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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62화 (62/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62)

“어서 오십시오, 형님!”

엘마레는 얼굴 한가득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제 큰 형님을 맞이했다. 엔프리제 역시 그 얼굴에 옅은 미소로 답했다.

“엘마레, 갑자기 보자고 해서 미안하구나.”

“별말씀을요.”

엘마레는 옅은 놀라움을 감추며 큰 형님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그러자 엔프리제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이야기는 이미 들었지만, 꽤 많이 변하셨다. 여자란 남자를 이토록 변하게 만드는 것일까.

엔프리제는 언제나 날이 서 있었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 그 좁은 세계에 있는 것이라고는 단 셋뿐. 단 둘뿐이었던 세계에 엘마레가 들어간 건, 그가 여섯 살 무렵 때였다.

-형님…!

둘째 형님은 지겹도록 만났지만, 큰 형님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엘마레가 여섯 살이었을 때, 큰 형님은 이미 열여섯 살이었다. 주변의 그 또래인 형님이나 누님들은 모두 엘마레를 사랑해 주었다. 예뻐해 주었다.

그래서 당연히 큰 형님도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

처음으로 받아 본 적의는, 우연히 깨뜨린 컵의 유리 조각만큼이나 날카롭고 아팠다. 말도 필요 없다는 듯 자신을 노려보던 그 금색의 눈동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자신을 거부한 저것을.

-형님…! 형님…!

주위의 모두가 말렸다. 저분은 가까이 가셔도 될 분이 아니라고.

그때마다 엘마레는 그들에게 물었다.

-왜?

-그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안 됩니다.

직접 이유를 들려주진 않았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굳이 이유를 묻지 않게 되었다. 직접 들려주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곳은 질릴 정도로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제3 황자이신 엘마레 저하께서 엔프리제 저하를 쫓아다니신다지.

-뭐 하러 그런 피 도둑놈을.

-그런 놈, 저하라고 부를 필요도 없어. 황제 폐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황족으로 받아 주었으면 조용히 바닥을 기며 살 것이지, 무어 잘났다고 고개를 빳빳이 들곤.

-들었어? 얼마 전엔 제 검 실력을 뽐내기 위해 바르카 저하를 다치시게 할 뻔했다더군.

-감히! 적장자이신 바르카 저하를?!

엘마레에게는,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질릴 정도로 엔프리제를 쫓아다녔다.

-적당히 좀 하지. 날 진수라도 되는 것처럼 쫓아다니는 건.

-진쮸?

-…이상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쫓아다니지 말라는 뜻이다.

그 말이 뭐라고 설명해 주고 있었던 걸까. 그냥 무시하고 가면 그만일 텐데.

-형님은 착하네요. 착하다, 착하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친절하게 굴면, 그 사람은 자신을 칭찬해 주었다. 상냥한 분이시네요,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었다. 그걸 그대로 해 주고 싶었는데.

형님의 키가 너무 커서, 손을 뻗어도 허벅지에까지밖에 닿지 않았다. 그래서 허벅지를 토닥토닥 치며 웃어 주었다.

형님은, 어떤 얼굴이었더라.

그날 이후로 엔프리제는 엘마레를 쫓아내지 않게 되었다. 가끔은 검을 쥐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활이 서투른 엘마레를 위해 직접 활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너는 왼손에 지나치게 힘을 주어서 항상 잡는 게 비뚤어져. 이렇게 하면 좀 더 명중률이 올라갈 거다.

상냥한 형님.

주위의 사람들은 틀림없이 형님의 이런 점을 몰라서 그런 거다. 형님을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하지만.

-아이고, 이런. 죄송합니다, 황자 저하. 제가 감히 무례를 범해 버렸군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놀랐다.

그는 엘마레에게는 자주 찾아와 선물을 주며 웃어 주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엔프리제에게는 일부러 물을 쏟곤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도둑놈이라도 있나 해서 저도 모르게.

-괜찮소. 황자와 도둑도 구분하지 못하는 그대의 기척 감지 능력으로 기사단에서 계속해 나갈 수는 있는지 의문이지만.

형님은, 싸늘한 얼굴로 입술 끝만 올려 웃고 있었다.

-조심하도록. 그 눈먼 검이 동료를 베어 버릴지도 모를 일 아닌가. 아니면 제 목에 검 끝을 들이댈지도 모를 일이고.

그제야 알았다. 형님이 처음에 왜 엘마레를 밀어냈는지.

어렸을 때부터 사랑만 받아 왔던 엘마레는 모르는 세계가 거기에 있었다. 적장자임에도 정원을 나는 새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던 큰 형님.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시를 두를 수밖에 없었다.

괜찮다. 그렇다면 내가 형님의 곁에 있어 주자.

나만은 형님의 편이 되어 주자.

그렇게 생각했다.

선황의 명으로 황태자의 자리를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 왔을 때도 엘마레는 화를 냈다.

-왜 형님께서 물러나셔야 합니까? 형님이 적장자이신데!

사실 그 이전부터 이미 다들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엔프리제는 황태자가 될 수 없다는 걸. 다음 황제는 분명 바르카가 될 것이라는 것도.

왜냐하면 모두가.

바르카를 적장자로 취급했으니까.

알면서도 엘마레는 화를 냈다. 그리고 엔프리제는.

-그 누구도 날 적장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더러운 피 도둑놈에게는 너무 과분한 호칭이지. 조용히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아버지께는 감사드린다.

그런 남자라도.

자신의 적장자가 괴롭힘당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남자를 엔프리제는 아버지라 불렀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궁 밖으로 내보내 버렸으면 됐을 텐데. 황후에게 더러운 소문이 붙는 게 싫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체면 때문에 그랬던 걸까.

그 남자는 자신 역시 믿지 않는 거짓말을 했다. 엔프리제는 틀림없는 자신의 아이라고.

그러면서도 엔프리제가 받는 모욕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엔프리제를 모욕하고 바르카를 칭송하면 기꺼워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귀족들은 앞다투어 엔프리제를 욕했다.

결국 그 남자가 그 모든 상처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런데도 형님은 여전히 그 남자를 아버지라 부르는가. 아, 이 얼마나 상냥한 분이신지.

겨우 열 살짜리였던 엘마레조차 분노가 들끓었는데. 형님은 도리어 그 어떤 때보다 평온한 얼굴로 엷은 미소까지 내보이셨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선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프리제를 그냥 두지 않았다. 평온한 삶을 바랐던 엔프리제는 점점 더 날카로워져만 갔다. 때로는 엘마레조차 그의 쉼터가 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던 중 나타난 것이, 그녀였다.

살아 있는 성녀. 천사의 현신. 사교계의 꽃.

부르는 말은 많았지만, 그 모든 것이 뜻하는 건 하나였다. 그녀는 모두에게 사랑받았으며 모두를 평등하게 대했다.

심지어, 엔프리제마저도.

-청혼을 넣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감히 더러운 피 도둑이 무엇을 넘보겠느냐. 게다가 그녀는 약혼자도 있다. 그녀가 제 약혼자를 버리고 나 같은 놈을 택할 리가 있겠느냐.

엔프리제가 두른 가시가 가장 많이 찌르는 것은 바로 엔프리제 자신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형님은… 변하셨군요.”

“그렇게 보이느냐.”

“네. 아주 보기 좋아지셨습니다.”

엔프리제는 쑥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그 미소조차도 엘마레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자하에게 들었습니다. 요즘 두 분께서 아주 깨를 볶으신다지요.”

“…뭐 하러 그런 이야기까지.”

아니라고는 하지 않는구나. 그 모습에 흐뭇해진 엘마레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 같은 게 감히 그녀를 어찌,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분명 샤페릴이 기억을 잃지 않았더라면 이런 행복은 맛볼 수 없었겠지.”

가만히 눈을 감는 엔프리제는,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행복과 불안이 뒤섞인 얼굴.

“그렇기에 두렵다. 그녀가 기억을 찾게 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엔프리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엘마레는, 자하의 말을 떠올렸다.

-기억상실인지, 아니면 인격의 전환인지는 확실하게 알기 어렵습니다. 어느 쪽이건 스트레스 상황이 너무 극심해져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된 것이겠죠. 지금의 샤페릴 님은 현상에 만족하고 계십니다. 단언할 순 없지만 아마 원래대로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겠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말해 주는 게 좋을까? 하지만, 그러다가 만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나 기억이 돌아오거나 원래의 샤페릴이 돌아온다면?

그러면.

일이 복잡해진다.

아니, 차라리 그게 더 나을 수도 있을까?

엘마레가 잠시 고민에 빠진 사이 엔프리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샤페릴을 그 저택에서 데리고 나오려 한다.”

“네?”

의외의 말이었다.

조금 전의 불안이 왜 지금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걸까. 불안하다면 도리어 더 그녀를 숨기고 품에서 꺼내지 않아야 맞는 게 아닌가.

“이대로면 나는 평생 그녀의 기억이 돌아올 것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야만 하겠지. 그녀가 내게 달콤한 말을 해 줄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형님.”

“샤페릴의 기억이 사라진 건 나 때문이다. 그런 내가 그녀에게 사랑받는 건…, 본디 있어선 안 될 일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엔프리제가 괴로운 듯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꽉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주먹이 그의 두려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곁에 있고 싶다.”

큰 형님이 무언가를 이토록 확고히 구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구해도 구해도 주어지지 않던 것들에 의해 구하는 것 조차를 포기해 버렸던 엔프리제가.

이토록 단호한 말투로….

“샤페릴이 모든 것을 떠올린 후에도 내 곁에 있어 주겠다면 나는 평생 그녀를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칠 생각이다. 하지만 모든 걸 알고 날 떠나겠다고 한다면… 그것 역시 받아들일 생각이다.”

흔들리던 금빛의 눈동자가 한 곳만을 바라본다. 그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던 엘마레가 옅게 웃었다.

“형님께서 그걸 원하신다면.”

이래서는 곤란하다. 엔프리제는, 좀 더 샤페릴에게 집착하고 사랑을 갈구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져야만 했다.

그래야.

“저는 무슨 짓을 해서든 형님을 돕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도 이루어질 테니.

엘마레는 제 소망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 밀어 넣으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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