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74)
“젠장….”
바르카는 거친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손에 든 술잔 안의 와인을 들이켜다가 무어가 그리 거슬렸는지 문득 벽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순은의 술잔은 그대로 벽에 부딪쳐 찌그러졌다.
“젠장!”
토하듯 욕설을 내뱉어 보았지만, 가슴 속의 울렁거림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얼마나 더 공을 들여야 샤페릴을 데려올 수 있게 되는 걸까. 대체 얼마나 더 그 더러운 놈의 손아귀에 샤페릴을 두어야 하는 걸까.
“샤페릴….”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바르카가 아직 십 대였을 때, 이제 막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을 때였다.
당시에는 성인이 되면 곧바로 결혼하기로 내정된 여성이 있었다. 공작가의 막내 공녀로 정치적으로 매우 유력한 가문의 여식이었다. 게다가 꼬장꼬장한 공작의 사랑을 한 몸에 듬뿍 받는 여성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곱게 자랐기 때문일까. 아내감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여성이었다. 어지간한 영애들은 얼굴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예뻤고, 행동은 우아하고 단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르카의 말에는 언제나 순응했다.
최고의 배우자감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은 차기 황제가 될 몸이었으니까.
성인이 될 때까지 형님인 엔프리제는 황태자위에 임명되지 못했다. 그리고 더는 미루기 힘들어진 스물, 성인이 되기가 무섭게 ‘스스로’ 황태자의 위를 거부하고 대공의 자리에 머물렀다. 그리고 곧바로 바르카의 황태자 임명식이 이루어졌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을 터였다.
아버지도, 형님도.
그러니 형님에게는 약혼자조차 붙여 주지 않았고, 자신에게 최고의 신붓감을 붙여 주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옆에 있는 여자가 트로피처럼 생각되어 나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앞에 샤페릴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황태자 전하. 리베테 백작가의 샤페릴이라고 합니다.
그녀에게서는, 주변에 많았던 다른 영애들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무언가가 느껴졌다. 환한 빛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그녀에게서 후광이라도 나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사이, 그녀는 제게 부드러운 눈웃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인사를 받아 주지 않는 거라고 느낀 모양이었다.
바르카는, 제 곁에 있던 약혼녀도 잊고 샤페릴을 쫓아갔다.
-레이디 리베테!
느긋하게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던 그녀가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무언가를 느꼈다.
말하자면 그것은 세상이 휙 하고 뒤집힌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은 연극 무대 위의 세계이고, 그녀를 만난 이후부터 비로소 현실의 세계가 펼쳐진 느낌이었다. 오색 빛깔로 빛나고 있던 자신의 주변이 오로지 한 가지 색으로 물드는 느낌이었다.
-황태자 전하?
-그… 조금 전에는 실례했소.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던 터라.
차마 그대를 보고 넋을 잃었다고 할 수 없어서 그리 둘러대었다. 샤페릴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환하게 눈웃음 지었다.
-그러실 수도 있지요, 괜찮습니다. 이리 따라오시기까지 하며 사과해 주시다니.
주변의 사람들은 사색이 되었다.
바르카는, 따지자면 자신에 대한 무례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감히 한낱 백작가의 영애가 황태자에게 마치 자신이 더 우위에 있는 듯한 말투를 사용하다니. 다른 이가 이런 식으로, ‘용서해 주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면 분명 소동이 일어났으리라.
하지만 바르카는.
-무례를 용서해 주어 감사하오. 레이디 리베테, 그대가 괜찮다면 다음 춤은 나와 함께 해 주겠소?
그녀에게 춤을 신청했다.
주변의 모두가 눈치챘을 것이다. 바르카가 샤페릴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는.
그리고 바르카의 약혼녀 역시.
-어째서 제게는 그런 눈길을 주지 않으십니까.
바르카의 말을 잘 듣고 있었다면 그녀를 정비로 세웠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쯤 그녀는 황후가 되어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상을 바랐다.
어리석은 여자였다. 황제에게 있어서 여자란 아이를 낳는 도구, 그리고 정치적 연을 맺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마음을 바란다는 것 따위는 언어도단이었다.
공작가의 공녀가 어찌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른단 말인가.
“…후.”
이제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여자 대신, 샤페릴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그 후로 몇 번이나 더 사람을 보냈다. 다른 세력이 알아챌까 싶어서 암살자 길드나 황궁 기사단에서 가장 솜씨가 좋은 이들만 골라서 의뢰했다. 그런데 돌아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엔프리제는 자신에게 병이 들었다며 입궁 명령도 무시하고 그 저택에 박혀 있었다.
“샤페릴….”
종일 그 더러운 놈과 함께 있는 샤페릴은 얼마나 괴로울까. 그 더러운 놈이 샤페릴을 얼마나 괴롭힐까. 문득 그의 머릿속에 고통으로 흐트러진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희게 빛나는 아름다운 나신. 그 하얀 빛을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흑발의 남자. 괴로워 몸부림치는 샤페릴.
그녀를 어서 구해 내지 않으면.
바르카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을 상상하는 제 아래가, 절대로 있어선 안 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을. 그리고 그때였다.
“폐하. 잠시 괜찮으십니까?”
누군가가 찾아온 것은.
* * *
“여기가….”
엔프리제가 미리 서면에 적어 준 복잡한 방법을 통해 들어온 저택은 생각보다 소담했다. 3층짜리 석재 건물. 누가 보면 어느 부자나 귀족의 별장 정도로 생각하겠지.
엘마레는 찬찬히 저택의 전경을 살피다가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릴 것도 없이 눈에 익은 시녀가 나와 그를 맞이해 주었다.
“왕제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레이디 템버.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별말씀을. 대공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중년에서 노년으로 향하는 시녀는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제 주인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혈연임에도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하긴, 이런 사람도 형님의 주위에는 필요할 것이다. 형님은 한 번 사람을 믿기 시작하면 그 이후로는 의심이라는 걸 모르시는 분이니.
“감사합니다.”
시녀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이 저택을 와 본 건 처음이었지만, 안의 내장은 생각보다도 더 포근한 느낌이었다. 예전부터 엔프리제가 혼자 생각할 일이 있거나 무언가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여기서 지내곤 한다는 건 들어 알고 있었지만.
무언가…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마치 서민의 가정 같은 느낌이었다.
형님이 정말로 원하는 건 이런 온기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며 엘마레는 응접실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거기엔.
“엘마레.”
자신을 반기는 형님과.
“…….”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백발의 여성이 있었다.
기억을 잃은 데다 성격도 바뀌었다더니, 확실히 그랬다. 원래 몸에서 흐르던 기품이나 우아한 분위기는 어디 가 버린 걸까. 여전히 아름답긴 했지만, 지나치게 꾸미지 않은 데다 낯선 분위기를 풍겼다.
“레이디 리베테,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니, 처음 뵙는다고 해야 할까요?”
“…처음 뵙겠습니다, 왕제 전하. 샤페릴 드 리베테라고 합니다.”
이름은 기억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형님이 가르쳐 준 것일까.
엘마레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엷게 웃었다.
“여성에게는 흥미가 없어 보이던 형님을 사랑꾼으로 만들어 버리시다니…. 존경하고 있습니다.”
“엘마레.”
곤란하다는 듯 엔프리제가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스며 있었다.
정말로 무골호인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예전의 형님이 보면 분명 한심하다고 말할 테지. 하지만 엘마레는 그런 형님의 모습이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게 형님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엔…, 아니, 대공 전하의 동생이시라고 들었습니다.”
“편하게 하시던 대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레이디 리베테. 레이디의 말씀대로 저와 형님은 혈연이니까요. 제 앞에서까지 그렇게 격식을 차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샤페릴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왕제 전하.”
“왕제 전하도 괜찮습니다. 편하게 엘마레라고 불러 주셔도. 제게는 형수님이 되실 분이 아니십니까.”
“엘마레!”
엔프리제가 드물게도 큰 소리를 내며 허둥거렸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샤페릴과 자신을 번갈아 보는 것이 꽤 새로웠다.
“아직 어떻게 될지는….”
엔프리제가 그렇게 입을 떼자마자 샤페릴의 눈빛이 변했다.
“잠깐만요, 엔프리제.”
살짝 옷 소매를 끌어 제게 당긴 샤페릴 곁으로 간 엔프리제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체를 숙였다. 그러자 그의 귓가에 샤페릴이 작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해도 되요?”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자기들 딴엔 속닥거리고 있는 셈인 걸까. 하지만 두 사람만의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런 건지 엘마레가 있다는 걸 잊었는지 거의 다 들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엘마레는 그런 두 사람을 흥미롭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샤페릴은, 이 방에 엘마레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조금 전까지 굉장히 경계하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하를 금방 받아들였다고 이야기를 들어 엘마레도 반기지 않을까 싶었는데.
분명 경계심이 없고 친화도가 높은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거리를 두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굉장히 의심이 많거나….
감이 좋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럼 저 말고 다른 사람이랑도 결혼할 생각이에요?”
“그게 아니라… 샤페릴. 제 마음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요?”
“그건 그러니까….”
제 반도 되지 않을 것 같은 가냘픈 여성 앞에서 쩔쩔매는 형님의 모습과, 조금 전까지와 달리 생동감 넘치는 샤페릴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며 엘마레는 침묵했다.
이 짧은 익살극이 끝나기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