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70)
낯선 천장이다.
원래 세계의 내 방도, 지금 세계의 내 방도 아니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손을 올렸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 집안일이라곤 한 번도 안 해 본 게 틀림없는 손. 이제는 내게 익숙해진 손.
샤페릴의 손이다.
그럼 이 천장은 뭐지?
“일어나셨습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옆에는, 새하얀 베개를 벤 채 부드럽게 미소 짓는 엔프리제가 있었다.
…베개? 베개라는 건 누워 있다는 건가? 누워 있어? 어디에?
나랑? 엔프리제가? …침대에?!
“샤페릴?”
엔프리제는 내 왼쪽에 있는데, 오른쪽에서 그의 손가락이 살며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하얘진 머리로 고개를 돌리자 내게 팔베개를 해 주면서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엔프리제의 손이 보였다.
…….
“잠, 잠깐만.”
“네?”
“잠깐만… 기다려 봐요.”
침대.
침대라는 건 같이 자… 잤다는 거지? 설마 이거 아침 짹이야? 아침 짹 상황이야?! 분명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아니, 진정해, 샤페릴.
엔프리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 일단 기억을 되짚어 보자.
엔프리제 방에 멋대로 쳐들어가서 단정한 차림새를 하라며 잔소리를 하다가, 엔프리제랑 같이 얼싸안고…. 그다음에 기억이 없는데.
왜지.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왜지? 애초에 난 술 먹고 필름 끊긴 적이 없는데?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신 적이 없으니까!
애초에 술을 안 마셨는데!
“…풋.”
끙끙대며 어제의 일을 떠올리려는 나를 보며 엔프리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번쩍 눈을 뜨자 엔프리제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지금 굉장히… 귀여운 얼굴입니다.”
아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
엔프리제가 이런 말을 이렇게 태연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설마 어젯밤에 뭔가…! 아니, 난 기억에 없는데?
엔프리제가 설마 정신을 잃은 나한테!
그럴 리가! 아니, 하지만…!
엔프리제도 남자긴 하잖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샤페릴. 저는 당신에게 해선 안 될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그렇지?
엔프리제가 막 그럴 리가 없지. 기왕 할 거면 나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때에….
아니, 하고 싶다는 게 아니고!
“저, 왜 여기에 있어요…?”
“제가 너무 오랫동안 당신을 붙잡아 두고 있었나 봅니다. 어느 순간 숨소리가 평소와 달라지기에 보니 잠들었기에….”
“잠들었길래?”
“…….”
아니, 왜 거기서 얼굴이 빨개지는데!
하면 안 될 짓은 안 했어도, 해도 된다고 생각한 짓은 한 거 아니야? 평소에도 안고 있거나….
헉, 저번엔 목에 뽀뽀도 했잖아!
그, 그럼 설마…. 여기저기에 뽀뽀를…!
슬쩍 옷깃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내렸다. 옷 속으로 연한 하늘색의 속옷과 하얀 속살이 보였다. 흔히 말하는 벌레 물린 자국 같은 그, 키, 크흠, 그 마크는 안 보이는 것 같은데.
“옷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그럼 옷 위에서?!
나도 모르게 이불을 끌어당겼다. 아, 이게 당황스러우면 진짜로 이런 행동이 나오는구나. 누가 저런 행동을 하겠냐고 생각했는데.
“제가 뭘 했는지… 말씀드릴까요?”
“안, 아니, 그렇게까지 안 해 줘도….”
“복도에서 제 품에 안긴 채 잠든 샤페릴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들여다보다가…?
꿀꺽, 하고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고개를 치켜들며 엔프리제의 얼굴을 보자,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방에 모셔다 드리려 했습니다만.”
“다만?!”
왜 거기서 만이 나와?
아니, 이 남자야! 이게 무슨 드라마나 소설인 줄 알아? 왜 이렇게 뜸을 들이면서 계속 말을 끊어?
아, 이거 웹소설 속이지.
그래도 지금까지 뽕빨 피폐물다운 일 하나도 안 했잖아? 이럴 때만 소설 속 등장 인물처럼 굴지 말아 줄래?!
“절 끌어안은 채 놓아주질 않으시는 데다 혹여 방까지 이동하면 잠을 방해하게 될까 봐 제 방으로 모셨습니다.”
…그, 그렇지? 그게 끝이지?
엔프리제가 막 자는 사람 더듬고 그럴 리가 없지. 비록 원래 피폐 뽕빨물 주인공이지만. 원래는 절륜남이긴 했지만.
…어라.
“그다…음에는요?”
“침대에 당신을 눕혔는데, 그때까지도 제 옷을 놓아주지 않으셔서 그냥 옆에 같이 누웠습니다.”
성인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데.
같은 침대 안에서.
나란히 누워.
“그, 그러면 안 되죠!”
“죄송합니다.”
“그러다가 제가 잠이 덜 깬 채로 엔프리제를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덮…쳐요?”
이 남자가!
맨날 자기 남자라고, 위험한 걸 좀 알라고 하더니 나 위험한 줄은 모르네? 만약에 내가 깨었을 때 엔프리제가 자고 있었으면 이게 꿈이라고 생각한 채….
무,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는데!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옆에 누운 채 벙쪄서 날 보고 있는 엔프리제에게 설교를 시작했다.
“생각해 봐요. 저도 일단은 성인 여자라구요? 저도 엔프리제가 좋고, 엔프리제가 엄청 섹… 아니, 그, 어, 남자답게 보일 때가 있다구요? 엔프리제야 의지력이 강하니까 잘 참아 낼지 몰라도 저는 안 그럴지도 모르잖아요!”
왜 너만 안 덮치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덮칠지도 모르는데!
“앞으로 조심하세요!”
“네…?”
“대답은요!”
“네, 네.”
어리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엔프리제는, 아침 햇살을 맞아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생각했다.
안 덮쳐서 다행이다.
…아니, 덮칠 기회를 놓친 건가…?
* * *
“와아, 정말 아름다우세요, 아가씨.”
진짜, 완전 쩔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이쪽 세계랑 어울리지 않는 어휘인 것 같아서 말았다. 게다가 나 스스로 내가 쩐다면서 자화자찬하는 것도 좀 이상하고.
엷게 미소 짓는 정도로 끝내자 템버가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불편하진 않으세요?”
“조…금 조이긴 하는데 괜찮아요.”
연한 하늘색 바탕에 금색으로 여러 모양의 자수가 놓여 있고, 반짝이는 비즈가 달려 있는 드레스. 템버가 처음 시착하게 해 주었던 드레스가 드디어 완성되었다.
“움직여 보시겠어요?”
요리조리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본다. 주저앉는 건 좀 힘들지만, 어지간한 움직임은 다 가능하다. 다만 좀 걸리는 건.
“이거 입고 배 타면 좀 힘들까요?”
“혹여 후프 스커트가 뒤집어지는 일만 없으면 괜찮습니다.”
“헉, 이거 뒤집어져요?”
이거 뒤집어지면 우산 뒤집어진 것처럼 될 것 같은데…. 엔프리제 앞에서 그런 꼴이 되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다. 특히 오늘은.
“참, 도시락은 되었나요?”
“네. 처음 만들어 보시는데도 잘 만드셨네요, 아가씨.”
하하.
파이 껍질을 만드는 건 처음 해 봐서 조금 어려웠지만, 속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향신료가 좀 많이 달라져서 그렇지 집에서 하던 고기 요리와 그렇게 다르진 않았….
아니, 좀 다르긴 했지.
고기를 구운 후에 끓여 본 건 처음이긴 했다. 스튜라고 해야 더 맞으려나.
살짝 맛봤을 때 속은 정말 맛있었는데. 갈비찜 엄청나게 익힌 것보다도 더 부드러워서 입에서 사르르 녹아들었다. 하지만 갈비찜과는 맛이 많이 달랐다. 생소한 맛이지만, 채소에서 나온 감칠맛과 고기의 육즙이 어우러져서 풍부하고 부드러운 맛이 났다.
그걸 어제 만들어 놓은 파이 반죽 안에 넣고 계란 물을 발라 주며 꼼꼼하게 틈 없이 감싸 주고 오븐에 넣었다가 꺼내자….
“아가씨?”
“네?”
“그, 입가에….”
아, 침 흘렀다.
빵의 고소한 냄새와 고기 냄새. 잊혀지지가 않는다. 빨리 먹고 싶네.
“전하께서 기뻐하실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엔프리제의 방에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주방으로 달려가서 열심히 만들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엔프리제는 준비 다 했으려나.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샤페릴?”
“아, 네!”
옷도 다 입었고, 액세서리도 완벽하다. 저번에 산 세 개의 액세서리 세트 중에 청록색 보석이 박힌 걸로 골랐다. 옷에 비즈나 보석이 박혀 있어서 좀 걱정되었는데, 오히려 앤틱 느낌이 눈에 띄어서 도드라져 보인다.
내 눈에는 예쁜데.
엔프리제도 예쁘다고 해 주려나.
긴장된 얼굴로 문을 향해 서자, 천천히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앞에 엔프리제가 서 있었다.
“…….”
“…….”
서로가 서로를 보고 말을 잃었다.
미쳤어. 존잘. 이 남자, 아주 작정을 했네?
평소에는 하얀 셔츠에 단출한 코트 정도만 걸치더니, 오늘은 빛이 난다. 푸른빛 도는 코트는 소매에 금색 자수가 화사하게 놓여 있고, 안에 베스트는 아예 금색 자수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도 그게 너무 촌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바지도 푸른색이지만, 이쪽에는 자수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검은 부츠가 무릎까지 올라와 있었다.
목에는 새하얀 크라바트가 늘어져 있고, 그 위에 푸른 보석이 박힌 브로치가 빛나고 있었다.
언제나 자연스럽던 머리카락은 뭘로 고정한 건지 한쪽은 단정하게 뒤로 넘기고, 반대쪽은 볼륨을 줘서 앞머리가 살짝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 있다.
사실 내 취향상 왁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서 멋있어지는 남자를 거의 본 적이 없어서. 하지만 엔프리제가 하니까 그것조차 멋있다. 배우가 머리를 넘기자 열광하던 친구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샤페릴.”
“네, 네?”
엔프리제의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설마 또 침 나온 거 아니지? 너무 넋을 잃고 바라봤네. 엔프리제가 넋을 잃게 만들어 주려고 했었는데.
“…이리로.”
평소의 나라면 남주가 저딴 소리를 지껄이면 니가 와야지 어딜 여주더러 오라 가라 해, 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순순히 그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솔직히 머리가 하얘져서 별생각이 들지 않는다.
엔프리제는 가까이 다가온 나를 한참이나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더니 문득 미소 지었다. 다만, 어쩐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제게, 당신을 에스코트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순간 정신이 들었다.
아마 파티가 열릴 때마다, 샤페릴을 멀리서 볼 때마다 엔프리제는 저 한마디를 하고 싶었겠지.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며.
미안해, 엔프리제. 그걸 내가 듣게 되어서.
하지만.
“절 에스코트할 사람은 엔프리제밖에 없는걸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