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56)
셰리는 지금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역시 말이라는 건 함부로 해선 안 되나 봐요.”
대비해야 한다는 말을 하자마자 이럴 줄이야. 엔프리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샤페릴,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고개를 끄덕이고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엔프리제가 보는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셰리가 경고를 보낸 곳은 엔프리제가 살피고 있다. 저쪽에 누군가가 있는 건 확실하지만, 이쪽은 또 모를 일이다. 없으면 다행이지만, 있으면 대비해서 나쁠 건 없다.
“…….”
엔프리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내게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겠지. 다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긴장감만은 열기가 되어 전해지고 있었다.
지금 말을 걸면 분명 방해가 되겠지.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될 수도 있고. 저번에 호신술 배우겠다고 마음먹어 놓고 왜 아직 안 배웠을까.
이번엔 진짜 배워야지.
미래는 미래고, 지금은 눈곱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나는 일단 숨을 죽였다. 내 숨소리조차도 그에게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삐리리- 삑! 삐리리리-! 휘이이이! 삐릭! 삑삑!”
셰리의 울음소리가 더 다급해진다.
저건 경고겠지. 누군가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다만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조심스럽다. 그리 빨리 가까워지진 않는다. 그게 우리를 경계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길을 잃은 사람일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왠지 전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옵니다.”
계속 긴장한 채 움직이지 않던 엔프리제가 허리의 검을 뽑았다. 새하얀 검신이 머금은 햇빛이 어딘지 싸늘해 보였다.
“……!”
엔프리제가 몸을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가 풀숲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내 뒤쪽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엎드려!”
대답할 여유는 없었다.
재빨리 몸을 웅크리자 내 키보다 아슬아슬하게 위쪽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화살이 지나친다.
풀숲에서 튀어나온 남자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엔프리제가 화살을 위에서 아래로 쳐 냈다. 그러자 불화살은 흔적도 없이 공중에 흩어졌다.
마법.
이번엔 마법사가 섞여 있다.
“샤페릴! 눈을…! 큭!”
엔프리제의 자세가 흐트러진 틈을 타 또 다른 남자가 수풀에서 튀어나왔다. 그리 풀이 무성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저리도 튀어나오는 것일까.
조금 전의 화살만 봐도 이자들은 내게 상처를 입힐 생각은 없어 보인다. 목표는 오로지 엔프리제 하나뿐인 것 같다. 차라리 내가 빠져 주는 게 엔프리제가 움직이긴 편할지도 모르지만….
이 남자들의 목적이 샤페릴의 납치라면, 내가 떨어지는 순간….
“샤페릴, 눈을 감아요!”
눈? 왜?
흘끗 엔프리제를 보자, 그는 두 남자의 검을 힘겹게 받아 내고 있었다. 아니, 여유롭게라고 해야 하나?
남자들에게 시선을 주는 게 아니라 나한테 주고 있다.
왜 눈을 감으라는 거지? 깊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일단 눈을 감고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엔프리제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으윽…!”
“큭!”
내가 눈을 감기가 무섭게 고통 섞인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엔프리제의 목소리?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알면서도.
나는 눈을 뜨고야 말았다.
“샤페릴!”
마치 꾸짖는 듯한 고성.
그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아, 이래서 엔프리제는 내게 눈을 감으라고 했구나.
나를 지킬 자신이 있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껏 남자들의 검을 받아 낸 이유는 이 광경을 내게 보여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소설이나 만화에서는 다소 뭉뚱그려 표현하거나 일부러 초점을 다른 곳에 비춰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는 광경. 조금 전까지 평화롭던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초록을 붉게 칠해 버린 무언가. 상처 사이로 삐져나온….
“샤페릴! 눈 감아요! 보지 마!”
보면, 안 된다고는 생각한다.
내 마력 과잉 생성이 심해지게 되는 요인이 극심한 스트레스라고 했었지. 나는 분명 이 뒤에 크게 열을 내게 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굳어 버린 것처럼.
시선이.
“젠장!”
엔프리제는, 보이지 않는 마법사를 경계하면서 내게 다가왔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지듯 앉아 멍하니 눈을 뜨고 있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시야가 가려진다.
“샤페릴, 진정해요. 괜찮아요. 당신은 내가 지킬 테니까.”
아니, 그게 아니다.
죽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엔프리제는 분명 모든 남주가 그렇듯, 여주를 지키기 위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겠지. 그리고 나와 엔프리제는 무사히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가 달라지겠지.
“마법사….”
“네?”
“마법사가… 아직 남았어요.”
나는 눈을 감았다.
끈적이는 장면이 눈꺼풀 안에 달라붙는다. 드디어.
드디어 내가 어떤 세계에 있는지 현실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끊어졌다.
* * *
처음 빙의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손에 든 아이처럼 들떴다.
어떤 장난감으로 예를 들어 볼까.
그래, 예를 들면 인형의 집.
그건 너무 예뻐서, 마치 동화 속의 집처럼 느껴져서 그 안으로 들어가 살아 보고 싶다고 상상한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바라던 대로 인형의 집 안에 있는 인형 중 내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한 인형이 되어 있었다.
이걸로 어떻게 놀아 볼까. 이것의 기능은 뭐지? 어떻게 놀 수 있지? 무엇을 할 수 없지? 그 안에서 가장 재미있게 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머리는 이 새로운 장난감을 어떻게 가지고 놀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특이한 상황이 즐겁고 재미있어서 어쩔 줄을 모르며 들떠 있다.
나는 하나하나 해 보고 싶었던 것을 해 본다. 가장 예쁜 방의 침대에서 공주님처럼 차려입고 자 보기도 하고, 다른 인형들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모형 치킨을 먹기도 한다. 귀여운 가구들을 내 마음대로 옮겨 보기도 하고 장난감 책을 보기도 한다. 그렇게 구성품을 가지고 놀다가 문득 인형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몇 개의 인형이 있었다.
그럼 이걸로 역할 놀이를 해 볼까? 너는 잘생겼으니까 아빠 해. 너는 예쁘니까 엄마 하고, 너는 좀 심술궂어 보이니까 악당이야. 제일 순해 보이는 너는 아기를 하는 게 좋겠다.
겉으로 보이는 걸로 인형들의 역할을 나누고, 때로는 일부러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역할을 준다. 가만히 살펴보니 인형에는 특징이 있었다. 그 특징들을 발견하는 것도 꽤 재밌었다.
그렇게 놀이를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바로 인형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인형이 말도 하고 움직였거든.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이 원래부터 수행하던 역할에 맡게 움직였을 뿐. 다만 내게 맞춰 줬을 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모든 것을 어디까지나 장난감 회사의 프로그래밍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인형과 노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생각한다.
설령 프로그래밍된 인격이라고 하더라도 이 아이는 그 성격으로 살고 있다. 프로그래밍된 세계 안에서 평범한 인간처럼 고민하고,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헤매면서.
이건 정말로 인형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그리고 끝내 깨닫고 만다.
결국은 나도 인형의 집 안에 있는 인형이었음을.
멀리서 남 일처럼 봐 왔던 것들이 사실은 현실이었다. 내가 역할 놀이 하고 있다고 생각한, 내 역할을 하는 인형은 나 자신이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지만, 그토록 바라던 상황이 되었으니 즐겨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바삭바삭 부스러진다.
나는 사실 여기서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여기가 내 현실인 것이다.
남의 일이 아니라.
샤페릴의 일이 아니라.
내 일.
“샤페릴…”
샤페릴이 아니라 내가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잡히면 샤페릴이 아니라 내가 실험을 당하는 것이다. 샤페릴이 천애 고아가 된 게 아니라 내가 천애 고아가 된 것이다.
내 앞에 있는 건…,
작가라는 이름의 신이 만들어 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진짜 사람인 것이다.
“바보, 같죠, 저….”
입이 마른다.
지난번의 미열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열기가 몸 안을 가득 채운다. 금방이라도 펑 터질 것 같은데, 그러면 편해질 것 같은데.
정말로 터지면 죽겠지.
내가.
왜 이 단순한 걸 지금까지 몰랐을까.
모르는 척한 게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실감이 없었던 것이다. 엔프리제에 대한 마음을 깨달으면서 실감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사람을, 남자로서 좋아하게 되었다고.
책 속의 인물이 아니라 진짜 사람으로 보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족했다.
마음 어딘가에서 나는 계속 샤페릴은 샤페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모든 불행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앞으로 그녀에게 벌어질 위험 역시.
남 일이라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반쯤 게임 감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소설을 보는 기분이었다고 해야 할까. 내게 닥칠 위험을 예상하면서도 큰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다. 나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다.
분명, 내 세계에서 같은 방식으로 사람이 죽더라도 같은 광경이 펼쳐질 것이라는 걸. 그제서야 나는 죽음이 두려워졌다.
이 좁은 천국은 종이 위의 세계가 아니라는 걸 겨우 깨달았다.
이제서야.
어리석게도.
“…….”
수건을 갈아 주는 엔프리제의 손이 다급하다. 열이 점점 오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거겠지.
나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니까.
이 지경이 되어서야… 현실을 알다니. 지금까지 들떴던 자신이 너무나 바보처럼 느껴졌다.
마치 광대 같다.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
“대공…님.”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나직하게 그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