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71)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아니고 호숫물도 반짝.
거참 평화롭고 좋네.
끼이이, 하고 느릿하게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소리. 노를 저을 때마다 찰방, 하며 나는 물소리. 숲속에서 들리는 새의 노랫소리.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이 순간을 만끽했다.
불시의 방해를 받았던 지난번과 달리 오늘은 조용하다. 사실 조금 걱정되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원래 저택 주변에만 두었던 결계석을 호숫가 주변에도 두었다고 했다.
결계란 건 방법을 모르면 위치를 알아도 들어가는 것, 나가는 것이 쉽지 않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해 줬다. 덕분에 우리는 느긋하게 호숫가 수면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엔 왜 나오자고 하신 겁니까?”
“음? 음….”
“몇 번 제가 산책을 나가자고 해도 귀찮다고 싫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윽.
밖에서 습격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도 조금은 있었다. 엔프리제가 날 지키지 못할 리 없으니 그건 두렵지 않지만, 누군가가 죽어 있는 광경은 또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런 걸로 치면 저택에서 침입자한테 끌려 나갈 뻔한 게 더 충격이 컸으니까.
애초에, 나는 집순이란 말이다.
집순이란 무엇인가.
일단 세상의 전부가 집이다. 집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나가지 않고 세상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집순이라는 존재인 것이다.
아무리 누워 있어도 질리질 않는다. 아무리 뒹굴거려도 마냥 좋기만 하다. 소설 한 질만 있으면 종일 말 한마디 안 하고도 살아갈 수 있다.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다거나 심심하다거나 그런 말이 나오는 순간 그건 이미 집순이가 아닌 것이다!
어쩌다가 나가야만 하는 일이 생기면 그 하루 동안의 스케줄을 빈틈없이 짠다. 이 하루를 나간 걸로 인해 한두 달쯤은 나가지 않아도 되게끔. 혹은 두 달쯤 미뤄 둔 일들을 다 해결할 수 있도록.
그런 내가 밖에 나간다는 건 어지간한 일이 생겼다고밖에 얘기할 수 없다.
“엔프리제가 하고 싶다고 했으니까요.”
“제가요?”
“저랑 같이 유람선 같은 거 타고 싶다고 했잖아요.”
헤실 웃자 엔프리제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머리카락이 뒤로 넘겨져 있어서 잘생긴 얼굴이 훤하게 드러난다.
남자는 머리빨이라지만, 진짜 잘생겼으면 그런 것도 별로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엔프리제라면 대머리라도 예쁠 것 같으니까.
…맨질맨질한 대머리…. 귀여울 것 같은데.
“…샤페릴?”
“네?”
“갑자기 무서운 표정을 지으시기에….”
난 대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걸까. 어지간하면 귀엽다고 하는 엔프리제가 무섭다고 표현할 정도라니….
크, 크흠.
“머리에 뭘 발라 본 게 처음이라… 많이 이상합니까?”
…아, 심장이….
세상에. 이 만사 서투른 남자가 나한테 잘 보이겠다고 처음으로 왁스를 발랐대. 흑흑.
이건 거의 첫 심부름 갔다 온 아이를 바라보는 듯한 뿌듯함이….
…그거랑은 좀 다른가?
“안 이상해요.”
“하지만 샤페릴의 표정이….”
“그냥 그런 생각했어요. 엔프리제는 너무 잘생겨서 대머리를 해도 어울리겠다, 같은.”
“대머리요…?”
엔프리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왜 그럴까. 귀여울 것 같은데.
“표정이 왜 그래요?”
“아무리 그래도 대머리는 보기 싫지 않을까요.”
“엔프리제는 제가 대머리 되면 보기 싫을 것 같아요?”
상상해 보는 건지 잠시 고민하던 엔프리제가 고개를 내저었다.
“귀여울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저도 그래요.”
납득시켰다는 뿌듯함에 의기양양함을 담아 웃어 보이자 엔프리제가 배시시 따라 웃었다.
“그런데 이건 배가 작아서…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괜찮아요.”
생각보다 후프 드레스도 불편하지 않다. 얇은 철사로 된 방충망을 우산 모양으로 만들어 입고 있는 기분이랄까. 확실히 뒤집히면 큰일 날 것 같다.
“다음번엔 진짜 유람선에 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당신께서 여기서 나가실 수 있도록 손을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린 엔프리제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덕분에 걷어붙인 소매 밑으로 그의 팔뚝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쓰읍. 팔뚝에 힘줄 좀 봐. 시퍼런 게 힘 들어 가니까 아주 꿈틀꿈틀, 불끈불끈….
손으로 한번 쓸어 보고 싶다. 손안에서 맥박 뛰듯 불끈거리려나. 아니면 꾹 누르면 사르르 밀려 내려가려나.
“그러면… 샤페릴이 가고 싶은 곳은 다 같이 가 보도록 하지요. 어디가 가 보고 싶으십니까?”
“으음….”
일단은 댁의 팔뚝을 맘껏 주물거릴 수 있는 곳? 아니, 그러면 안 되긴 하지.
…안 되나?
사실 이제 안 될 게 어디 있나 싶다. 나도, 엔프리제도 서로를 좋아한다고 자각했고 마음도 통했다. 연인 사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지.
그런데 왜 그런 걸 하면 안 되지?
왜 나는 계속 이러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억누르게 되는 걸까.
“샤페릴?”
“어… 도서관이요?”
“당신은 정말 책을 좋아하시는군요.”
응?
아, 내가 도서관이라고 대답했구나.
책은 좋아한다.
드라마는 움직이는 영상이다 보니 너무 생생해서 좀 꺼림칙할 때가 있다. 그래서 가족 드라마 같은 것 외에는 거의 보지 않는 편이다. 게다가 결말이 궁금해 죽겠는데 일주일에 한 번, 이렇게 나오는 게 감질난다고 해야 할까.
책은 혼자 조용히 볼 수 있는 데다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비슷한 상황이나 소재인 것 같은데 작가에 따라 다르게 묘사되는 걸 보는 재미도 있다. 내가 그 안에 들어가서 함께 있는 듯한 감각이나, 등장 인물의 감정에 동조해서 같이 격앙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게 너무 좋다.
“재밌잖아요.”
“저도 최근 책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읽는 건 거의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뒤에서 날 안고 있는 채로 같이 읽고 있었던 걸까.
“책을 읽고 있을 때, 당신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입이 마치 병아리 부리처럼 움직입니다.”
병아리 부리라니. 대체 어떻게 움직인다는 거지?
“표정은 심각한데 입술만 그렇게 있을 때면… 저도 모르게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귀엽습니다.”
“아잇, 그 정도는… 하셔도 되는데.”
“네?”
“네?”
“어….”
엔프리제가 당황스러운 듯 나를 빤히 바라본다. 앞으로 날 보게 하고 싶으면 당황하게 만들어 볼까.
귀엽긴 하지만 침묵이 길어지면 괜히 민망해지니까.
“연극은 본 적 없어서 기대돼요. 사람들 많은 건 싫지만.”
“그럼… 당일 대관을 하도록 하죠.”
“네?”
“네?”
“어….”
이것도 데자뷔라고 부르는 걸까.
아니, 그보다 아무리 그래도 당일 전체를 대관한다고? 대체 규모가 얼마길래. 물론 엔프리제가 부자기는 하겠지만!
…근데 생각해 보니 좀 당기긴 한다. 오로지 나와 엔프리제만을 위해 배우들이 연기한다는 거 아냐?
오히려 내가 무대 위 주인공이 된 기분이 될 것 같은데.
“또 가 보고 싶은 곳 있으십니까?”
“음… 외국 상인들이 많이 오는 곳이요?”
“외국 상인?”
혹시 모르잖아. 거기엔 한식 관련된 무언가가 있을지.
분명 템버가 해 주는 음식은 맛있다. 밸런스도 잘 생각해서 만들어 주기 때문에 그리 질리지도 않긴 한다.
다만.
뼛속부터 한국인인… 아니, 이 몸은 여기 음식으로 만들어져 있지. 영혼의 부스러기까지 한국인인 나는 슬슬 매운 게 먹고 싶다. 맵찔이인 나지만, 여기는 죄다 너무 순한 맛이라서 한국인이 얼마나 매운맛이 일상적이었던 건지 깨달았다.
처음에는 음식 해 주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이젠 음식 타령이라니…. 문득 동생이 떠올라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다른 건 모르겠고 고추장, 된장, 간장만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만 있으면 떡볶이든 뭐든 내가 만들 수 있는데.
“책에서 읽었는데 맛있어 보이는 게 많더라구요.”
“아아…. 그럼 템버와 함께 가 보도록 하지요. 마음에 드시는 음식이 있으면 템버가 조리법을 알아내어 원하실 때 만들어 줄 겁니다.”
크으.
재료가 있으면 당연히 내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엔프리제는 내가 직접 뭘 하는 걸 못 보네. 아이참. 거참.
뭐, 귀족 영애인 샤페릴이라고 생각하니 당연한 거긴 하지만.
“아. 슬슬 점심 먹을까요?”
“아침부터 뭔가 준비하시던데….”
슬쩍 운을 떼는 엔프리제에게 씩 웃어 보이곤 피크닉 가방을 들어 올….
올….
에이씨, 무거워!
“제가 하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체력은 좀 붙었는데.
이제 근력 운동을 해야 하나? TV에서 스쿼트나 플랭크 하는 방법을 보긴 했었는데. 이 세계에는 그런 운동법은 없겠지? 방에서 몰래 해야겠다.
“이건….”
안에 든 건 각종 과일과 템버가 만들어 준 상큼한 샐러드. 그리고 내가 만든 미트 파이였다.
제발 맛있어야 할 텐데.
“미트 파이?”
“어… 생일날에는 미트 파이를 먹는 게 전통이라면서요…?”
“…….”
엔프리제는 대답 대신 물끄러미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늘한 바구니 안쪽에서 파이가 든 접시를 꺼내더니 다시 물끄러미 바라본다. 왜 저러지?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이건….”
“어… 제가 만들었어요.”
“당신께서?”
“네. 이게 얼마 전에 말한 비밀이에요.”
정확히는 비밀 중 하나지만.
비밀이 몇 개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부 다 말했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뻔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얼마 전에 템버에게서 엔프리제의 생일이 곧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뭔가 선물을 해 주고 싶은데, 제가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뭘 사서 주면 다 엔프리제의 돈으로 사서 주는 거잖아요.”
뭐, 엔프리제야 분명 내가 골라서 사 줬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해 줄 테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뭔가 의미 있는 걸 해 주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야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 주고 싶었지만….
여기는 그런 건 없는 모양이니까.
“처음 만들어 본 거라서 잘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어요.”
“…….”
엔프리제는 또 말이 없어졌다.
왜 저러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엔프리제…?”
그의 눈에서 뚝, 뚝 하고 투명한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