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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58화 (58/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58)

“…….”

아침이다.

열은… 없다. 체온은 재지 않았지만 상당히 열이 끓었었는데.

그걸 받아 준 건….

흐린 시야 속으로 보이던 엔프리제의 얼굴. 언제나 귀엽게만 보이던 그의 다소 사납고, 거칠던 얼굴이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엔프리제는 곁에 없었다.

조오금 서운한 마음도 있는데, 그래도 얼굴 봤으면 되게 민망했을 것 같아서 다행이다 싶긴 하다.

“…응?”

몸을 일으키려는데 뭔가가 거슬린다.

무언가가 목을 누르고 있다. 길고 따스한 무언가가.

설마, 싶어서 손으로 목을 더듬었더니.

“플리…?”

어찌나 곤히 잠들었는지 내가 건드리는데도 안 일어난다. 조심스럽게 들어서 베개 옆에 두고 몸을 돌렸다. 쪼꼬만 게 나름대로 코 고는 소리까지 내면서 잘 잔다.

귀여워 가지고.

콕콕, 하고 찔렀지만 여전히 꿈쩍도 않는다. 기절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러고 나중에 멀쩡히 일어나는 걸 몇 번이나 봤기에 최근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장난은 좀 치지만.

“……!”

퍼드득, 하고 긴 몸이 움직인다. 쬐끄만 손가락이 쫙 펴졌다가 오므라든다. 이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조그마한 손가락. 꼴에 다섯 개가 다 형태를 갖췄다.

내 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작은 손.

“플리이.”

“……!”

또 퍼드득. 지금은 얕은 잠을 자고 있는 걸까.

내가 깨웠나 싶어서 미안한 마음에 살살 머리와 목을 쓰다듬어 준다. 마사지하듯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몇 번 더 쓰다듬어 주자 더는 몸부림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또 깨울까 봐 조심조심 일어나 침대 가에 앉았다.

“…….”

엔프리제는 지금 뭐 하려나.

어제 그러고 잠들어 버려선…. 하긴 원작에서도 매번 그, 씬을 치르고 난 뒤의 샤페릴이 까무룩 기절하곤 했었지. 얼마나 절륜하길래 매번 기절을 시켜! 라고 생각했는데.

살금살금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저택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평화…. 호숫가….

어제를 떠올리자 자동으로 떠오르는 끔찍한 장면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샌드위치 하나도 못 만들어 먹었네. 재료 뭐 들어 있었을까. 엔프리제가 과일, 치즈, 햄 같은 게 들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런 걸로 그렇게까지 무거워지나?

“…일단 주방에라도 가 볼까.”

목도 좀 마르고.

템버를 부르면 되긴 하지만, 플리를 깨우고 싶진 않다. 저렇게 잠들면 몇 시간은 기본으로 자긴 하는데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니까….

조심조심 방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복도 역시 조용하다. 템버는 주방일까? 아니면 어딘가를 청소하고 있는 걸까.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사슬을 차고 있을 때는 맨발이었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슬리퍼를 신게 된다. 수희였을 때 끌고 다니던 삼선 슬리퍼와 달리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신발 바닥은 의외로 얇다. 다른 건 그렇게 불편한 걸 못 느끼겠는데 슬리퍼는 좀….

역시 슬리퍼는 삼선인가.

푹신한 카펫 위를 따라 걷다 보면 고소한 냄새가 나는 곳이 나온다. 오늘 아침은 쌀과 채소를 넣은 죽인가. 어제 내가 열을 내서 소화가 쉬운 걸로 만든 것 같다.

맛있겠다.

예전엔 죽을 싫어했다. 무미에 가까운 그 맹맹한 맛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템버의 손이 닿으면 묘하게 맛있다. 간도 충분히 잘 됐지만, 채소와 쌀에서 엄청난 감칠맛이 난다. 쌀이 이렇게 달달한 곡식이었나 싶을 정도로 폭발적인 단맛이 터져 나오고, 그걸 채소의 단맛과 시원한 맛이 뒷받침을 해 준다.

아, 큰일 났다. 배고프다.

기분 나쁜 광경은 냄새에 밀려 사라지고 남은 것은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뿐. 일단 들어가서 물부터 좀 마시자.

“어머, 아가씨!”

불 조절을 하며 냄비를 보고 있던 템버가 놀라서 달려온다. 주방에 들어온 건 처음인데….

생각보다 내가 알던 주방이랑 비슷하다.

가스레인지인가, 저거? 이 시대에도 가스가 있는 건가? 싶었지만 가스선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저것도 마법 도구겠구나.

문득 이 소설에 빙의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이라는 게 있는 세계인 덕에 현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누릴 수가 있으니까. 요즘은 의외로 마법 설정이 없는 로판이 많은데.

“템버, 저 물 좀 주세요.”

“절 부르시지….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플리가 제 목 위에서 자고 있더라구요. 혹시 깨울까 봐서요.”

헤실헤실 웃으며 답하자 걱정으로 물들어 있던 템버의 얼굴도 맑게 개었다. 그녀는 엷게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까 아가씨 상태를 보러 들어갔다가 봤어요. 플리가 걱정되었는지 아가씨 옆에서 자고 있던데…. 어쩌다 목까지 올라갔나 봐요.”

“워낙 가벼워서 깨고 나서야 알았어요.”

“후후, 신기하죠. 그 작은 녀석이 쥐를 그렇게 잘 잡다니.”

예전에 족제비 한 마리가 쥐 수천 마리를 잡아먹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솔직히 안 믿었었는데 지금의 플리를 보면 좀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조그만 게 먹는 걸 어찌 그리 많이 먹는지.

그래도 날카로운 송곳니를 반짝거리며 고기를 옴뇸뇸 먹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스민다. 성격 사납고 난폭한데 저렇게 귀엽다니. 사기 캐릭터란 말이지.

“아 참, 내 정신 좀 봐. 그럼 아가씨, 일단 응접실에서 쉬고 계시겠어요? 그리고 물을 가져갈게요. 다른 건 더 필요한 거 없으세요?”

“네. 근데 저….”

템버가 의아한 듯 나를 본다. 필요한 건 없다면서 뭔가를 더 말하려는 내가 이상했겠지. 그래도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대공님은…, 그….”

“전하께서는 새벽에 아가씨 방에서 나오신 후에 아직 밖에 나오질 않으셨어요. 슬슬 아침 식사를 하셔야 할 시간이긴 한데…. 아가씨께서 깨워 주시겠어요?”

혹시 아파서 앓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템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전하의 방으로 물을 가져가도록 할게요. 방 위치는 알고 계시죠? 아가씨 방에서 세 번째 문이에요.”

“네. 고마워요, 템버.”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뭘.”

웃으며 배웅해 주는 템버를 뒤로하고 복도로 다시 나왔다. 저택 2층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내 방에서 세 칸 떨어져 있는 방. 여기서부터 가려면 계단을 올라 바로 왼쪽에 있는 방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거기가 엔프리제의 방이구나.

1층에 있는 서재에는 가 본 적 있지만, 방에 가 보는 건 처음이다. 이게 뭐라고 긴장되지.

후.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계단을 올랐다.

* * *

엔프리제는 제 팔로 눈을 가린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밤을 꼬박 샜지만, 잠이 오기는커녕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샤페릴은, 괜찮을까.

괜히 그녀를 기운 나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에 밖에 나갈 것을 권했다. 그 카운가의 침입자 뒤에 누가 있는지 아직은 명확하지 않지만, 또 그자가 사람을 보낸 걸까?

아니, 설마.

샤페릴이 기억을 잃고 여기에 머물기를 희망하게 된 것은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수의 사람밖에 모른다.

자신. 시녀인 템버. 주치의인 하로웰. 약사인 자하.

그리고 막냇동생인 엘마레.

템버와 하로웰은 오랫동안 엔프리제와 함께해 온 이들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들이 자신을 배신할 이유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이 납치의 뒷사정도, 샤페릴의 체질에 대해서도 모두 설명했기에.

그들이 돈이나 명예 따위에 샤페릴을 팔았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협박을 당한 거라면, 글쎄. 확언하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엔프리제가 리베테 가문의 참극이 있었던 밤 거기에 있었다는 걸 아는 건, 샤페릴이 여기 있다는 건 역시나 다섯 사람뿐이었다.

애초에 템버는 계속 자신들과 함께 있으니 바깥과 연락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그렇다면 엘마레와 자하일까?

아니, 그것도 생각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리베테 가문의 참극에 대해 알려 준 것은,

-형님, 큰일 났습니다.

-왜 그러느냐, 엘마레. 너답지 않구나.

-리베테 가문이 위험합니다. 오늘 밤 저택은 불타고 그곳의 영애, 레이디 리베테는….

엘마레였으니까.

엘마레가 알려 주지 않았다면 애초에 샤페릴을 구해 낼 수도 없었을 터였다. 그런데 왜 엘마레가 샤페릴을, 엔프리제를 팔아 치울까? 그럴 이유가 없었다.

처음부터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그만인 것을.

엔프리제를 함정에 빠뜨릴 이유 역시 없었다. 그는, 아직 미혼인 바르카에게 혹여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황제에 즉위할 왕제의 위치에 있었고….

엔프리제는 그 권력 구조와 아무런 상관없는, 그저 찌꺼기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러니 엘마레의 사람인 자하 역시 믿을 수 있었다.

즉, 카운가의 뒷배가 샤페릴이 여기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 방법이 없었다. 유일한 침입자는 이제 거의 말을 하지도 일어날 수도 없는 몸이니까.

여전히 살아는… 있지만.

애초에 베르디라는 그 남자에게 이 저택의 이야기를 꺼낸 건, 반응으로 보아 제레닉 드 카운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뒤에 숨어 있는 존재를 드러내지 않기 위한 것이었겠지.

그러니 입을 연다고 하더라도 뒤에 있는 자에게까지는 닿을 수 없다. 그렇다면 굳이 입을 열게 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쉬이 죽여 줄 마음도 없었다.

“…샤페릴.”

만약 카운가의 뒤에 있는 자가 다시 움직였다면, 다시 카운가를 이용하려 들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자는 샤페릴을 ‘구해 내고’ 싶은 것 같으니까. 이런 거친 방법을 쓸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일까.

새로운 습격자는.

어떻게 이 저택을 알아냈는지, 혹은 이 주변을 알아냈는지는 모르겠다. 여기에 친 결계는 어떤 마법사의 고유 마법이라 다른 마법사가 찾아내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다만, 일단 그 모든 것을 미뤄 두고 습격자의 구성을 생각해 보면.

“마탑이 움직였나.”

가장 샤페릴을 원할 이들이었다.

이 사태가 되기 전에 빠르게 바르카와 접촉하고 싶었다. 여차하면 바르카에게 샤페릴의 신병을 양도할 생각까지 했다.

마탑과 교회, 그리고 반군까지.

그 모든 세력을 견제하기엔 대공이라 해도 엔프리제의 힘은 너무나 미력했다.

“당신을 지킬 수만 있다면….”

하지만, 다시 알현 요청을 할 수 없는 건 왜일까. 카운가의 습격자의 뒤에 바르카가 있다고 의심하면서도 제대로 조사해 보지 않는 건 왜일까.

엔프리제는, 언제나 그렇듯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뭐든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이기적인 나는 당신이 내 곁에서 웃기를 원해. 바르카의 곁이 아니라.

바르카를 의심하고 있는 동안은, 바르카에게 협력을 구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조사를 해서 그 의심이 걷히면… 자신은 샤페릴을….

놓아야만 한다.

“…미안해요, 샤페릴. 미안해요.”

당신을 놓기 싫어서 이토록 미련을 끄는 나는.

정말로….

쓰레기 같은 놈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엔프리제는 옅게 미소 지었다. 다만, 그건 최근 그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던 부드러운 미소가 아니라….

언제나 그가 스스로를 비웃을 때 짓던 자조의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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