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65)
흠, 흠.
이 제국에서는 생일날 미트 파이를 만들어 먹는구나. 매일의 음식도 그렇지만, 확실히 서양 느낌이네. 실제로 미트 파이를 먹는 나라도 있었으려나.
케이크도 먹겠지? 하지만 케이크는 뭔가 어렵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 역시 미트 파이인가.
이거라면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삐-?”
토도독, 하고 달려온 플리가 책상 위로 올라온다.
슥슥, 하고 앞발로 마른세수를 하더니 뒷발로 서서 나를 쳐다보며 킁킁거린다. 뭔가 이상한 냄새라도 나나?
“왜 그래, 플리?”
톡, 하고 손끝으로 플리의 코끝을 간질어 주자 녀석이 부드러운 얼굴로 뺨을 문질렀다. 귀여워.
보던 책을 내려놓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그러자 플리가 살금살금 다가와 내 옆에 납작 엎드렸다.
“플리, 오늘은 뭐 했어?”
“삐?”
“이제 공부 같은 건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공부는 내게 수단이었다.
대학에 갈 수단이자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렇게 하면 혼자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나서는 적당히 학점을 딸 수 있을 정도로만 공부했다. 과외 알바를 구하는 데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만.
회사에 들어갔을 때는, 필요한 프로그램에 대해 배운 뒤 무언가 공부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딱히 뭔가를 하고 싶다거나 배우고 싶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매일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귀중한 휴식 시간을 깎아 가며 뭔가를 배우고 싶지 않았다.
분명 하고 싶은 게 없었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겠지.
“여기서 눈을 떴을 때 말이야, 플리.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평생 놀고먹자고 생각했다.
돈을 벌 필요도 없고 집안일을 할 필요도 없는 천국. 거기서 평생 뒹굴거리며 하고 싶은 것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공부는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것인가?
으음, 그건 아니다.
“분명 이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이겠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이런 느낌이었구나.
소설을 보면서 늘 의아했다. 왜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무언가를 해 주지 못해 안달인 걸까? 왜 오해를 만들면서까지 서로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 하는 걸까.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오해도 생기지 않을 텐데.
그리고 지금은 생각한다. 여전히 그들이 다 이해가 가는 건 아니지만,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웃어 줬으면 좋겠단 말이지.”
살살 턱 아래를 문질러 주자 플리도 내 손가락 위에 제 턱을 얹었다. 마치 좀 더 쓰다듬어 보라는 듯이.
그게 귀여워서 피식 웃어 버렸다.
“나도 알아. 엔프리제는 내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그래도.”
해 주고 싶다.
당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 주고 싶다. 뭘 해 줘야 기뻐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삐-!”
손가락을 멈추자, 플리가 더 해 보라는 듯 그 조그만 앞발로 내 손가락을 꽉 붙잡는다.
흐으, 미쳤어. 이 작은 앞발에 발가락이 다섯 개 다 있어. 손톱도 있어.
꼬물거려.
“더 쓰담쓰담 해 줘?”
“삐!”
“알았어.”
그렇게 나는 한동안 플리와의 시간을 즐겼다.
* * *
“플리를요?”
“네.”
“얼마나요?”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 어떤 기능을 추가할 수 있는지는 가서 확인해 봐야 하니까요.”
기왕이면 위험 감지하면 도망가는 기능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 작은 몸으로 괜히 끼어들지 말고.
“플리가 다치지 않고, 당신을 지킬 수 있도록 할 테니까요.”
“…응, 알았어요.”
플리가 다치지만 않는다면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엔프리제의 얼굴이 사르르 풀렸다. 저 갭이 좋단 말이지. 내 앞에서만 저런 모습을 보여 주면 좋을 텐데.
“엔프리제.”
“네?”
“하고 싶은 게 있어요.”
“하고 싶은 거…?”
한 발자국 성큼 다가갔다.
이러면 사실 나도 설레니까 양날의 검이긴 하지만, 불시의 기습을 받은 엔프리제보다는 내가 더 정신을 차리고 있으니 괜찮다. 생각대로 엔프리제가 흠칫 몸을 굳혔다.
“내일, 엔프리제랑 같이 호수에 가서 배를 타고 싶어요.”
“배, 말입니까?”
“네. 저번에 갔을 때는 못 봤지만, 템버가 가르쳐 줬어요. 호숫가 근처에 작은 배가 있는 선착장이 있다고.”
아쉽게도 엔프리제가 이야기한 유람선을 타러 갈 순 없다. 내 체질을 노리는 이가 있다면, 이 고요한 저택에서 나가는 순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테니까.
물론 호숫가도 위험하긴 하지만….
그래도.
만약 내가 숨어 있는 귀중한 연구 재료를 노린다면, 다른 세력에게는 들키지 않게 조심할 거다.
보통 소설의 전개를 생각해 봤을 때 돈을 노리는 세력, 명예를 노리는 세력, 나라는 존재 자체를 노리는 세력, 내 힘을 노리는 세력 정도가 있지 않을까?
물론 보통 소설 전개가 이렇더라, 라는 생각만으로 말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집에 들어왔던 침입자와 지난번 호숫가의 습격자들은 다른 세력일 가능성이 크다. 침입자는 엔프리제의 부재를 틈타 곧바로 집 안에 들어온 반면, 호숫가의 습격자들은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나를 외부에서 기다렸다가 엔프리제와 함께 있는 상황에서 습격했다.
같은 세력이면 제대로 정보를 공유했겠지.
침입자의 세력은 이 저택의 정보를 다른 세력에게 알려지는 걸 피할 테고 습격자의 세력은 아마 내 위치를 정확히 모르는 것일 테다. 호숫가의 흔적은 엔프리제가 지워 버렸을 테니 어디서 전투가 일어났는지도 정확히 모를 확률이 높고.
엔프리제의 말로는, 이 저택은 대공저가 있는 넓은 부지 안에 있다고 했다. 호숫가에 가는 건 당일 아침 급하게 정해졌던 거니 분명 부지를 탐색하다가 나와 엔프리제를 발견하고 습격한 거겠지.
결론은, 그 습격자들은 내가 대공저의 부지 내에 있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모를 거라는 뜻이다.
응. 그러니 분명 호숫가에 가도 습격당할 일은 없을…걸?
“괜찮으시겠습니까? 거기는, 샤페릴에게는 그리 좋은 기억이 있는 장소가 아닌데.”
엔프리제가 걱정스럽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나도 좀 걱정되긴 한다. 한 번, 그렇게 큰 스트레스를 받았던 장소다. 소설이나 드라마를 보면 그런 장소는 트라우마가 되어 가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치솟는 모양이니까.
뭐, 근데 그래서 열이 난다고 해도 여차하면.
뭐, 흠흠.
그, 흠흠.
“괜찮아요. 그날 제대로 못한 피크닉을 하면 좋겠어요.”
“준비하겠습니다.”
내 음흉한 속셈을 알 리 없는 엔프리제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주변에 경보 장치라도 깔아 놓는 게 아닐까.
“그리고 또 하나 부탁이 있어요.”
“어떤 겁니까?”
“엔프리제의 취향을 알려 줘요.”
“취향…?”
“네. 여자 옷 중에선 어떤 옷이 좋아요? 머리는 어떻게 하는 게 좋아요? 화장은 진한 게 좋아요, 연한 게 좋아요?”
따발총처럼 질문을 쏘아 대자, 엔프리제가 살짝 입술을 벌린 채 멈췄다. 또 고장 났나?
슬쩍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자 얼었던 입술이 풀렸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보고 예쁘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예쁘다고 생각한 적….”
엔프리제의 눈동자가 내게 고정된다.
살짝 빨개져서 입술을 달싹이는 게 어째 나올 말을 알 것 같다.
“예쁘다고 생각한 게 저밖에 없어요?”
“…샤페릴, 당신은 정말로 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겁니까?”
또 정답이었나, 하. 역시 나야.
우쭐한 마음에 잘난 척 낮은 한숨을 내쉬며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물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다른 걸 이야기해 봐요. 한 번쯤은 있었을 거 아니에요? 이런 옷이 예쁘다든가, 저런 보석이 좋다든가.”
“없습니다.”
단언한다.
와, 단언해 버린다. 연인으로서는 꽤 기분이 좋은데, 동시에 연인으로서 되게 난감한 상황이다. 뭘 해도 좋아한다는 건 뭘 해도 그 이상이 되긴 어렵다는 뜻이니까.
“끙.”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십니까?”
조심스러운 물음. 하지만 거기에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정말로 없어요? 저 질투 같은 거 안 하는 편이라고 생각하니까 솔직히 말해 줘요. 누가 예뻤다거나 그런 거 말고 옷이나 액세서리 같은 거!”
“진짜로 없습니다. 애초에 다른 사람들이 뭘 입고 다니는지 관심도 없었고 뭘 두르고 다니는지도 흥미 없었으니까요. 제가 누군가를 관심 있게 본 건 당신이 유일합니다.”
…으, 으으으.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이야기하면 곤란하다. 매우 기분 좋지만 곤란하다.
“그럼 제가 입었던 거라도 좋아요. 과거의 저랑 몇 번은 마주쳤을 거 아니에요?”
“글쎄요…. 제대로 이야기한 적조차 없었으니까요.”
아니, 샤페릴에게 미움받을 각오로 납치 감금까지 했는데 제대로 이야기한 적도 없었단 말이야? 그런 것치고는 샤페릴 본인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샤페릴의 체질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잖아.
뭐야, 설마 스토커…!
“…아닙니다.”
“응?”
“제가 당신에 대해 뒷조사를 하거나 따라다니면서 알아본 게 아닙니다.”
“어, 저 방금 소리 내서 말했어요?”
아닌데,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아무리 최근의 내가 필터 없이 이야기하는 일이 늘어났다지만, 본인을 눈앞에 두고 스토커라고 부를 정도로 사회성이 파탄 나진 않았을 텐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건가!
“표정에 다 드러납니다.”
“표정에요?”
“네. 방금 저를…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보셨습니다.”
“헉.”
아니, 그렇게까지는 생각 안 했는데.
다만 그런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일걸. 아마도.
“샤페릴의 체질에 대해서는 따로 알려 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군데요?”
의외다. 혹시 자하인가? 으음, 아닐 것 같은데.
엔프리제는 그다지 자하를 신용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자하를 저택에 들일 정도로는 믿는다는 건….
혹시 그 뒤에 누가 있는 걸까?
“제 동복형제입니다.”
엔프리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