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69)
엔프리제는, 서명이 끝난 서류를 밀어냈다. 원래라면 서재에서 끝냈어야 했겠지만, 빨리 방에 가서 쉬라는 템버의 성화에 결국 방까지 들고 와야만 했다.
낮은 한숨을 내쉰 엔프리제는, 몸을 일으켜 창가에 섰다. 샤페릴의 머리카락만큼이나 희고 맑은 달빛이 은은하게 어둠을 물들이고 있었다.
“샤페릴.”
엔프리제는 저도 모르게 가만히 눈을 감으며 제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닿았던 살결은 지독히도 보드라워서 제 입안에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이대로 그녀의 말에 기대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다. 그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탐하고 싶어진다. 그 보드라운 목선 아래에 있을 곳 역시.
하지만 그래도 되는 건가?
기억을 잃은 그녀를, 약혼자에 대해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그녀를 이렇게 속이듯 취해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리면.”
엔프리제는 엘마레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팔짱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샤페릴이 그 저택에서 나오려면, 최소한 마탑과 교회만큼은 제어해야 한다.
반란군 세력은 어차피 제어가 가능한 세력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황실에서 제어가 가능한 두 세력만큼이라도.
하지만 엔프리제에게는 힘이 없었다.
-너도 알겠지만, 내게 주어진 것은 이름뿐인 자리다. 그들이 내 명령을 들을 리가 없겠지. 그래서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부탁이라고 하시면.
-내게… 범죄에 대한 처벌권을 다오.
본래 황족에게는, 자신에게 무례를 범하거나 죄를 지은 이를 곧바로 처벌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지만 엔프리제는 황태자의 자리를 포기하면서 그 권리 역시 함께 포기한 셈이 되었다.
엔프리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영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즉시 판결을 내리고 처벌할 수 있는 권한뿐.
하지만 그걸로는 샤페릴의 기억을 되찾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녀를 지킬 자신은 있다. 하지만 수도에서 내가 검을 휘두르면 단순한 살인자밖에 되지 않지.
엔프리제의 영역 안에 있는 한, 그가 사람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엔프리제는 사람을 죽이는 데는 질릴 정도로 도가 튼 사람이었다.
…정말, 질릴 정도로.
그러니 무슨 일이 생겨도 샤페릴을 지킬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밖에서는.
안 그래도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귀족들이 그 꼬투리를 잡고 어떤 식으로 몰아갈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검술과 달리 인간의 입이나 생각은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는 것이니까.
-…형님의 말씀은 잘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왜 저한테? 바르카 형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더 나았을 텐데요.
왕제인 엘마레의 권한에는 한계가 있다. 그걸 알면서도 엔프리제는 굳이 엘마레에게 부탁했다.
왜냐하면.
-나는 바르카를 믿을 수가 없다.
-네?
-자하가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바르카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응하기 위해 저택을 비워야만 했겠지. 하필 그때를 틈타 카운 백작가의 인간이 숨어든 것은 이상하다.
계속 마음 한구석에 걸렸던 위화감. 그건 점점 덩치를 크게 부풀려 가고 있었다.
본래라면 황제를 내팽개친 채 자리를 떠난 엔프리제에게, 최소한 쓴소리 한마디쯤은 내려왔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바르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것마저 이상했다.
애초에 몇 번이나 알현하고 싶다는 연락을 보내도 꿈쩍 않던 바르카가 갑자기 저택을 찾는 것 역시 이상했다. 자신을 저택에서 떼어 놓기 위해서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형님, 설마 바르카 형님이….
-솔직히 나도 믿기지 않는다. 상황을 생각하면 바르카가 저지른 게 틀림없어 보이지만,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지금의 나는 바르카를 믿을 수가 없다.
엔프리제의 말에, 엘마레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최대한 손을 써 보겠습니다. 대신 형님, 하나만 제안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제안?
-형님께도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드물게도 밤의 방문자가 찾아왔다.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엔프리제가 저도 모르게 검을 찾아 손에 쥐었다.
“…….”
열일곱이었던가.
그 정도 세었을 때부터 암살자는 그의 방을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암살자도 문을 두드리고 당당하게 쳐들어오진 않았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아니, 생각할 것도 없었다. 엔프리제는 조용히 문을 다가가.
“엔프리제, 자요?”
다가가….
툭, 하고 엔프리제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샤페릴…?”
“아, 아직 안 자요? 저 들어가도 돼요?”
순간 머리가 얼어 버렸다.
쥐가 났다고 해야 하나?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찡한 느낌만 머리에 가득했다. 머리를 맴도는 생각은 단 한 가지뿐.
왜 샤페릴이 이 시간에 여길?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제 자려고 했던 터라 세수하면서 머리카락도 살짝 젖었다. 샤페릴이 그랬을 때야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자신이 그런 꼴로 있어 봐야 한심할 뿐일….
-세상에서 제일 잘생기고, 멋있고, 예쁘고, 귀엽고 혼자 다 해 먹고.
샤페릴은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럼… 이런 모습의 자신도 좋아해 줄까?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엔프리제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심호흡과 함께 문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 * *
뭐지, 내가 좋지 않은 목적으로 온 걸 눈치챘나?
하긴. 한밤중에 남정네 방을 찾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 그렇다는 건 엔프리제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건가.
아니, 그래도 거기까진 아직 아닌데….
그냥 돌아갈까, 를 고민하는 내 귀에 엔프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언제 문을 연 거지.
생각에 빠진 탓에 내려간 고개를 들어 엔프리제를 보았다. 그리고 엔프리제는….
“헉.”
“헉?”
이 남자가 날 뇌쇄시키려고 작정을 했나? 기다리라고 하더니 이런 꼴로 문을 연다고?!
“오, 옷 왜 그래요.”
“옷….”
엔프리제가 살짝 고개를 숙여 제 옷차림을 내려 본다.
평소에는 단정하게 딱 잠겨 있던 단추가 세 개쯤 헐렁하게 풀려 하얀 속살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저, 저러다가 어?! 그, 그것도 보이겠는데!
어둠 속 촛불 아래에서 약간 주홍색으로 빛나서 그런가. 저번에 햇살 아래에서 봤을 때도 충분히 괴로웠는데 오늘은 정말 눈이 어지러울 정도다.
“단정치 못해서 그러십니까?”
슬쩍 고개를 드는 그의 머리카락이 파르르 흔들린다.
젖은 남자는 원래 섹시하기 마련이지만,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이러는 건 반칙이라고 본다. 평소보다 조금 머리카락이 단정치 못하고 흐트러져 있을 뿐인데 사람 마음이 막….
어휴.
“엔프리제.”
“네.”
“사람은 왜 단정하게 있어야 하는지 알아요?”
“단정치 못한 모습은… 남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주니까요.”
“틀렸어요!”
이 남자는!
내가 그렇게나 이야기했는데 아직도 눈치를 못 채는 건가!
“엔프리제는 제가 단정하지 않으면 기분 나빠요?”
“아니요. 귀엽습니다.”
“제가 막 옷을 흐트러지게 입고 있으면요?”
“…….”
아, 빨개진다. 귀엽다.
아니, 귀엽다가 아니라. 정말로 뇌가 맛이 갔나? 생각 흐름이 왜 이래.
“그…, 그건…. 가급적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왜요?”
“…여러모로, 그, 참기 힘들 것 같아서.”
“그거예요!”
역시 역지사지는 언제나!
“저도 엔프리제의 이런 모습을 보면 여러모로 참기 힘들어요!”
“…어떤, 걸 말씀이십니까?”
“엔프리제랑 똑같은 것들요.”
내 입으로 어떻게 그걸 말해?
하얗고 윤기 나는 살을 조물조물해 보고 싶다거나, 약간 시원한 향기가 나는 머리카락에서 어떤 맛이 나는지 오물거려 보고 싶다거나.
옷 아래에…, 크흠.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자.
“앞으로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라?
생각해 보면 갑자기 이 밤중에 엔프리제를 찾아온 건 나잖아. 그리고 문 열라고 한 것도 나고.
이 시간은 원래 자고 있을 시간이고.
…어라?
엔프리제가 제 셔츠의 단추를 두 개쯤 잠갔을 때 드디어 이성이 돌아왔다. 난 대체 무슨 적반하장을!
“저기, 죄송해요.”
“뭐가 죄송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생각해 보니 한밤중에 쳐들어와서 단정하게 있으라고 한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엔프리제도 쉬어야 하니까 다소 흐트러지는 건 당연한 건데.”
그걸 보고 엄한 생각을 한 내가 나쁜 거지.
미안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자, 엔프리제가 한 걸음 다가오더니 가만히 날 끌어안았다.
“샤페릴이 저한테 미안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이 바라면 그게 뭐라도 이루어 드릴 테고, 당신이 싫다 하시면 그게 뭐라도 제거할 겁니다. 그게 제가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전부니까요.”
내가 엔프리제에게 바랐던 것도 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엔프리제.”
“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등을 감쌌다.
마주 안은 그의 몸은 몹시도 뜨겁고… 듬직해서 나도 모르게 저절로 눈이 감겼다. 포근한 온기를 느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예전의 저는, 그런 엔프리제가 좋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원하는 건 뭐든 준비해 주고 해 주는 엔프리제.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싫다는 건 아니다. 나는 속물이라 지금의 생활을 포기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다만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분명 지금의 생활을 놓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엔프리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나를 위해 애써 주겠지. 내가 정말로 바라던 건.
물질적인 것보다 분명.
“엔프리제가 제 곁에 있다는 게 더 좋아요.”
그를 꽉 끌어안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엔프리제는,
“…당신은… 당신의 한마디는 언제나 저를 구원합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날 더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이나 복도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채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