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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73화 (73/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73)

호숫가에 돌아와서는, 잠시 피크닉 가방을 부엌에 가져다 놓으러 갔을 때나 화장실 갈 때 떨어진 것 외에는 거의 붙어 있었다. 다만 아까의 추태가 여전히 머리에 박혀 있는 나로서는 그 이상은 하기 어려웠다.

이런 기념일이 기횐데!

“샤페릴.”

“네?”

“책이 구겨지고 있습니다. 손이 아프신 겁니까? 대신 들까요?”

이 남자야. 책을 구길 정도로 손에 힘이 들어갔으니까 그런 거지! 힘들면 이렇게 되겠어?

“괜찮아요. 조금 자세가 불편해서 그런가 봐요.”

최근에는, 소파 베드에 엔프리제가 가로로 앉으면 그 위에 내가 안기듯 앉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 내가 소파에서 떨어질 뻔한 후로는 계속.

그래서 자세가 그렇게 불편하진 않았지만, 괜히 핑계 댈 게 없어서 그리 말했을 뿐이었다.

“그렇습니까…. 등받이가 없어서 제대로 받쳐 드리지 못하는 모양이군요.”

생각해 보니 등받이도 없는데 내 무게를 이만큼 버티는 엔프리제도 대단하다. 나보다 이 남자가 더 불편하겠구나.

“힘들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운동도 되고.”

…응?

“오히려 다른 생각도 좀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응?

“다른 생각요?”

“네.”

“어떤 생각요?”

“그냥… 어떻게 해야 당신이 편하게 있으실 수 있을까. 지금 움직이면 방해되겠지. 그런 것들요.”

그 생각을 안 하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되기에…?

물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안다. 그래서 기분이 조금 복잡하다. 그래 줬으면 하기도 하고 그러지 말아 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샤페릴.”

“네.”

“표정이 무섭습니다.”

…….

혹시 지금 나,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그럴 때 무섭다고 하는 건가?

“크흠. 이렇게 앉지 말고 엔프리제가 등받이에 기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앉으면 당신이 불편하시니까요.”

“음….”

나도 불편하지 않고 엔프리제도 편하게 앉을 방법….

책을 덮어 탁자 위에 놓았다. 동시에 등받이가 있는 무언가가 내 눈에 비쳤다. 저기라면 나도 편하고 엔프리제도 편하지 않을까.

그런데…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나.

엔프리제는 좋다. 계속 붙어 있고 싶고 스킨십도 하고 싶다. 하지만 무언지 알 수 없는 것이 계속 손톱 아래 거스러미처럼 남아 걸린다. 그게 마지막 선을 넘어서지 못하게 한다.

“으음… 엔프리제.”

“네.”

“오해하지 말고 들어 줄래요?”

“오해요?”

“제가 다른 의도가 있거나, 그, 좋지 않은 의도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단순히, 정말로 순수하게 엔프리제도 저도 편하게 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는데 제가 음흉한 의도로 말하는 거라고 오해할까 봐 그래요.”

슬쩍 시선을 위로 향하자 엔프리제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나를 본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슬쩍 옆을 보며 중얼거렸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아니니까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 저기라면 엔프리제도 저도 편하지 않을까요.”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잠시 후, 등에 닿은 엔프리제의 몸이 딱딱하게 굳은 게 느껴졌다.

“…….”

“진짜로 아무런 의도도 없어요! 그냥 편할 것 같아서 말하는 거예요!”

생각해 보면 이렇게 계속 부정할수록 더 수상쩍어 보이지 않나? 엄청 수상쩍지. 하지만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면 오해할 것 같은걸.

“…저기는, 좀.”

“아, 역시 그렇죠?”

크흠. 역시 침대는 좀 그랬어.

“저는 이대로도 괜찮습니다만…. 많이 불편하십니까?”

“엔프리제가 힘들 것 같아서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뭐… 본인이 괜찮다니까.

다시 탁자에서 책을 집어 들었다. 펴 들려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생일날인데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건가?

뭐랄까. 내 생일은 언제나 대충 지나갔기에 그렇다고 치지만 동생 생일은 늘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했었다. 어떻게 되먹은 건지 그렇게 성질 더러운 동생인데 친구는 어지간히도 많아서 이삼십 인분의 음식을 하려면 전날 저녁부터 커다란 들통까지 다 꺼내 들어야만 했다.

아무리 엔프리제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도 대공님인데, 황제의 핏줄인데 이렇게 그냥 지나가도 되는 건가.

“엔프리제.”

“네?”

“뭔가 더 하고 싶은 거 없어요?”

“하고 싶은 거…요?”

“생일이잖아요. 저랑만 지내는 게 좀 아쉬우면 밖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와도 좋고….”

나랑은 매일 붙어 있는데 생일날 정도야. 막냇동생은 좋아하는 것 같던데, 동생이랑 시간을 보내도 좋을 것 같고.

그런 생각에서 꺼낸 말이었지만.

“저랑 같이 있는 건 질리십니까?”

그게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요즘 이상한 쪽으로 의심이 늘었다. 예전에는 내가 도망가는 게 제일 걱정인 것 같더니, 요즘은 자기랑 있는 시간이 지겨울까 봐 걱정인 모양이다.

하긴 나도 그런가.

“저는 평생 엔프리제 얼굴만 봐도 안 질려요. 놀리면 빨개지지, 가끔 멋있는 얼굴도 하지, 귀엽지. 왜 질려요?”

“그럼 절 내보내려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런 뜻이 아니라 특별한 날이니까 뭔가 특별한 걸 하면 좋겠다는 거였죠. 저랑 다른 걸 해도 좋아요.”

그러자 허리를 감싸 안는 힘이 더 강해졌다. 아니, 나랑 같이 하자고 했는데 왜!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랑 함께 있는 시간이 다 특별하다, 뭐 그런 말 하려는 거 아니죠?”

아, 정곡인가? 말이 없다.

잠시 망설이던 엔프리제가 조심스럽게 내 목덜미에 이마를 묻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으니까?

보통 남주들이 그런 말 잘 하니까. 그리고 엔프리제 성격상 그럴 것 같기도 했고.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어서 잠시 생각하다가 좋은 말을 떠올렸다.

“저도 같으니까요?”

거짓말은 아니다. 정말로 좋은걸.

세상에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나 같이 평범한 사람뿐만 아니라 소설 속 여주들도 마찬가지. 누군가에게는 미움을 받고 방해도 받는다.

내가 엔프리제에게 사랑받는 게 고까운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엔프리제가 내게 사랑받는 게 불만인 사람도 있겠지. 그런 사람들 사이에 굳이 끼어들어 가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집순이가 된 이유도 그렇다.

안 그래도 집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닌데 밖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다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알지도 못하는 남의 집안 사정에 멋대로 입을 떼고, 나이가 스물 중반인데 남자 친구 한 번 없었다는 게 말이 되냐면서 필요 없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남자를 소개시켜 주려고 하고. 필요 없다고 하면 눈이 머리 꼭대기에 붙어 있어서 그렇다며 나 같은 여자에게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라고 했다. 남자들 결혼하면 다 거기서 거기라고.

대체 나 같은 여자는 뭐고, 어울리는 남자는 또 뭔지.

그렇다고 자기들은 결혼해서 행복했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만날 하는 소리가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둥 마누라가 어떻다는 둥 남편이 어떻다는 둥. 자식새끼가 말을 안 들어서 죽겠다며 가족 욕을 서슴없이 한다.

그런 주제에 또 무슨 일이 있으면 가족이 최고며 자식새끼 키우는 재미가 최고라고 한다.

그뿐일까.

결혼하려면 살을 빼야 한다는 둥, 옷을 그렇게 입어서 되겠냐는 둥, 머리를 좀 잘라 봐라, 길러 봐라. 남의 용모에는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걸까.

예쁜 걸 보는 건 나도 좋아한다. 그래서 지금의 용모를 보고 너무 좋아했던 거고. 하지만 당시의 나는 스스로를 꾸밀 만한 여유도 없었을뿐더러 별로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꾸미고 싶을 때 꾸미면 그만 아닌가? 왜 그렇게 평상시에도 꾸미라고 난리를 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꾸미고 다녀야 남자가 생긴다는 말도.

외모가 타인의 호감을 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맞지만, 그런 거라면 나는 엔프리제를 보자마자 천년의 사랑에 빠졌어야 하는 게 아닐까. 엔프리제 역시 샤페릴의 외모만 보고 빠진 게 아니라고 했다. 물론 외모가 도움이 되긴 했겠지만.

그리고 이번에 엔프리제의 생일을 준비하면서도 깨달았다. 내가 정말로 예쁘게 보이고 싶어지면 스스로 꾸미게 되는구나, 라고.

하지만 밖의 사람들은 나를 보며 이렇게 말하겠지.

귀족 영애답지 않다. 체통이 없다. 기품이 없다. 평소에도 단정하게, 귀족 영애답게 꾸미고 다녀야지. 엔프리제 같은 사람이랑 어울리면 안 된다.

그런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다. 굳이 받아야 할 필요도 없고. 엔프리제와 있는 것만 해도 24시간이 부족한데.

“생각해 보니까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네?”

“밖에 나가서 좋을 일이 뭐가 있다고. 엔프리제도 책 줄까요?”

“괜찮습니다. 샤페릴이 읽는 걸 같이 읽는 것만으로도 재밌습니다. 게다가.”

“저랑 같은 걸 읽어서 더 좋다고요?”

“…네.”

뭐, 그렇다면야.

엔프리제는 입에 발린 말을 하지 않는다. 나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책을 펴 들고 글자를 읽어 내리기 시작한다. 슬슬 왕자님이 용을 물리치러 갈 때가 되었다. 어린애들을 위한 동화책인데 생각보다 흥미진진하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문장도 읽기 쉽고 삽화까지 들어가 있는 데다 나름대로 이야기의 굴곡이 있어서 흥미진진하다.

“그러고 보니 엔프리제.”

“네.”

“엔프리제도 제가 용한테 잡혀가면 이렇게 구해 주러 올 거예요?”

이게 무슨 질문이냐고?

이런 걸 바로 답정너라고 하는 거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너는 그대로 대답만 해라!

“저라면….”

너라면!

“당신이 잡혀가도록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어, 음. 그래.

하긴 공주야 왕자와 만나기 전에 홀라당 잡혀갔지만, 나는 엔프리제랑 매일 붙어 있구나. 게다가 분명 나는 이런 상황이 되면 또 열을 내겠지. 마력을 마구 생산하면서.

엔프리제로서는 절대 피하고 싶을 상황일 터.

“으음.”

“죄송합니다. 원하시는 대답이 아닌 줄 알지만…. 그래도 저는 당신을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뭐, 됐나.

우리는 우리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도. 용에게 잡혀가기 전에 원인 제거 해 버리는 왕자님도 멋지잖아?

“엔프리제.”

“네.”

“생일이니까 특별히 뽀뽀까지는 허락해 줄게요. 근데 혀는 안 돼요.”

“…….”

그리고 이렇게 놀리면 금방 빨개져 버리는 왕자님도.

나는 짓궂게 웃고는 책에 얼굴을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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