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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60화 (60/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60)

가랏, 플리!

목에 감겨 있던 플리를 풀어 내 엔프리제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갑자기 두둥 하고 나타난 새하얀 귀염둥이에 역시나 엔프리제는 말문이 막혔다.

플리는 어딘지 뾰로통한 얼굴로, 당장이라도 할퀼 기세로 엔프리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스읍.

귀여운 거랑 귀여운 걸 더하면 왕 귀여운 게 된다고 했었나.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거구나.

…아니, 이럴 때가 아니고!

“제발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네.”

뭔가에 홀린 듯 엔프리제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귀여움의 마법은 어디에나 통용되는 법. 잘했어, 플리!

나는 플리를 다시 내 목에 걸고 살살 이마를 쓸어 주었다.

“일단, 저는 강제로 끌려 나간 게 아니에요. 제 의지로 샌드위치에 낚, 아니, 어…. 대공님이랑 외출하고 싶어서 나간 거라구요.”

샌드위치에 낚였다고 하면 뭔가….

여주인공으로서의 포지션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아마 대공님이 말 안 했어도 언젠가는 제가 졸랐을지도 몰라요.”

이건, 반쯤은 거짓말이지만.

아마도 나는 내버려 두면 계속 이 저택 안에만 있겠지. 굳이 따지자면 거의 방. 90% 이상 방에서만 생활할 자신이 있다.

사실 95%도 가능할 것 같다.

“제가 열을 낸 건…, 뭐, 사람이 죽는 걸 눈앞에서 바로 봤던 게 영향이 있었던 건 맞아요.”

잔혹한 광경이었다.

분명 엔프리제의 검 실력이 좋았기에 그 정도에서 끝났겠지. 사투라도 벌였다면 엄청난 광경이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런 것과 무연한 세계에서 살던 내게는 충격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근데 그것뿐만은 아니에요. 단지… 저는 기억을 잃은 후에 어딘지 현실감이 없는 매일을 보내고 있었어요.”

뭐, 책 속 세계라는 생각에서였지만.

그건 말할 필요 없겠지.

“그도 그럴 게 눈을 떴더니 저는 묘한 상황에 처해 있고, 갑자기 엄청 잘생긴 남자가 나타나서 막 저한테 뭐라고 하잖아요. 심지어 기억이 없다니. 그 모든 게 현실 같지 않았어요.”

엔프리제는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요 며칠 계속 피하던 내 눈도, 제대로 똑바로 봐 주고 있다.

“그런데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니까… 갑자기 확 현실감이 들더라구요. 나도 마력 생성이 심해져서 저렇게 죽을 수 있겠구나. 그냥 열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무서워져서 열이 난 거예요.”

순간, 등골을 타고 공포가 올라왔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매달리듯 엔프리제의 허리를 껴안았다. 팔 가득 느껴지는 온기와 단단함이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기왕 끌어안은 김에, 싶어 살짝 얼굴도 기대 보았다.

그러자 계속 축 늘어진 채 있던 엔프리제의 팔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내 어깨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저 때문입니다.”

“아니에요. 그건 제가…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자업자득인 거죠.”

죄책감이었던 걸까, 당신을 괴롭힌 건.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이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당신이 나를 밀어내지 않게 하는 데에.

“대공님이 옆에 없었으면 저는 아마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그건….”

입을 맞추는, 그 행위만이 아니다. 나는 분명 엔프리제가 아니었더라면….

내 스스로 그런 행위를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대공님이 좋아요.”

“샤페릴….”

내 어깨를 끌어안는 힘이 더 강해진다. 목에 휘감긴 채 가만히 있던 플리가 쪼르르 몸을 타고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뭔가 불편했던 걸까.

그대로 내가 채 닫지 못한 서재 문틈으로 나가 버렸다.

그 뒤를 쫓아야 한다는 생각과 제대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만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플리의 영리함을 믿어 보기로 했다. 평소에도 나 몰래 쥐 잡으러 다녔다고 하니 분명 제대로 방에 돌아오겠지.

하지만 엔프리제는 이대로 내가 나가면 또 뭔가 오해할지도 모른다.

“예전처럼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때는 사람으로 좋아했고, ㅍ….”

아니, 잠깐. 로판에 팬심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나?

뭔가 달리 표현할 말이….

어, 빨리 생각해 내, 이 멍청한 머리야!

“ㅍ, 표출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신앙심과도 같은 애정을 품고 있었어요!”

이게 무슨 소리야!

나도 모르겠어. 내 머리는 글렀어.

하긴 그러니까 일이 이 사태까지 흘렀지.

하, 어쩔 수 없지. 이게 내 한계인 걸 어쩌겠어.

“하지만 지금의 좋아한다는 말은 좀 달라요.”

“어떻게… 다르다는 말씀이십니까?”

기대감. 그럴 리 없다는 체념.

엔프리제의 말에서 그 두 가지가 뒤섞여 느껴진다. 나는….

당신의 기대감을 채워 줄 수 있을까?

“대공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요.”

“…어떤 걸 알려 드리면 좋을까요.”

“그런 게 아니라. 대공님에 대해선 뭐든 알고 싶어져요. 대공님의 어릴 때 이야기도 더 알고 싶고, 어린 대공님도 보고 싶고, 대공님이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거 다 알고 싶어요. 대공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고 싶고, 나를 보면서 억누른다는 그게 다 무엇인지도 알고 싶어요.”

이렇게 누군가를 알고 싶어진 건 처음이다.

내가 스스로 바라서 누군가에 대해 물은 것도, 그 사람의 마음에 들지 못할까 봐 안절부절못한 것도. 그 사람이 떠날까 봐 두려웠던 것도.

엔프리제, 당신이 전부 처음이다.

“대공님이 보여 주려다 만, 상체 어디엔가 있을 마력 통로의 문양도 보고 싶어요. 대체 근육이 어떻게 붙었길래 사람 몸이 이렇게 단단한가 눈으로 확인도 해 보고 싶고.”

아, 잠깐. 이건 좀 너무 갔나?

또 성희롱으로 빠졌나?

“대공님이 어떻게 하면 저를 싫어하게 되지 않을까. 내 어떤 걸 좋아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대공님이 계속 날 좋아해 줄까. 그런 것도 너무 궁금해요.”

내 말이 이어질수록 엔프리제의 떨림이 강해진다. 제대로 듣고 있어?

나는 이만큼이나 당신을 좋아해.

“대공님과 더 닿아 있고 싶고 사실 하루 종일 끌어안고만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아요. 좀 더 안아 줬으면 좋겠고, 좀 더 나랑 시간을 보내 줬으면 좋겠어요.”

“그 말씀은….”

오, 알아들었나 보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귀엽다. 온통 빨개진 얼굴도.

그리고 열에 들떠 잔뜩 맛봤던 입술도.

“제, 그, 몸을…, 좋아하신다는….”

응?

“그런… 의미일까요?”

지금 내 말의 어디를 어떻게 이해하면 그렇게 되는 걸까?

전부를 알고 싶다고 했고, 보여 주지 않았던 몸의 문양을 보고 싶다고 했고, 근육도 궁금하다고 했고, 스킨십 더 하고 싶다고….

응?

“아니, 아니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제 몸에라도 흥미를 보여 주신 건… 감사할 일이지만, 저는 당신과 그, 몸의 대화만 나누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 어어어?!

내가 그렇게까진 이야기 안 했잖아?! 언제 몸의 대화를 나누쟀어?

그냥 좀 안고 있고 싶다거나, 스킨십을 하고 싶다 그랬지!

황당한데 말이 안 나온다. 너무 황당하면 사람이 말문이 막힌다는 게 진짜였구나. 입을 뻐끔거리면서도 그의 배에서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았다.

어라.

“놀리시는 거죠?”

“조금….”

“왜 하필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짓을 하시는 건가요!”

놀랐잖아!

진짜 놀랐잖아!

내가 약간, 19금을 좋아하긴 하지만! 센 키워드도 좋아하긴 하지만! 그런 묘사를 즐기면서 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어?! 몸으로만 보는 그런 변태는 아니란 말이다!

“죄송합니다. 지금 조금… 당신께서 저에게 짓궂게 하셨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너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그만.”

이건 복수였나.

나도 그 마음을 알긴 하지. 엄청 귀엽지. 당황하는 얼굴이 뭐랄까, 계속 보고 있고 싶은 욕심이 들 만하지. 이해는 하는데!

지금 나름대로 일생일대의 고백을 하던 참이었는데, 뭔가 맥이….

“나머지는 제가 이야기하게 해 주시겠습니까?”

“네?”

“레이디 리베테.”

그가 살며시 날 뒤로 밀어내더니,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서재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옆얼굴을 비췄다. 어둠도 삼켜 버릴 것 같던 검은 머리카락이 따스한 빛에 감싸여 반짝거린다.

금색 눈동자는, 눈이 부시지도 않은지 오직 내게만 고정되어 움직이질 않는다.

“당신을 레이디 리베테도, 당신도 아닌….”

그의 손이 살며시 내 손을 잡는다.

평소라면 이거 뭔지 안다며 호들갑을 떨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고요하다. 들뜨지 않는다.

기쁘지 않은 게 아니라, 이 순간이…

너무 선연해서.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대답하기 전에 저도 하나만 이야기해도 돼요?”

“말씀하십시오.”

이미 내 대답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금색의 눈동자가 예쁘게 휘어졌다. 그건, 너무나도 밝고 반짝여서 달이라고 부르기엔 어딘지 부족한 감이 있었다.

당신의 눈에서 태양이 빛나는 것 같다.

아니, 태양이 빛나고 있다.

누군가를 마음에 품으면 세상이 바뀐다는 건 거짓말인 줄 알았다. 세상에 색채가 바뀌어 보인다는 것 역시. 세상은 이미 색으로 가득 차 있는데 뭐가 달라진다는 걸까.

하지만 지금 알았다.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을 인정하고, 그걸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세상은 이토록이나 아름답고 찬연했다. 당신이라는 존재 하나가 내 전부를 바꾸었다.

그렇구나. 이게 사랑이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엔프리제, 당신도 나와 같은 세계를 보고 있을까? 당신의 세계 역시 내 세계처럼 빛으로 충만해졌을까?

“저한테도 허락해 주실래요? 대공님이 아니라, 당신을….”

엔프리제가, 가볍게 잡고 있던 내 손을 살며시 고쳐 잡는다. 손끝만 잡고 있던 그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로 파고든다.

그저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혔을 뿐인데.

왜 이토록이나 얼굴이 뜨거워질까.

엔프리제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얽은 내 손을 제 입술로 가져갔다.

“불러 주세요, 샤페릴. 저를…. 제 이름을.”

“…엔프리제.”

그는….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선연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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