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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64화 (64/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64)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그동안 열심히 체력을 키워 온 이유. 그건 바로 지금을 위해서였다!

나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엔프리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책 빌려주세요!”

“책… 말씀이십니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엔프리제가 고개를 갸웃한다.

솔직히 뭐, 방에 있는 시간과 엔프리제의 서재에서 일하는 그를 보며 빈둥대는 시간이 비등비등해진 내가 이런 부탁을 하는 건 확실히 새삼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새삼스럽게 부탁을 했다.

“네.”

“얼마든지 보셔도 괜찮습니다.”

“빌려 가고 싶어서요. 제 방으로.”

“여기서 보지 않으시고요?”

의자가 하나뿐이었던 엔프리제의 서재에는, 이제 내 전용 의자가 하나 생겼다. 엔프리제의 것보다도 훨씬 더 무겁고, 덧댄 천이 푹신하고 부드러운 의자로. 최근엔 여기서 보내는 시간이 방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많아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서야 내가 알고 싶은 걸 알 수가 없다.

“엔프리제에겐 비밀로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요.”

“제게 비밀로요?”

엔프리제는, 불쾌해하기보다는 당혹스러워 보였다. 이렇게 당당하게 본인 앞에서 비밀을 만들겠다고 하니 화도 나지 않는 것일까.

“네.”

“무얼 알아보시려고….”

“비밀이라니까요?”

거참. 비밀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상대가, 무슨 비밀을 만들 건지 설명해 줄 리가!

가끔 이렇게 엔프리제가 고장 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짓궂은 마음이 치솟는다. 하지만… 평소엔 차분하게 내 어리광을 다 받아 주다가 한 번씩 이렇게 얼빠진 모습을 보이는 게 너무 귀여운 걸 어떻게 해?

“제가… 싫다고 하면 하지 않으실 겁니까?”

“으음.”

이 상황은 나쁘지 않다.

처음부터 내가 원했던 건 하나였다. 계속 여기에 감금된 채 이 좁은 천국을 누리는 것. 분명 이대로라면 나는 무난하게 내 목표를 이룰 수 있겠지.

하지만.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들어 엔프리제를 보았다. 그는 맑은 눈동자로 나를 들여다보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았다. 샤페릴이라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것을.

그 대신 나 따위를 주었다.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나. 샤페릴과는 너무 차이가 나는 나.

평생 나는 그에게 샤페릴을 돌려줄 수 없다. 그러니 다른 것이라도 주어야겠다. 그의 빛을 빼앗은 대신, 작은 촛불이라도 비춰 주어야만 내 직성이 풀릴 것 같다.

그걸 위해선 나에 대해서, 엔프리제에 대해서 더 알아야만 하겠지.

“아니요. 그러면 전 분명 더한 비밀을 만들지도 몰라요.”

비밀의 끝은 언제나 폭로이기 마련이다.

설령 한순간 숨긴다고 하더라도 분명 밝혀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찰나의 숨김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미 알게 된 지식은 지울 수 없는 것이니까.

“…알겠습니다. 원하시는 책은 얼마든지 보셔도 됩니다.”

“진짜요? 고마워요!”

나는 씩 웃고는 곧바로 책장을 향해 다가갔다. 미리 필요한 책의 키워드를 글자로 적어 익혀 두었기에, 그 키워드가 들어간 책은 모조리 꺼내 차곡차곡 내 의자 위에 쌓았다.

처음에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엔프리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걸 다 읽으실 겁니까?”

“네!”

왜 저러지?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넷….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올라가다가 열하나에서 멈췄다.

음, 일단 이 정도만 할까.

“제가….”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들 수 있어요.”

체력은 국력.

공부는 체력.

머리만 좋다고 공부를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엉덩이가 무거워야 공부를 잘할 수 있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은 일단 체력이 기본적으로 따라 줘야 한다. 그러니 아침 운동은 당분간 빼먹지 말고 열심히 하도록 하자.

“샤페릴, 무겁습니다.”

“어, 어! 만지지 마세요! 제 책 건드리시면 앞으로 스킨십 못 하게 할 거예요? 포옹도 금지예요!”

엔프리제가 또 고장 났다. 얼빠진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게 귀여워서 책을 들기 전에 쪽, 하고 손에 입을 맞춰 날려 주었다.

“당분간만 참으세요! 그럼 전 갑니다!”

생각보다도 훨씬 무거운 무게에 끙끙대며 책을 안아 들었다. 그러자 엔프리제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샤페릴.”

“네?”

불러 놓고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이 남자가?! 지금 나 팔 늘어나라고 그러는 거야, 뭐야?!

“엔프리제! 빨ㄹ….”

“얌전히 기다리면 포상을 주실 겁니까?”

…아, 어, 음.

왜 그런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날 바라보는 건가요. 사람 마음 약해지게.

이 남자, 어디서 과외 받나? 갈수록 요망한 행동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내가 못 참고 덮치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야?

“무, 무슨 포상이요?”

나도 모르게 꿀꺽 군침을 삼켰다. 아니, 이건 군침이 아니야. 그냥 침이 고인 거지.

입에 그냥 침이 고일 수도 있지, 안 그래?!

“…….”

슥 하고 내게 다가온 엔프리제의 기운에 떠밀려 왠지 모르지만, 뒷걸음질을 쳤다.

이게 바로 미남의 아우라라는 것인가. 내 의사와는 전혀 없이 멋대로 발이 움직인다. 게다가 심장도 엄청 쿵쿵거린다.

이러다가 터지겠는데…?

“엔프리제…?”

그의 손이 내 손 아래를 살짝 받쳐 든다. 별로 힘을 주는 것 같지도 않은데 훨씬 팔에 부담이 적어졌다.

다만 중간에 낀 손은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견뎌야만 하지만.

“당연히….”

엔프리제가 살짝 상체를 숙인다. 그 탓에 가까워진 얼굴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고정했다.

거 참, 그놈 참 잘생겼….

아니, 이게 아니라. 보통 이럴 땐 눈을 감아야 하나?! 아니, 포상을 뭐 벌써 달라고 하는 거야? 근데 보통 이럴 때 눈 감으면 남주가 슥 옆으로 비켜 가서 귀에다가 뭘 속삭이는 패턴이던데?

‘뭘 기대하는 거지?’라든가.

그러면 여주가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제 소원 하나 들어주시는 거 어떻습니까.”

…뭔가 김이 빠졌다.

망상을 끝내기는커녕 아직 클라이맥스에 가지도 않았는데 포상 이야기를 꺼내 버리다니. 엔프리제, 그러고도 네가 피폐물 남주냐?! 이럴 때 피폐물 남주는 그럴듯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일부러 오해할 만한 언행을 해야 하는 건데!

그래도 난 이게 더 좋긴 해!

김은 좀 샜지만! 아니, 조금 많이!

“소원이 뭔지에 따라서 달라요.”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됐어. 내가 설렜던 건 안 들켰을 거야. 이 남자는 가끔 자기 생각에 집중하면 거리 생각 안 하고 훅 들이치니까 심장에 나쁘다.

다음에 또 한 번만 더 고개 들이밀기만 해 봐. 확 뽀뽀해 버릴라니까.

…크흠, 결코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게 아니다. 엔프리제에게 이게 얼마나 위험하고 색기 넘치는 행동인지 알려 주기 위한 거라고!

절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야!

“아마도… 당신께서 조금 싫어하실 수도 있는 일입니다.”

“으음. 안 알려 줄 거예요?”

“네.”

이거, 그거네.

당신이 비밀을 만들었으니 나도 비밀 하나를 만들겠다! 유치해! 귀여워!

“제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분명… 당신께서 싫다고 하신다면 하지 않겠죠, 저는.”

그렇지. 그게 나와 엔프리제의 차이다.

나는 숨기지 않고 다 이야기하는 대신, 한 번 하겠다고 정한 건 계속 밀고 나간다. 엔프리제는 숨기다가 숨기다가 혼자 찔려서 말한 뒤에 내가 싫다고 하면 그만둔다.

이상하지, 엔프리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취향도 성향도 바뀌게 된다는 건가 봐. 분명 예전의 나였다면 그런 당신을 보며 ‘줏대 없긴’이라고 하거나 ‘여주가 싫어해도 밀고 나가야지!’라고 말했을 텐데.

지금은 그런 당신이 좋다고 생각해.

“그럼 알았어요.”

씩 웃자, 엔프리제도 날 따라 엷게 웃었다. 그게 너무 귀여워서 결국 일을 치고야 말았다.

그의 뺨에 살짝 입술을 댔다 떼어 내며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그럼, 얌전히 잘 기다리고 계세요.”

* * *

엔프리제가 정신을 차린 건 샤페릴이 나가고도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당신이란 사람은, 대체 어디서 그런 걸 배워 오시는 건지.”

샤페릴이 들었다면 ‘글로 배웠는데?’라고 속으로 대답할 질문을 던진 엔프리제가, 두 손으로 제 눈을 덮었다. 그건 달아오른 눈두덩을 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

눈에 선명하게 달라붙은 모습을 지워 내기 아쉬워서였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제 뺨에 입을 맞춰 주던 그녀는 천사는커녕 악마처럼도 보였다. 제 욕망을, 더러운 충동을 다 내뱉은 그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아니, 악마 같은 건 그녀의 짧은 입맞춤에 이토록이나 충동을 느끼는 자신일까.

“나는… 정말로 당신이 무서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누군가에게 애정을 갈구할 일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인정받고 싶었던 유일한 사람이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누군가를 여자로 보게 될 날이 오거나 사랑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섭다.

샤페릴에게 향하는 자신의 감정이 그녀를 다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녀를 속박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녀의 자유를 빼앗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자신이 그걸 즐기고 있는 건 아닐까.

“최대한… 빨리 당신을 여기서 꺼내 드리겠습니다.”

자유를 되찾은 날개로도 당신이 내 옆에 있어 준다면….

나는 당신의 날개를 지키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설령 그게 내 목숨을 바치는 일이 되더라도.

엔프리제는 엘마레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꾸욱, 강하게 주먹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후.”

낮게 심호흡을 한 엔프리제가 눈을 떴다. 그리고 샤페릴이 막힘없이 술술 빼내 간 책의 빈자리를 살폈다.

이 서재를 구성한 건 엔프리제였다. 그리고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다. 책의 종류대로 분류해 놓기도 했기에.

샤페릴이 빼 간 11권의 책 중 다섯 권은 요리에 관한 책, 네 권은 동물이나 식물에 관련된 도감이었다. 한 권은 동화책이었고 마지막 한 권은….

제국의 역사에 대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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