?”
왜, 거 있잖아. 핸드크림 같은 거.
어차피 로판이니까 편의성 있는 건 대충 다 있지 않을까? 이름만 다를 뿐이지.
“손이요?”
“네.”
기대에 찬 눈으로 자하를 바라보자, 그가 난감하다는 듯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알아보겠습니다.”
“고마워요.”
최근엔 엔프리제랑 붙어서 책을 읽느라 그림 그린 게 없다. 그래서 오늘의 자하는 여기까지지만.
“아, 자하. 간식 먹고 갈래요?”
“간식이요?”
“오늘은 복숭아 타르트래요.”
의외로 자하는 타르트 종류를 좋아한다. 단 건 그다지 먹지 않는데, 이건 잘 먹더라고.
“…그럼, 먹고 가도록 할까요.”
거봐.
나는 씩 웃어 보였고, 자하는.
“크흠.”
헛기침으로 쑥스러움을 얼버무렸다.
* * *
“플리-!”
“삐!”
이동장에서 나오는 플리에게 두 팔을 내밀자, 플리는!
감동의 재회를!
하기는커녕….
“플리?!”
“삐!”
그리웠다는 듯 침대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
아, 팔이 추워. 아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눈으로 엔프리제를 보자 그가 피식 웃더니 내게 다가와 꽉 안아 주었다.
“엔프리제.”
“네.”
“플리가 절 버렸어요.”
“아마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럴 겁니다. 이동장 안에서 계속 날뛰었거든요.”
성질도 더러운 놈. 누굴 닮아서 저러는 거지. 우리 엔프리제는 이렇게 순한데.
“이름을 플리가 아니라 개똥이라고 지어 줄 걸 그랬어.”
주인도 못 알아보는 나쁜 놈.
“네? 왜 개똥이…입니까?”
“크흠. 아무것도 아니에요.”
요즘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가 자꾸 말실수가 나오네. 조심해야지.
“그런데 전이랑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던데, 뭔가 기능이 더해진 거예요?”
물론 순식간에 슉 날아가서 제대로 못 봤지만. 일단 크기나 날아가는 속도가 예전이랑 크게 달라진 것 같진 않다.
엔프리제를 꽉 안은 채 플리가 있는 쪽을 돌아보자, 엔프리제가 나를 꽉 끌어안아 소파로 옮겼다.
“네.”
“어떤 기능인데요…?”
“…일단 몸은 확실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상관은 없겠지만…. 왜 얼버무리는 거지.
신경 쓰이게.
“엔프리제.”
“네.”
“뭘 숨기는 거예요?”
흠칫, 하고 품 안의 단단한 몸이 굳는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나를 더 꽉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숨기는 건 아닙니다.”
“제대로 이야기를 안 해 주잖아요.”
“들으시면… 왜 그런 기능을 추가했냐고 하실까 봐서요.”
“그게 숨기는 거죠!”
몸은 확실히 지킬 수 있는데 웃을 만한 거라니, 뭐지?
설마 눈에서 빔이라도 나오나? 아니면 입에서 불을 뿜는다거나. 하얀 족제비니까 눈을 내리게 한다거나….
설마!
“발톱 난무! 이런 거 아니죠?”
“난무…?”
“발톱으로 이렇게 샤샤샤샥.”
허공에 하려고 했지만, 엔프리제가 놓아 주질 않아서 본의 아니게 그의 가슴팍 위를 할퀴듯 움직였다. 물론 힘은 하나도 주지 않았지만….
거참 가슴팍이 딴딴하네.
“…….”
으음.
신경 쓰기 시작했더니 가슴팍밖에 안 보인다. 하얀 셔츠 아래에 있을 울끈이 불끈이….
하지만 엔프리제는 그렇게 부한 편이 아니니까 근육도 그렇게 심하진 않을 거다. 예전에 봤을 때 어땠더라.
보면 안 된다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아직 머릿속에 선명하게….
“샤페릴….”
엔프리제의 딴딴한 가슴팍을 떠올리려고 집중하고 있는데,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살짝 고개를 들자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이 바로 코앞까지 와 있었다.
“어…?”
“제발 그렇게… 사랑스러운 행동 좀 하지 않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천천히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에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키스 준비하는 거 아닌데. 입술 안 내밀었어. 안 내밀었다고. 그냥 원래 샤페릴 입술이 좀 오동통해서 그래!
그리고 잠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