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59)
흐음…. 엔프리제가 또 이상하다.
“플리, 엔프리제가 왜 그럴까?”
예전에 쑥스러워하거나 자신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할까 봐 나를 피하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뭔가 흔들림이 없다.
그런데 눈은 마주치지 않는다. 설혹 마주치더라도 금방 피해 버린다. 하지만 곤란해한다거나 당황해하는 게 아니라 담담하게 하던 이야기를 마저 끝마친다.
최근 자주 하던 스킨십도 줄었다. 글자 공부를 할 때면 백허그를 한 채 글자를 가르쳐 주는 일이 많았는데, 그것도 하지 않는다. 이제 익숙해져 그렇다기엔 바로 며칠 전까지도 그랬는데.
스킨십이 확연하게 줄어든 건, 그때부터다.
내가 엔프리제를 유혹했던 밤.
“…혹시 토라진 건가?”
아니, 그랬다면 좀 더 얼굴이나 행동에 티가 났겠지.
그럼 화가 난 건가? 그렇게 유혹해 두고 혼자 잠들어 버려서? 하지만 템버는 엔프리제가 그날, 내 방에 새벽까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 역시 얼굴에 티가 났을 거라고 본다.
그럼 뭘까.
뭣 때문에 갑자기 날 멀리하는 걸까.
설마.
“기분 나빴나…?”
몰래 했을 때의 스릴과 처음으로 샤페릴과 입을 맞춘다는 희열을 이미 맛본 엔프리제다. 근데 내가 너무 적극적으로 달려들어서 그러니까 팍 식어 버렸나?
겨우 그 정도에 애정이 식는다고? 너무한 거 아냐?
하지만, 생각해 보면 빙의물의 경우 원작 남주들의 행동이나 마음이 바뀌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 내 행동이 샤페릴답지 않아서 마음이 식었을지도….
그럼 저렇게 담담한 것도 이해가 가긴 한다. 내게 이제 별 감정이 없다는 뜻이 될 테니까.
“…플리.”
“삐?”
“역시 변하지 않는 마음은 없는 걸까?”
소설이 현실이 되면 역시 이렇게 되는 걸까.
원작을 좀 더 읽어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샤페릴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엔프리제의 마음이 왜 변하지 않았는지 알아두었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까.
“…하긴.”
톡, 하고 플리의 코를 손끝으로 쳤다. 플리가 파닥파닥하며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 댔다. 귀여워서 피식 웃고는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거짓은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쳤어도 샤페릴을 흉내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사교계의 꽃. 성녀. 그렇게 불리었던 샤페릴은 틀림없이 사랑스러운 사람이었겠지. 원래 캐릭터 용모는 캐릭터의 성격을 표현하잖아.
그녀는 분명 이렇게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을 거다.
내가, 그런 그녀를 밀어내고 몸을 차지했다고 해 봤자 결국 알맹이는 나다. 처음부터 당연한 수순이었던 거다.
다만 엔프리제가 뭘 오해한 건지, 나를 예전의 샤페릴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덕분에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덤벼드니 환멸을 느낀 거겠지. 더럽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그래도 엔프리제는… 날 버리진 않겠지.”
엔프리제는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다. 자신의 마음이 식었다는 것에 도리어 죄책감을 느끼고 내게 잘해 주려 하겠지. 다만 내 체질이 해결되면 그때는 날 내보낼 것이다.
자유롭게 샤페릴을 놓아 준다는 미명 아래.
나에게는 그게 지옥의 시작인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지금까지, 아니, 내가 최소한 목숨을 부지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라도 날 여기에 두어 주는 것에 감사해야겠지. 다만, 모르겠다.
나는 견딜 수 있을까?
처음으로 마음을 주었다. 내가 마음속 어딘가에서 벽을 치고 있던 친구들보다, 도와준다는 걸 민폐 끼칠 수 없다는 말로 사양하며 선을 긋고 있던 친구들보다도 훨씬 가까웠다. 엔프리제에게는 뭐든 부탁할 수 있었고, 어리광을 부릴 수 있었다. 마음을 죽이지 않고 뭐든 다 이야기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내 모든 걸 털어놓은 건 처음이었다.
내 생애, 다시 이런 사람을 만날 날이 올까? 분명 없겠지. 이건 욕심을 부린 내게 내려진 벌일지도 모른다.
“얌전히… 있는 걸 가장 잘했는데.”
욕심내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어차피 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여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언젠가 내가 가야 할 곳이 있다고 믿으며.
그렇게 얌전히 있는 걸 가장 잘했었는데.
욕심이 점점 커졌다. 나와 엔프리제는 같다.
모를 때는 괜찮았다. 그런 행복이 있다는 걸 모를 때는 꿈조차 꾸지 않았다. 왜냐면, 그런 게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몰랐으니까.
물론 소설이나 만화, 드라마 같은 곳에서는 많이 봤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상의 이야기였잖아. 주인공들의 이야기였잖아.
주인공이 아닌 나의 인생은 분명, 엑스트라로 나와 화면 끄트머리에 겨우 걸려 있다가 사라지는 그런 것이었겠지.
하지만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주인공의 인생을 알아 버렸다. 세상에 이런 행복이 있다는 걸 알아 버렸다.
더 많이, 더 많이.
그렇게 바라게 되는 게 잘못인걸까. 나만 그런 걸까.
“분명히 잘못이었던 거겠지.”
엑스트라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벗어나고 싶어 했던 것도. 손에 들어온 행복에 들떠서 멋대로 휘둘러 댔던 것도.
원래 욕심쟁이들은 가진 걸 다 뺏기기 마련이야. 욕심쟁이 개라는 동화도 그랬잖아.
“플리, 나는….”
어쩌면 좋을까, 이제.
…….
…….
……!
에라잇, 이렇게 있는 건 나랑 안 어울린다!
혼자 생각해 봤자 내 사고 안에서만 계속 헛된 답이 맴돌 뿐이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랬잖아. 나는 몇 번 더 같은 잘못을 반복할 생각이야?
뭐가 진짠지 알고 싶으면 평소대로 하면 되지!
“플리, 가자!”
“끼우?”
어디로, 라고 묻는 것처럼 플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씩 웃으며 플리를 내 손에 올린 후 외쳤다.
“엔프리제 방으로!”
* * *
“대공님!”
벌컥 하고 힘 있게 서재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섰다. 무언지 알 수 없는 종이 한 뭉치를 들고 있던 엔프리제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당신께서…, 왜 여기에…?”
어, 데자뷔인가? 비슷한 장면을 저번에도 본 것 같은데.
“대공님을 만나러 왔어요.”
“저를요…? 조금 전에 만나지 않았습니까. 혹시 하지 못한 말이 있으셨습니까?”
“네!”
평소와 다름없이 대답하려 했지만, 사실 꽤 많이 떨린다. 목에 감긴 채 가만히 날 들여다보고 있는 플리를 한 번 쓰다듬은 후 심호흡을 했다.
…간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네, 말씀하십시오.”
보고 있던 종이 다발을 내려놓은 엔프리제가 자리를 비켰다. 그리고 난 이번에도 의자에는 앉지 않았다.
“왜 갑자기 절 피하시는 거예요?”
“제가…? 전 피한 적이 없습니다.”
“전 피하신다고 느꼈어요.”
성큼, 엔프리제의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그는 은근슬쩍 책장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일은…, 제가 왜 당신을 피하겠습니까.”
“그게 궁금해서 왔어요. 왜 절 피하시는 거예요?”
무언가를 말하려던 엔프리제가, 내 눈을 보더니 꾸욱 입을 다물었다. 아마 지금의 변명으로는 내가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겠지.
하지만 이렇게 서먹서먹한 매일을 보내는 건 싫다.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되는 것도 싫다.
“제가 이제 싫으세요?”
“무슨…!”
“제가 막, 대공님 못 가게 붙잡고 먼저 입 맞추고 해서 싫으셨어요? 환멸 나신 거예요?”
“절대 아닙니다! 왜 그런 생각을…. 제가 당신께 그런 걸 느낄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눈을 피해요? 왜 저랑 닿는 걸 피해요? 왜 지금도 절 피해서 뒤로 가는 거예요?”
책장 쪽으로 방향을 잡은 엔프리제의 패배다. 내가 다가갈 때마다 그도 물러섰지만, 어느 순간 등이 막혀 더는 물러설 데가 없어졌다. 그렇다고 옆으로 휙 빠져나가는 건 내 말을 긍정하게 되는 거니 하기 힘들겠지.
이윽고 나는, 책장에 달라붙어 선 엔프리제의 허리 양옆을 두 손으로 짚어 퇴로를 막아 버렸다.
“잡았다.”
“저기, 정말로 저는….”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요. 정말로 나 안 피했어요?”
금색의 눈동자와 1초 정도 눈이 마주쳤다. 입을 열던 그가 홱 하고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귓바퀴는 여전히 새빨갛다.
저걸 보면…, 아직 날 좋아하는 건 같은데.
“제가 싫어진 게 아니면 왜 피해요?”
슬쩍, 오른손 쪽으로 몸을 밀며 빠져나가려 들기에 아예 바짝 붙어 버렸다. 꽉 끌어안은 채 놔주지 않을 기세로 그를 보자 엔프리제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한숨을 쉰다고?!
“어떻게 제가 감히 당신을 싫어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신은….”
나는, 뭔데.
나는 당신의 뭔데. 알고 싶어.
그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다시 홱 하고 고개를 돌려 버린다.
“제가… 제가 나가자고 하는 바람에 당신께서 또 위험한 꼴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응?
“제가요?”
“그렇게 심하게 열을 내시는 건 처음 봤습니다. 분명… 약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었겠죠. 하지만 저는 당신께 닿을 용기조차 제대로 내지 못해서….”
그건 엔프리제 잘못이 아닌데.
그건, 내 잘못인데.
“대공님.”
“저는…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께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도록, 제 분수를 넘어서지 않도록….”
“대공님?”
“조심하겠습니다. 앞으로는… 당신과 적당한 거리를….”
“엔프리제!”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이, 조금 전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혼자 땅 파고 있던 내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너무 큰 소리를 내서일까. 아니면 그의 앞에서, 그의 이름을 불러 본 게 오랜만이라서일까. 아니면 엔프리제의 심장 소리가 옮아온 걸까.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쿵거린다.
“…….”
엔프리제는, 오랜만에 새빨간 토마토 같은 얼굴이 되어 날 보고 있었다. 나와 같은 이유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나는, 왜 이렇게 당신이 궁금한 걸까.
“그날, 대공님은 제가 납치당하지 않게 지켜 줬잖아요.”
“아니요. 처음부터 나가지 않았더라면….”
아, 또 땅 판다.
이대로 두면 아까의 반복이 다시 일어나겠지. 나는 일단 그의 말문을 막아 주기로 했다.
“당신이 위험한…?!”
엔프리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