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61)
“엔프리제.”
“네.”
“엔프리제?”
“네.”
“엔프리제~.”
“네.”
하,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이런 염장질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현실에서는 ‘지랄을 떠네’라고 욕설을 날리고, 소설에서는 ‘그래, 너네 영원히 그렇게 살아라.’라고 축복의 말을 날리며 봤던 그 염장질을!
내가!
“이름 계속 부르는 거 안 이상해요?”
“…이상하진 않습니다. 다만 조금 쑥스러워서 심장이 두근거리긴 하는군요. 그래도.”
그래도?
표정도 달달하고, 타이밍도 그렇고. 뭔가 닭살 돋는 말이 나올 타이밍 같은데!
“샤페릴이 즐거워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수하겠습니다.”
…크으으.
어쩜 저렇게 말도 예쁘게 하지? 사실 첫 만남 때도 조금 생각했는데, 그때도 비아냥거림이 좀 약하다 싶었다. 사실은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하는 남자여서 그랬구나.
오구오구.
“그런데 샤페릴.”
“네?”
“가끔… 저를 굉장히 어린아이 대하듯 바라보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제 착각일까요.”
아니, 이 남자가? 누굴 변태로 만들려고?
“저, 어린애랑 뽀뽀하고 그런 여자 아니에요.”
“…….”
“저 지금 좀 서운할 뻔했어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너무 귀엽다는 듯이 절 보실 때가 있어서 물은 겁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귀여운 행동을 하면서 귀여워하지 말라는 건 폭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이제부터 엔프리제도 저더러 사랑스럽다거나 귀엽다고 하시면 안 돼요.”
“아니, 그건….”
“좋아한다고도 하면 안 되고 예쁘다고도 생각하면 안 돼요.”
“그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오, 바로 말이 통하는군. 역시 역지사지는 언제나 통용되는 법이지.
“저더러 엔프리제를 귀여워하지 말라는 건 방금 그런 거랑 동급이에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순순히 고개를 숙인 엔프리제가, 허리에 감은 손을 한층 더 힘을 주었다. 이제는 대놓고 글씨는 봐주지도 않고 끌어안고만 있지만 뭐….
이것도 나쁘진 않지.
사실 좀 좋긴 하다. 이래서 커플들이 더운데도 서로 껴안고 있고 막 그랬구나?
“이렇게 쓰는 거 맞아요?”
엔프리제의 이름과 내 이름을 써 봤다.
흘끗 살펴본 엔프리제가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외우시는군요.”
“하하하.”
내가 천재라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글자를 한글에 대입시켜서 외운 후에는 일사천리였다. 애초에 구문 구조 같은 것도 다 한글이랑 똑같은걸. 다만 아직 글자가 익숙하지 않아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나중에는 함께 책을 읽거나 글을 써 보는 것도 좋겠군요.”
오, 그건가. 규방 아가씨들이 시조 쓰고 그림 그리고 하던 그거. 나도 캔버스에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하면 재밌을 것 같다.
글씨와 달리 그림은 전혀 진전이 없지만.
아직도 사과를 제대로 못 그리는 수준이지만.
“…함께 외출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당신에게 더 많은 걸 보여 주고 싶습니다.”
많은 거라. 뭐, 사람 사는 세상 다 똑같지. 특별한 게 있을까?
그런 것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엔프리제랑 꽁냥거리고 있는 게 더 좋다.
“저랑 둘이 있는 건 재미가 없어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놀려 먹는 것도 원천 봉쇄 당했다.
이제 눈치가 빨라진 건지, 내가 너무 원 패턴인 건지 금방 이렇게 알아차려 버린다.
“다만… 당신과 더 여러가지를 해 보고 싶습니다.”
“흐음.”
내가 엔프리제랑 해 보고 싶은 것들….
저번에 못 해 먹은 샌드위치를 함께 만들어 느긋하게 호수를 바라보며 먹고 싶다. 음식을 해 주고 기뻐하면서 먹는 엔프리제가 보고 싶다. 엔프리제의 얼굴을 그려 주고 싶다. 엔프리제에게 책을 읽어 주고 싶다.
참 이상한 일이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 주는 건 질렸다고 생각했다. 너무 많이 해서 지겨워서 정말 지긋지긋했다. 늘 나 혼자만 참는 삶이 끔찍했다.
그런데 왜 엔프리제에게는 해 주고 싶을까.
분명 엔프리제가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겠지. 또 한 번, 아니, 늘 그 예쁜 미소가 보고 싶어서.
“당신과 함께 유람선도 타 보고 싶군요.”
“유람선이요?”
“네. 이웃 나라까지 느긋하게 갔다오는, 한 달 일정의 유람선입니다.”
“한 달이나 배 위에 있으면 지겹지 않을까요?”
으음, 하긴. 배 위에 있나 방 안에만 있나 다를 건 없긴 하지. 그러면 차라리 방이 낫지 않을까…?
“당신에게 더 넓은 세계를 보여 주고 싶습니다. 분명… 즐거워하실 테니까요.”
음, 집순이들 특징이긴 하지. 막상 나가면 재밌어하는 거.
유람선이라.
내가 읽은 소설들에도 종종 유람선이 나오긴 했지. 다만 상당수가 19라서 그런가, 아니면 유람선 배경인 소설이 유독 그런 쪽이 많은 건지 모르겠지만.
으음, 완전히 동물의 왕국이었지….
하긴, 생각해 봐. 한 달간 배 안에 갇혀 있는데 사람들이 뭘 하겠어? 바다나 풍광을 보는 것도 정도껏이지 한 달을 바다만 바라볼 순 없는 노릇이잖아.
그럼 뭐, 할 게…. 흠흠. 그런 거밖에 없지 않겠어?
“유람선은 좀 너무 이른 것 같아요. 우린 아직, 거기까진 좀.”
아직 우리 진도 키스까지밖에 안 나갔는데. 크흠.
“연극도 보러 가고 싶군요. 샤페릴은 이야기를 좋아하니 분명 재미있어할 것 같습니다.”
오페라라든가 뮤지컬 같은 건 한 번쯤 직관해 보고 싶긴 했다. 늘 영상으로만 봤었으니까.
실제 무대로 보면 더 박력 있으려나?
“그건 저도 가 보고 싶어요.”
“좋아하실 것 같았습니다.”
엔프리제가 살짝 눈을 감더니 내 목덜미에 이마를 묻었다. 분명 결대로 만지면 되게 부드러웠던 머리카락이, 이상하게 목덜미에 닿으니까 까끌까끌하다.
몸속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든다.
“엔프리제?”
“빨리 당신을 여기서 내보내 드리고 싶기도 하고, 평생 여기 가둬 두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여기서 나가서 다른 남자를 만나시게 되면…, 저 같은 건 잊으시는 게 아닌가 싶어서.”
흐음.
왜 주인공들이 늘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가 싶었는데, 이런 거 때문이구나. 나도 그런 편이라 이해가 가긴 한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이 혼자 따로 노는 문제들이 있는 법이다.
옳은 예일지는 모르겠지만, 내 나름대로 예를 들자면 공포증 같은 것이다.
소설에 많이 등장하는 공포증 중 하나가 폐소공포증이다. 좁은 공간에 들어가면 극심한 공포감과 긴장감을 느끼는 증상인데, 그로 인해 엘리베이터도 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직장이나 집이 저층이라면 문제없지만, 고층이라면 출퇴근만으로도 엄청난 시간을 소요해야 할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왜 시간 낭비를 하냐’라든가 ‘엘리베이터가 떨어지는 사고 같은 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라든가 ‘요즘은 그런 대비가 잘 돼 있으니까 걱정할 것 하나 없다’라는 말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 사람들이 몰라서 못 타는 걸까?
절대 아니다.
알면서도 되지 않는 게 있다. 누군가는 자신의 경험으로 인해 두려움이 생겼을 것이고, 누군가는 어릴 때 엘리베이터에서 너무 뛰는 바람에 협박성 멘트를 들어서 그게 트라우마가 됐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저 미지의 공포를 품고 있는 것뿐인지도 모르고.
다만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이성적인 충고나 조언뿐 아니라 다른 것들이 필요할 것이다. 기다림이나, 격려. 그리고 항상 옆에서 믿음을 주는 사람 같은.
“으음, 제가 엔프리제를 잊을 수 있을까요? 제 첫… 점막 접촉을 가져가신 분인데.”
씩 웃자, 엔프리제의 얼굴이 빨개진다.
하지만 사실 나도 센 척하는 것뿐이지 입술이 달달 떨린다. 목덜미에 와 닿는 엔프리제의 머리카락이 계속 거슬린다.
“서로가 서로에게 첫 연인이기도 하고.”
“…그건 아닙니다.”
…응?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의 샤페릴에게는 별로 의미 없는 이야기입니다.”
있잖아, 엔프리제.
니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그냥 네, 그렇습니까? 하고 넘어갈 것 같니…?
이상하다. 분명히 키워드에 동정남 있었는데? 동정녀…는 있었던가 없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설마 샤페릴에게 연인이 있었던 건가?
그럼 왜 그 남자가 샤페릴을 구하지 않았지? 왜 엔프리제가 구한 거야?
…설마 그 남자한테서 뺏고 싶은 사심도 들어 있었던 건가, 이 감금에는?
“…….”
“…….”
슬쩍, 엔프리제를 째려보았다.
순순히 자백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아 눈빛 레이저를 발사했으나 홱 고개를 돌려 버린다. 다른 스킨십이나 달콤한 말로 얼버무리지 않는 건 좋지만.
“말 안 해 줄 거예요?”
“모르셔도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말했어요?”
“…….”
툭, 하고 떨어진 엔프리제의 머리가 어깨를 무겁게 누른다. 대체 뭐지.
“당신을… 속이는 제가 치졸하고 비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샤페릴은 늘 제게 모든 걸 말해 주지 않습니까.”
앗, 아니. 모든 건 아닌데…?
가급적 거짓말을 안 하려고는 하지만.
절대 들켜서는 안 되는 거짓말을 품고 있다.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의심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평소 다른 걸 다 진실로 말하면 된다.
하지만, 미안해, 엔프리제. 그게 내가 항상 진실을 말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런데 전… 여전히 겁쟁이라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못합니다.”
왜 엔프리제는 스스로에게 결벽을 강요할까. 아마 분명히.
주위에서 그를 더러운 피 도둑놈이라고 불렀던 것이 원인이겠지. 그런 말을 듣다 보면 저도 모르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니까.
내가, 내가 그런 취급을 받는 게 당연했던 것처럼.
엔프리제.
당신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 당신은 알까. 당신은 내가 어둠 속에 있었음을 알게 해 준 사람이야. 나도 당신에게 그냥 빛이 아니라….
당신이 있던 곳이 어둠이었을 뿐 당신 스스로가 어둠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는 존재였으면 좋겠어.
“저는 겁쟁이인 엔프리제도 좋아해요.”
“정말입니까…?”
“그 겁이 날 너무 좋아해서, 내가 떠나지 말았으면 해서 나온 거잖아요. 그런 주제에 내 탓은 못 하고 자기 탓만 하는 당신이 너무 좋아요.”
씩 웃고는 몸을 돌려 그를 껴안았다.
그의 목에 팔을 휘감아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면서 생각했다. 아무래도, 알아봐야겠어.
샤페릴의 과거에 대해서.
엔프리제가 내게 감추고 싶어 하는 것들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