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67화 (67/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67)

“…으아아아!”

책을 읽다가 문득 떠오르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휙 손에 든 것을 내던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글로 읽어서 알고는 있었다. 다만 뭐랄까. 늘 읽는 19금 소설들이 수위가 좀 높다 보니 목에 입을 맞추는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미쳤어, 미쳤어…!”

금색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새겨져서 사라지질 않는다. 심장이 계속 두근거려서 흉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여기 비상 약 없어?!

누가 나한테 진통제 좀 줘 봐!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결국,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플리를 찾아 좀비처럼 어슬렁거렸다.

하얀 복슬복슬.

복슬복슬을 만지면 좀 진정될 것 같은데! 복슬복슬 어디 갔어!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맞다. 플리는 엔프리제가 데려갔지.

“으아아, 플리…! 플리, 돌아와 줘!”

그 하얀 털에 손을 묻은 채로 쓰담쓰담 하고 싶다. 보들보들해서 내 마음이 저절로 힐링되던 그 감촉…!

으으, 으으으.

아, 하얀 털이라면 여기도 있잖아.

나는,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스스로 쓰다듬었다. 안타깝게도 플리의 보들보들한 털과는 다르지만 매끄럽고 부드러워서 손이 스르르 미끄러지는 느낌이 든다.

음,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더 만지작거리는데, 이번엔 허공에 그 얼굴이 떠올랐다.

“…으, 으아아!”

중증이다.

아니, 키스를 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엄밀히 따지면 키스가 더 야한 거 아니야?! 겨우 그냥 목에, 피부 위에 뽀뽀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 거냐고!

무서운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뭔가, 그 눈을 떠올리면 처음에는 무섭다가…. 뭔가!

몸이 더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다. 그뿐이겠어? 오싹오싹한 한기랄까 오한이랄까 그런 것도 느껴진다. 그 모순된 감각 끝에 나도 모르게.

그 뒤를 상상하고야 만다.

라니, 나 아직 키스 두 번 해 본 게 전부인데! 그런 건 책으로밖에 경험한 적 없는데!

설마.

난 변태였던….

“으, 으으으으…!”

도저히 안 되겠다. 이대로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이럴 땐.

“물감을 만들자.”

처음에 물감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줄 때 자하가 그랬었지. 물감을 만들면 마음이 좀 진정된다고. 요즘의 내가 그랬다.

처음에는 사실 냄새 때문에 창문 활짝 열고도 인상을 찡그리곤 했었다. 휘발유랑 닮았는데 그거랑은 조금 다른 묘한 냄새가 속을 울렁이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냄새를 맡으며 슥슥 물감을 갈고 있으면 뭔가 침착해지는 느낌이 든다. 명상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창문 안 열고는 머리 아파서 못 하지만.

템버가 깨끗하게 씻어 둔 검은 돌판 위에 안료 가루를 붓는다. 이번엔 그림을 그리기 위한 게 아니니까 조금만 하자.

아까우니까.

선택한 색은 다소 흙색에 가까운 오렌지색이었다. 이건 흙으로 만들어서 비교적 싸다고 이미 정보를 입수했지. 사실 자하를 붙잡고 이 중에서 제일 비싼 것, 즉 건드려선 안 되는 안료 색과 다소 막 건드려도 되는 안료의 색을 물어봤었다. 다 기억하긴 어려워서 제일 싼 거 세 개랑 제일 비싼 거 세 개를 외워 두었다.

뭐, 싸다고는 해도 안료로 만드는 과정도 있고 흙의 색 자체도 제국에서 나지 않는 것이라 다른 것에 비해 싸다는 것뿐이지 싸구려는 아니다.

안료의 중앙을 페인팅 나이프로 파내 화산 분화구처럼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 아마씨유를 조르르 부었다. 오렌지색의 안료에 기름이 녹아드는 모습 역시 생각보다 장관이다.

잠시 바라보다가 슥슥, 하고 돌판과 나이프가 마찰하는 소리를 들으며 기름과 안료를 뒤섞었다.

약간 끈적한, 찰흙 덩어리 같은 것을 세세하게 으깨며 한참을 뒤섞어 준 후 이번엔 글래스 뮬러를 꺼냈다. 얼핏 보기에는 커다란 도장 같은 그것을 잡아 물감 덩어리 위로 슥슥 문지른다.

끈적한 덩어리가 얇게 펴져 돌판 위로 번진다. 그 위로 뮬러를 움직이며 아직 큰 입자가 남은 안료를 잘게 갈아 준다.

칼이랑 돌판이 마찰할 때랑 또 다른 소리가 들린다. 힘 조절을 살짝 실수하면 들리는 다각, 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토독, 하는 소리 같기도 한 소리.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돌판과 뮬러가 부딪쳤을 때 나는 소리고, 대부분은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사각사각과도 닮은 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들으며 무심으로 손을 움직….

움직….

“…글렀잖아!”

아무 생각 없다고 생각했는데, 까만 돌판을 뚫어지게 보고 있자니 엔프리제의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그 뒤에는 또 그 눈이 떠오른다.

금방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듯이 바라보던 그 뜨거운 눈동자.

대체 어떻게 해야 잊어버릴 수 있지. 그 눈동자를 떠올리면 이어지는 망상에 머리가 타 버릴 것 같다. 나는 언제부터 이런 변태가 된 거지?!

외면하려 해도 눈에 들어오는 게 온통 금색으로 물들 기세다. 창문에 스며드는 햇살은 물론이고 지금 보니 저 오렌지색, 약간 금색 닮은 것 같…기는 개뿔!

전혀 다르잖아!

“플리이! 제발 돌아와!”

결국, 글래스 뮬러마저도 집어 던진 나는, 그대로 침대 위에 내 몸을 던졌다. 그리고 머리를 싸쥔 채 이제는 익숙해진 폭신한 침대 위를 데굴데굴 끝없이 굴러야만 했다.

…아, 이게 바로 여주가 구르는 그런 건가. 나 굴림여주야?

따위의 뻘 생각을 하면서.

* * *

“괜찮으세요, 아가씨…? 얼굴색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괜찮아요. 아마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묘한 열기 때문에 한참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더니 조금 지쳤다. 하지만 내일을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할 게 있다.

그걸 위해서 일부러 요리 책도 빌렸으니까.

“혼자서도 괜찮으시겠어요, 아가씨?”

“네. 레시피는 열심히 봤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사실은 템버가 옆에서 봐 줬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한다. 할머니 때문에 거의 한식으로만 음식을 차리다 보니 양식은 거의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쁜 템버를 내가 계속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쿨하게 보내 주기로 했다.

언제 내가 뭐, 누가 가르쳐 줘서 요리를 배웠나? 요리책 보거나 맞아 가면서 혼자 배웠었지.

이번에도 레시피를 제대로 숙지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제대로 숙지한 건 맞겠지?

이젠 맛없다고 누가 때리거나 밥상을 엎을 일은 없다. 엔프리제는 내가 만든 거라면 뭐든 달갑게 먹어 주겠지.

하지만 그래서 더 맛있는 걸 먹여 주고 싶다.

“나중에 빨래 끝난 후에 반죽 된 것만 한번 확인해 주세요.”

“그럼… 알겠습니다, 아가씨. 빨리 다녀올게요. 힘내세요!”

템버는, 나를 향해 불끈 주먹을 쥐어 보이더니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평소에 느릿한 걸음을 걷던 그녀가 저렇게 빠르게 걷는다는 건, 한 말을 지키기 위해서겠지.

후.

그럼 나도 시작해 볼까.

원래 음식이라는 건, 남이 하는 걸 보면 쉬워 보이고 내가 해 보면 어려운 법이다. 템버가 이런 걸 뚝딱뚝딱 만들어 낸다고 해서 결코 쉬울 리가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집중하자.

일단 재료는 템버가 다 준비해 줬으니….

먼저 밀가루에 버터를 넣고 물을 넣어 준다. 원래는 계량까지 내가 해야 하지만, 감사하게도 템버가 준비해 주었으니 그대로 다 집어넣는다. 원래 이런 베이킹은 계량이 전부라고 하던데.

즉, 내 미트 파이는 절대 실패할 리 없다는 뜻이다.

“후….”

하지만 반죽 자체가 일단 쉬운 일이 아니다. 반죽 만드는 믹서가 있다면 쉬울 텐데 안타깝게도 그건 없다. 내가 마법사들한테 의뢰해서 만들어 팔아 볼까? 대박 날 것 같은데.

일단 왼손으로 그릇을 단단하게 잡고 오른손으로 반죽을 조물조물 섞기 시작한다. 비닐장갑이 없기 때문에 일단 손을 최대한 깨끗이 씻어 보았는데….

뭐, 어차피 맨살도 핥고 그랬는데 맨손으로 만든다고 뭐라고 하진 않겠지.

반죽이 대충 섞였다 싶을 때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흡!”

있는 힘껏 치대기 시작했다.

반죽은 얼마나 치대느냐의 싸움! 얼마나 오래, 얼마나 강하게 치대 주느냐에 따라 쫄깃함이 갈린….

근데 이거 수제비 만들 때 하는 방법인데…. 괜찮으려나.

처음에는 몽글몽글 작은 공 같은 것이 가득 생겨 있었으나, 강하게 치대 주자 점차 매끈해지기 시작했다. 샤페릴은 팔 힘이 약하니까 제대로 체중을 실어서….

으으, 힘들어.

그래도 이걸 제대로 해야 나중에 밀가루가 뭉친 부분이 나오질 않는다. 끙끙거리면서 한참 동안 밀가루를 치대 주자, 겨우겨우 손끝에 만져지던 덩어리진 밀가루가 사라졌다.

“…후.”

이걸 냉장고에 넣어서 숙성시켜 주도록 하자.

안에 들어갈 건 내일 하는 게 낫겠지? 고기 익히는 데 약불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리고 파이를 굽는 데 40~50분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손이 느린 내가 피크닉 때 따끈한 미트 파이를 완성해서 가려면….

넉넉잡아서 세 시간 전에 시작하면 되겠다.

“오늘 저녁은 해산물 수프인가.”

그런데 색이 하얗다.

여기 와서 먹은 수프는 상당수가 맑은 국물이어서 좀 놀랐었다. 내가 아는 수프는 3분 완성이라는 그 수프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건 내가 아는 그 수프랑 좀 비슷하게 생겼다. 향기는 전혀 다르지만.

내가 아는 그 고소한 냄새가 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해산물 특유의 냄새도 같이 난다. 낯익은 데 낯선 기묘한 음식.

그래도 템버가 한 거니까 분명 맛있겠지.

“으음, 배고프다.”

꼬르륵, 소리가 저절로 난다. 반죽하느라 힘을 써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뭐 먹을 거 없겠지?

함부로 주방을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서 흘끗흘끗 훑기만 했다. 사실 대부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건드리기 좀 그렇기도 했다. 양념통 하나까지도 각이 잡혀 있어서 건드리면 분명 눈치챌 것 같은걸….

주방은 사용자의 성격을 드러낸다는데, 템버의 단정하면서도 깔끔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뜻이겠지. 한참 여기저기를 훑어보던 내 눈에.

“헉…!?”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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