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55)
이건 반칙이지.
그렇게 귀엽게 물으면 안 된다고 어떻게 거절해? 아니, 남주가 이렇게 귀여워도 되나요.
“그, 그럴까요?”
“당장은 아프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또 아플 수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아프시면 바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엔프리제가 살짝 내 팔을 들어 올렸다.
빙의한 초반에 열심히 몸 여기저기를 관찰한 결과, 샤페릴은 팔도 예쁘다. 다만 너무 가늘어서 좀 무섭긴 하다. 아, 이래서 과보호하는 건가.
좀 세게 꺾으면 부러질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 그래도 인체란 신비해서 생각보다 튼튼하다.
“…….”
거의 압력을 주지 않으며 팔꿈치 아래쪽을 짚어 보던 엔프리제가 살짝 힘을 주었다. 거의 괜찮다가 어느 한 곳을 건드리자 순간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나왔다.
순간 엔프리제는 손을 멈췄고, 나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보았다. 내 표정을 보던 그의 얼굴이 사르르 녹아내리며 미소로 바뀌었다.
아니, 이 남자가…?
내가 아프다는데 웃어?!
“여기가 아프신 거면 근육통인 것 같네요.”
눈을 가늘게 뜨며 불편한 심기를 표출한다. 크게 다친 게 아니라 기쁘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아프다는 데 웃어?!
아,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웃어?!
내 표정이 풀리질 않자 엔프리제의 얼굴에 초조함이 깃든다.
“많이 아프십니까?”
“아니요…. 많이 아픈 건 아니에요.”
“그럼 다른 곳도 같이 아프신 겁니까?”
“아니요. 거기만 아파요.”
“…….”
내 표정의 이유를 찾아내지 못해 안달이 난 걸까. 그가 딱 보기에도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본다.
그렇게 예쁘게 쳐다보면 내가…!
“아프다고 소리 질렀는데 웃으시길래 좀 기분 나빴어요.”
말해야지, 그렇지.
…아무리 생각해도 난 엔프리제한테 너무 약한 것 같다. 딱히 나한테 뭔가를 강요하지도 않고 때리지도 않고 욕하지도 않는데.
왜 이렇게 눈치를 보게 되는 걸까.
엔프리제도 그렇긴 하지만, 그건 날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고. 나는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다. 친구들이랑 있을 때도 분쟁을 일으키진 않았지만, 눈치까지 보진 않았는걸. 할 이야기는 다 했었는데.
아, 역시 그건가. 내 감금 생활이 이 남자의 손에 달려 있어서 그런 건가 보다.
“죄송합니다. 그건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알아요. 그냥 제가 많이 안 다쳐서 안심돼서 그랬다는 거. 아는데도 그냥 마음이 그랬어요.”
“아니요, 사실은….”
응? 이게 아니라고?
“죄송합니다. 소리 지르고 놀라서 절 쳐다보실 때… 너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
이 남자가 나한테 물드나. 가끔씩 심장 철렁이는 소리를 하네.
뭐라 대꾸할 말이 사라졌다. 아까 엔프리제도 이런 기분이었나 보다. 앞으론… 조심하자.
“살살 마사지할 테니 아프면 다시 이야기해 주십시오. 혹여 인대나 뼈 같은 곳이 상했으면 조심해야 하니까요.”
“…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엔프리제가 배시시 웃더니 살며시 아픈 곳을 피해 그 주변을 천천히 마사지했다.
많이 아프진 않지만, 살짝 당기는 느낌이 들긴 한다. 또 표정 찡그리면 엔프리제가 걱정할 것 같아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호수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셰리가 안 보이네.
“셰리는 어디 있어요?”
“셰리는… 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경계 기능도 있기 때문에.”
“흐음….”
경계 기능 같은 것도 넣을 수 있구나.
그럼 혹시….
“플리 말이에요.”
“네.”
“혹시 알림 말고 다른 기능도 있어요?”
“네.”
…역시?
그 조그만 게 침입자한테 덥석 덤벼들 때 알아봤다. 뭔가 호위 기능이나 그런 게….
“쥐 잡기 기능도 있습니다. 가끔 그 방에서 빠져나와서 집 주변의 쥐를 잡아 오더군요.”
“…….”
아니, 그건 족제비의 본능 아니에요…?
“아니, 그런 거 말고….”
“그 외엔 없습니다. 당신께서 제게 연락하고 싶으실 때 사용하시도록 알림 기능만 있는 아이로 데려왔으니까요.”
으음, 이 와중에도 엔프리제가 플리를 이거 저거 부르지 않게 된 게 조금 기쁘다. 내 말을 받아들여서 그렇게 해 주는 거겠지.
하긴 요즘 둘 사이도 나쁘지 않았지.
“근데 플리가 침입자한테 덤벼들던데요…?”
“그건 아마 그 아이 스스로 한 행동일 겁니다. 족제비는 원래 자기보다 몸집이 큰 동물, 예를 들어 토끼 같은 것한테도 덤빈다고 하더군요.”
아니, 토끼는 그나마 비슷하기라도 하지 인간은 아예 체급이 다르잖아?!
“…….”
그럼 그건 뭐 기능이 아니라는 건가. 만약 그런 거면 해제해 달라고 할랬는데.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엔프리제가 지켜는 주겠지만 분명 나랑 플리만 있을 때 또 침입자가 오는 사건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때도 또 덤비면 어떻게 하지?
그때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으면.
“…저기, 대공님.”
“네?”
“기능을 더 추가할 수도 있나요?”
“가능합니다.”
“뭐…, 자기 몸을 지킬 수 있는…, 뭔가 더 넣었으면 좋겠어요.”
잠시 생각하던 엔프리제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다친 게 걱정되셔서 그러시는 거군요.”
“네…. 뭐, 대공님이 지켜 주시겠지만! 그럴 리 없다고 믿고 싶지만! 그래도 사람의 일이라는 건 모르잖아요.”
잃고 나서는 늘 늦는다.
소설 속 주인공들을 보면서 생각한 게 있다. 왜 늘 미리 준비하지 않는 걸까.
물론 사건이 터져야 흥미진진해지고 긴장감이 있어야 카타르시스도 일어나는 법이다. 창작물이란 그런 재미가 있는 거니까. 하지만 나 같은 경우 너무 감정이입을 해서 그럴까?
그들이, 예쁘고 잘생기고 똑똑하고 무술 능력도 뛰어나고….
지들끼리 다 해 먹는 남자 주인공, 여자 주인공이 일어날 사태들을 예측해서 애초에 원인을 제거해 버리거나 그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을 때 홀로 답답해하곤 했다.
물론 다 척척 대비해서 해결하는 남여주를 보면서는 감탄의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작가님들마다 다른 글을 쓰는 건 존중한다. 나는 쓰라고 해도 그렇게 쓸 자신이 없다. 그래서 입만 살아서 말하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최소한 엔프리제가 다 지켜 줄 거라고 그냥 믿고 맡기기보다는 뭔가를 했으면 한다. 재발하지 않도록. 무언가.
어리석은 나는 예측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니까.
“확실히… 말씀대로입니다.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막지 못하는 것은 있겠죠. 제 마음대로 됐다면 당신께선 이미….”
라고 이야기하다 흠칫, 해서 말을 멈춘다.
왠지 알 것 같은데.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엔프리제는 약간… 뭐랄까. 솔직하지 못한 성격인데 솔직하다. 대의적인 명분을 내세우며 행동하다가, 그 속에 들어있는 약간의 사심을 스스로 눈치채고 들춘다. 그래 놓고 나는 나쁜 사람…, 하면서 가라앉는 타입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도 약간 그런 생각 하는 거 아닐까.
내가 빨리 자유롭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생활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자신이 어딘가에 있다고. 혹시 그 때문에 일이 더뎌지는 건 아닐까, 하고.
“있잖아요, 대공님.”
“네.”
“세상에 완전무결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게 세상에 존재는 할까?
모두가 완벽하게 좋아하는 것. 모두가 완벽하게 싫어하는 것.
온전한 1. 완벽한 0.
글쎄. 그런 게 있을까. 감정이든, 다른 것이든.
“그 어떤 인격자에게도 흠은 있기 마련이에요. 그 어떤 파탄자에게서도 장점은 찾으면 나오기 마련이에요. 누군가에게 장점으로 받아들여진 부분이 누군가에게는 단점이 될 수도 있고.”
하다못해 바퀴벌레조차도 그렇다. 모두가 더럽다고 싫어할 것 같았는데, 내 친구는 ‘가만히 보면 꽤 귀여워.’라는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었다.
하지만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 같은 경우, 천사채를 꽤 좋아했다. 사실 회보다도 그게 더 좋을 정도로.
할머니는 아마도 동생을 챙기기 위해 회를 젓가락으로 빨래 걷듯 걷어 동생 그릇에 옮겼겠지만, 그러고 나면 나는 그 밑에 깔린 천사채를 쉽게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오독오독하고 꼬들꼬들해서 식감이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친구들하고 횟집을 간 적이 한 번 있었는데, 다들 깜짝 놀라며 내게 시선을 집중했었다. 옆에 친구가 챙겨준다고 회를 접시에 담아 줬는데, 그건 두고 밑에 깔려 있던 천사채를 집어먹었기 때문이었다.
-야, 그런 걸 왜 먹어?!
-너…, 너 그런 거 먹지 말고 회 먹어, 회!
-언니들이 오늘 쏜다! 마음껏 먹어!
그게 아니라 정말로 천사채를 좋아한다고 설명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 친구 중에는 그게 먹는 거라는 걸 몰랐다는 아이도 있었을 정도였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누군가에게는 그냥 장식일 수도 있는 거.
그런 게 인생인 거 아니겠어?
그렇게 생각하자 친구가 이해가 갔다.
“대공님은… 저랑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시죠?”
“읏…, 아니, 그건….”
“전에 제가 그랬잖아요. 전 이대로 대공님이랑 평생 같이 있어도 좋다고. 그것도 진짠데. 그럼 저도 이기적인 거죠?”
이기적인 거 맞지. 하지만 나와 엔프리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면, 그걸 단순히 이기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신께서는… 그러실 수 있습니다. 저처럼 불순한 의도가 아니니.”
“저 불순한 의도인데요?”
말할 순 없지만, 지금의 생활이 너무 좋다. 데굴거리고 빈둥거리는 매일이.
그리고.
“대공님이랑 지내는 게 너무 즐거워서 나가기 싫은걸요.”
당신과 지내는 시간이.
엔프리제보다 내가 더 질이 나쁘다. 그가 샤페릴을 사랑한다는 걸 이용해서, 샤페릴이 아닌 내가 혜택을 보니까.
“그리고 좀 이기적이면 어때요? 생각만 하는 것뿐인데. 저한테 실제로 나쁜 짓을 하신 것도 아니잖아요?”
원작 샤페릴한텐 좀 했지만.
살리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설명 없이 그러는 건 나쁜 짓이었지.
“…당신은….”
씩 웃는 내게 엔프리제가 무언가 이야기하려던 찰나.
“삐리리-! 삐삑! 삐리리리- 삐!”
셰리의 울음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