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68)
“이건 설마…!”
플랜더스의 개에서 우유를 담을 법한 유리병. 하지만 크기는 그보다 훨씬 더 작다.게다가 안에 든 건 하얗긴 하지만 우유가 아니었다.
“푸딩인가!”
젤리는 많이 먹어 봤지만, 푸딩은 그다지 먹어 본 적이 없다. 가끔 편의점에서 파는 걸 보긴 했는데 가격이 꽤 비싸서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쪼그만 게 배는 안 차면서 너무 비쌌단 말이지….
살짝 냄새를 맡자 바닐라 냄새가 난다. 어릴 때는 바나나랑 바닐라랑 같은 건 줄 알았다. 그래서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을 산 후 왜 바나나 맛이 나지 않는지 의아해했었지.
할머니한테 한 번 물어보긴 했지만,
-주는 대로 처먹지 뭔 말이 많아? 먹기 싫으면 이리 내라.
고 하기에 그다음부터는 궁금한 게 있어도 절대 묻지 않았다. 어차피 인터넷에 찾아보면 대충 나오니까.
“맛있겠다.”
“벌써 반죽을 끝내셨어요, 아가씨?”
응?
템버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나 때문에 급하게 오느라 그런 걸까.
“네. 냉장실에 넣어 두었어요.”
이 세계에도 냉장고가 있다는 것엔 좀 놀랐다.
하긴 이게 있고 없고에 따라 여주의 음식 질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니까 말이지. 운송할 때 제대로 된 보관 수단이 없으면 가격도 가격이지만, 일부 식재료는 아예 구경도 못 하게 될 테니까.
작가로서는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이 세계에는 마법이라는 편한 도구도 있으니까.
“그런데 마법이란 신기하네요. 이 더운 날에 차갑게 음식을 만들 수 있다니.”
“그렇죠? 개발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어요. 이런 마법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마법석이라는 것이 필요한데, 여간 비싸지 않거든요. 게다가 만드는 것도 쉽지 않고. 많은 마법사들이 달려들어 연구했다고 들었어요.”
흐음.
마법이라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닌 건가.
“템버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요?”
“설마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주 극소수의 인간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국에서는 설령 평민이라고 하더라도 마법 통로만 있다면 어릴 때부터 국가 지원을 받을 수 있어요. 대신 커서 제국을 위해 일해야 하지만요.”
그래도 대우는 엄청나겠지.
나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이 체질을 가지고 완전히 무쌍을 찍을 수 있지 않았….
않았…겠지.
내 성격상 그런 귀찮은 짓을 할 리가 없다. 게다가….
순간 그날의 광경이 되살아났다.
바닥에 선연하게 흩뿌려진 피. 그 속에 있던, 사람이었던 것. 내 손으로 그런 광경을 만들어 낼 바엔 차라리 어딘가에 콕 박혀서 혼자 유유자적 살아갔을 거다, 나란 사람은.
“그럼 엔프리제는….”
“전하는… 마법 통로는 가지고 계시나 마력이 거의 없으세요. 마법사는 대부분 마법에 사용되는 마력을 어느 정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전하는 그게 불가능하시다더군요. 만약 마법만 사용할 수 있었어도 많은 게 바뀌었을지도 모르는데.”
이건 분명 작가의 농간이겠지.
엔프리제는 말했었다. 타인의 마력이 몸 안에 들어올 경우 최소한 꽤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뽕빨물 특성상 책 분량의 상당수가 씬으로 채워진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점막 접촉을 통해 마력이 옮겨 간다는 건 씬을 위한 설정을 보인다.
그러니 이 모든 설정들이 샤페릴과 엔프리제의 씬에 나름대로의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겠지.
그게 조금 화가 난다.
아니, 이해는 한다. 작가야 당연히 이걸 그냥 창작물로 쓴 거니까 최대한 인물들을 굴리고 괴롭히고 아프게 만들어야 카타르시스도 만들 수 있을 테고 사건이 전개가 되겠지.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치유해 주는 쌍방 치유물은 인기 있기도 하고.
하지만….
문제는 이 모든 게 나에게는 현실이라는 거다. 그리고 엔프리제에게도.
엔프리제가 겪지 않았어도 될 아픔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울렁거린다. 실제 사람과 달리, 작가라는 신이 확실하게 존재하는 소설 속 세계의 인물들은 작가가 어떻게 설정을 짜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뀐다.
조금은… 덜 아프게 해 줬어도 될 텐데.
그랬다면 엔프리제도 조금은 더….
“하지만 분명 모든 건 아가씨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겠지요.”
“네?”
생각에 잠겨 있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템버가 활짝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순간 얼빠진 반응밖에 하질 못했다.
“전하께서는 그 모든 괴로움을 겪으셔야만 했죠. 그랬다면 그 일들을 겪은 것엔 이유가 있을 겁니다.”
너무 교과서적인 이야기라 순간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럴 거라고 웃어 넘기면 그만인데.
“전하께서 그 모든 일을 겪었기에 아가씨는 여기에 계십니다. 그리고 전하와 아가씨는 서로에게 마음을 주셨지요. 분명, 아가씨를 만나기 위한 과정들이었을 거예요.”
내가 이 세계가 책 속의 세계라는 걸 몰랐더라면 템버에게 무언가를 대답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말한 대로 엔프리제의 모든 불행은 샤페릴을 만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샤페릴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만들기 위해.
그가 샤페릴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 샤페릴의 몸에 들어가서, 엔프리제에게 마음을 주어 버린 나는…. 템버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 *
“…….”
잠이 오지 않는다.
엔프리제와 함께 저녁을 먹고 가벼운 수다도 떨었다. 템버와의 대화는 다 잊어버린 것처럼.
하지만 밤이 되어 혼자 있으니 또 생각났다.
플리가 보고 싶다. 플리가 있었더라면 내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면 다가와서 삐-? 하면서 귀엽게 내 얼굴을 들여다봐 주었을 텐데.
“…하.”
결국, 몸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하지만 할 게 없다.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저 속에 들어 있는 이 답답한 무언가를 터뜨려 보고 싶었다.
나가서 소리라도 지르고 올까.
그랬다간 엔프리제가 깜짝 놀라서 달려오겠지.
“…엔프리제는 자려나.”
언제나 아침 단련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엔프리제니까, 분명 지금쯤 자고 있겠지.
…어라?
그럼 지금 엔프리제의 방에 가면 자는 얼굴을 볼 수 있다는 뜻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렇겠지….”
아니, 하지만 엔프리제도 내가 잠든 얼굴 몇 번이나 봤잖아? 심지어 열을 내리기 위해서라곤 해도 뽀뽀도 했잖아.
그럼 나도 자는 얼굴을 보는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으음.
어차피 잠도 오지 않고 엔프리제가 깨어 있으면 같이 이야기라도 하고, 자고 있으면 살짝만 자는 얼굴을 보고 오자.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신었다. 촛대를 가지고 나갈까 고민하다가, 혹시라도 템버가 밖에 나왔다가 보면 좀 민망할 것 같아서 두고 나가기로 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자 깜깜한 어둠이 나를 반겼다.
하긴. 이 밤에 돌아다닐 사람이라곤 템버밖에 없으니 초를 켜 놓을 필요도 없겠지. 촛대 하나만 들고 다니면 그만일 테니까.
그래도 전깃불이 없는 이 세계에서는 달빛이나 별빛이 꽤 밝다. 지금도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창백한 달빛이 어렴풋이 사물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복도 벽에 달라붙어 조심조심 말을 내디뎠다.
“…….”
이제 곧 가을이 다가올 텐데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여기에는 귀뚜라미 같은 게 없는 걸까? 그 울음소리를 듣는 것도 꽤 재미있었는데.
가끔씩 핸드폰으로는 오디오 북을 작게 틀어 놓고, 창문을 활짝 열어 귀뚜라미 소리를 듣곤 했었다. 그맘때엔 아직도 밤의 더위가 조금 남아 있는 경우가 있어서 차가운 얼음이 든 보리차를 마시면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었지.
내 일상에 몇 없는 귀중한 휴식의 순간이었기에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만약 가을에 풀벌레 우는 시기가 오면 엔프리제랑 같이 밤에 외출을 해 볼까? 숲에 매트를 깔고 누우면 유독 맑고 별이 많은 가을 밤하늘이 보이겠지.
그걸 보며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엔프리제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
아, 엔프리제가 빨리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피식,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언제부터 이렇게 유약해진 건지.”
내 편은… 없었다.
있었던 내 편마저도 내가 떠나보냈다. 그게 얼마나 귀한지 모르고 그냥 싸우는 게 싫다는 이유로.
그래서 난 항상 혼자서 무언가를 해내야만 했다. 공부도, 운동도, 집안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효자손이 날아오거나 비아냥이 날아오기 일쑤였으니까.
뭐든 혼자서, 스스로 하는 게 당연했던 내가 이토록이나 변했다.
제 감정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이 밤중에 엔프리제의 방으로 간다. 만약 그가 깨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내게 화를 내지 않을 테니까.
엔프리제는 자다 일어나서 몽롱한 상태에서도 날 받아들여 줄 거다. 그리고 정신을 좀 차린 후에는 무슨 일이냐고 다정하게 물어 줄 테고, 내가 대답하면 꼭 안아 주며 토닥여 줄 것이다.
절대적인 내 편.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런 건 줄 몰랐다. 이렇게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건 줄 몰랐다.
나는 좀 더 개인적으로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날 바꾼 건….”
이 좁은 천국이었다.
이 좁은 천국 속에서 어리광쟁이가 되었고 훨씬 더 약해졌다. 그런데도 나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다.
억지로 강해져야 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뭐가 나빠? 나도 사람인데, 감정적으로 흔들릴 때도 있고 마음이 우울할 때도 있었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짜증을 부리고 싶기도 했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받아 줄 이가 아무도 없었기에 참아야 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좁은 천국뿐만이 아니라….
그 천국을 준 당신까지 얻었다.
엔프리제.
“…빨리 보고 싶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