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54)
으음.
집순이들의 특징 중 하나가 있다. 나오기는 더럽게 싫어하는데 일단 나오면 의외로 좋아한다.
집에 들어가면 역시 집이 최고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지금도 그렇다. 엔프리제랑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 것도 좋았고, 막상 나오니 생각보다도 시원한 바람에 기분이 좋아졌다.
“…….”
어떠냐고 묻지도 못하고 엔프리제는 흘끗흘끗 내 눈치만 보고 있다. 그가 펴 준 자리에 앉아 가만히 호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저는 수영을 할 수 있을까요?”
“네?”
수영은…, 솔직히 물이 무서워서 초등학교 때 이후로 한 적이 없다. 가라앉아서 물 먹은 게 몇 번이던가.
하지만 샤페릴의 몸은 다를지도 모르잖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날이 꽤 무더워서 그럴지도 모르고.
“물을 보니까 시원해 보여서요.”
이런 외딴곳의 호수라 좀 더…, 황폐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주변의 풀들도 많이 우거지지 않았고 호수 물도 맑다. 사실 투명도로만 따지면 그때 갔던 수영장의 물보다 맑은 것 같기도….
들어가면 시원할 것 같다.
“여기는 너무 깊어서…. 다음엔 수영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도록 하죠.”
“하긴 그렇죠.”
나중에 작은 연못 같은 거나 냇가 같은 게 있으면 거기서 시도해 봐야지.
“대공님은 수영 잘하세요?”
“저도 잘하진 못합니다. 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래요?”
의외네. 뭐든 잘할 것 같은데.
보통 남주들 보면 만능 아닌가? 하긴, 이런 남주도 있는 거겠지. 다 잘하면 또 매력 없으니까.
“대공님은 뭘 좋아해요?”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뭐든지 좋아요. 먹을 거라든지, 책이라든지….”
“그렇군요….”
엔프리제는 잠시 호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엔프리제는 이럴 때도 허리가 꼿꼿하구나. 자세가 굉장히 좋다. 무술을 배워서 그런가?
하늘하늘 불어오는 바람이, 그리 길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을 쓸며 지나간다. 사르르 흘러내리는 게 한없이 멍 때리며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 그동안은 눈동자에만 시선을 뺏겨서 몰랐는데 속눈썹도 되게 길다. 나뭇잎 그림자와 햇살이 어지럽게 얽히는 와중에 새까만 속눈썹이 어둡게 물들었다가 밝게 빛났다가 춤을 추는 것 같다.
한쪽 다리는 쭉 뻗고, 다른 다리는 살짝 무릎을 세워서 팔을 걸쳤는데 그것도 또 멋있다. 게다가 무릎을 세운 쪽은 바지가 살짝 팽팽하게 당겨져서 엉덩이가….
크흠.
어휴, 눈이 왜 자꾸 거기로 가지.
한 번 보기 시작하니까 자꾸 거기로 눈이 간다. 남자 엉덩이가 뭐 저렇게 예뻐? 이건 반칙이라고 본다.
“저기….”
“음?”
엉덩이를 보면서 대답하니까, 왠지 엉덩이한테 대답하는 기분이 든다. 치밀어 오르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자 엔프리제가 빨개진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어, 설마 지금 내가 어디 보고 있었지 알아챈 건 아니겠지?
“…….”
“…….”
엔프리제가 슬쩍 다리를 내린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엉덩이가….
아, 역시 눈치챘구나.
“죄송해요. 제가 나쁜 마음을 먹은 건 아닌데…. 대공님 엉덩이가 너무 모양이 예뻤어요.”
“…….”
“이제 안 볼게요.”
슥, 하고 손을 들어 올린 엔프리제가 손등으로 제 얼굴을 가린다. 아니, 저건 얼굴을 식히려는 건가.
“당신은… 너무 솔직한 건지 저를 놀리시는 건지를 모르겠습니다.”
“어, 솔직한 거죠, 당연히. 이런 걸로 놀리면 저 잡혀 가는 거 아니에요?”
성희롱 같은 걸로.
“진심이셔도…, 그, 그런 말은 그다지 하지 않으시는 편이….”
“으음. 조심할게요.”
물론 만지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눈곱만큼도 한 적 없지만, 확실히 진심이라고 하더라도 성희롱에 가까운 발언이긴 하지.
이번 건 내가 좀 너무 하긴 했다.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기분 나쁜 건 아닌데…. 그, 흠. 그런 이야기를 들은 건 처음이라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꼭 대답해야 하나. 변태! 같은 걸 외쳐 주면….
하긴 엔프리제 성격에 그럴 리가 없긴 하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 역시 엔프리제답긴 하다.
“일단 도시락을 꺼내도록 할까요?”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는 엔프리제를 위해 말을 돌렸다. 그러자 얇은 피크닉 매트 가장자리에 놓아두었던 바구니를 중앙으로 옮겨 왔다.
근데 원래 피크닉 할 때 이렇게 커다란 바구니가 필요한 건가? 대체 뭐를 얼마나 넣었길래 이런 크기가 되는 거지.
“윽!”
무, 무거워!
매트가 살짝 구겨졌길래 바구니를 살짝 들어 고치려 했는데 쉽지 않다. 아니, 엔프리제 이거 한 손으로 들고 오지 않았었나?
거의 20kg짜리 쌀 한 포대 되는 느낌인데?!
“아, 무겁습니다.”
그러게요?! 무지 무겁네요?
당신의 팔은 무쇠입니까. 딴딴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사실 진짜 철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겉은 상아색으로 도색한 거지.
인간에게 녹아들기 위해….
라는 뇌절은 그만하도록 하자. 무슨 SF 공상 과학 소설도 아니고.
“대공님이 한 손으로 가볍게 들고 오시는 것 같아서… 이렇게 무거울 줄은 몰랐어요.”
맘먹고 들면 못 들진 않겠지만, 가벼울 거라고 방심하고 들었던 게 문제였나 보다. 팔 관절이 욱신거린다.
살짝 눈살을 찌푸렸는데, 그걸 또 그새 봤는지 엔프리제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아니요?”
“…….”
빤히 내 눈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나도 모르게 슬쩍 팔을 뒤로 감추려 했다. 아니, 이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본능이라고.
그리고 안타깝게도 엔프리제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팔이 아프신 겁니까?”
“아픈 건 아니고…. 가벼울 거라고 생각하고 들었다가 생각보다 무거워서 조금 무리가 갔나 봐요.”
뭐, 이런 건 놔두면 낫는다.
원래의 나였다면 계속 집안일을 해야 하니까 파스라도 발라 두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얌전히 쉬면 되니까.
“좀 보여 주십시오.”
“괜찮다니까요?”
“나중에 염증이 심해지면 고생하십니다.”
“에이, 괜찮아요.”
“샤페릴.”
윽.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빤히 바라보자 왠지 너스레를 떨 수 없게 되었다. 이건 뭐지. 상태 이상기인가.
스턴기라도 걸린 것 같다.
“어느 쪽 팔이 아픕니까?”
“오른쪽이요….”
엔프리제가 조심스럽게 팔을 움직인다. 아래를 받쳐 주면서 움직여서 그런가. 뻐근하긴 해도 그렇게 아프진 않았다.
“살짝 팔을 뻗어 보시겠습니까?”
“이렇게요?”
힘을 주자 팔꿈치에 살짝 통증이 왔다. 찡긋, 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엔프리제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소매를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여름 원피스라 소매가 넓고 팔뚝 중간까지밖에 내려오지 않아 올리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엔프리제가 맨살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옷을 걷어 올렸다.
다시 팔을 잡고 조심히 살피더니 안도인지 뭔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오른손잡이시다 보니, 무게에 놀라 순간적으로 더 힘을 많이 주셨나 봅니다. 다행히 탈구되거나 한 건 아닌 것 같군요. 괜찮을 겁니다.”
“그게 보여요?”
뭐, 애기도 아니고 이 정도로 팔꿈치가 빠질 리야 없겠지만…. 그게 눈으로 확인이 되나?
“예. 팔꿈치가 아예 빠져버리면 눈으로도 보이니까요. 일단 조금 쉬면서 더 지켜보도록 하죠. 돌아갈 때쯤 다시 한 번 살펴야겠습니다.”
흠, 그렇게 과보호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런 게 아주 낯선 건 아니다. 가족들이야… 할머니도 동생도 내 건강 상태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아파도 내 책임이라는 태도였지만 친구들은 달랐으니까. 내가 팔이 부러져서 깁스하고 나타났을 때는 세상이 멸망한 줄 알았다.
평소에도 호들갑이 심한 친구 하나가 높은 비명을 지르고, 다른 친구들이 하나하나 다가오더니 어느덧 한 무리가 되었었지. 그리고 깁스한 걸 보고 왜 다쳤냐, 어쩌다 다쳤냐, 너 집에 가면 못 쉬잖냐, 차라리 입원을 해라….
여기저기서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언을 동시에 떠들어 대는 바람에 다 섞여서 좀 이상하게 알아듣기도 했었지. 그게 고맙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무언가 가득 차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었다.
내가 한 번도 받지 못한 그런 온기였으니까.
그런데 엔프리제가 하는 과보호는… 뭔가 또 다르다. 친구들의 과보호에 비하면 조용조용하고 침착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찡그릴 때마다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침울해지는 얼굴색도,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도, 괜찮을 거라고 말하면서도 나보다 더 덜덜 떨고 있는 손도.
그 모든 게 날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를 말하는 것 같아서 색다른 낯간지러움이 찾아온다.
“괜찮아요, 대공님. 별로 안 아파요. 조금 뻐근한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네. 하지만 앞으로 이런 건 저한테 시켜 주세요. 당신께서 혹시라도… 다치시는 건….”
아이고, 이러다 울겠네.
이 남자, 나를 어린 아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연약할 리가 없잖아.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러는 건가?
그건 좀 기분 나쁠 것 같은데.
아니, 그럴 리는 없나. 템버도, 엔프리제 스스로도 다른 이들과는 그다지 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으니까. 그러면 역시 샤페릴이라서, 나라서 이러는 거겠지.
…그건, 뭐. 어쩔 수 없나.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배어 나왔다. 그게 괜찮다는 표시라고 생각하는 건지 엔프리제의 얼굴색도 조금 밝아졌다.
“제가 애도 아니고,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런 건 나중에 마사지 좀 하면 나을 거예요.”
“당연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애라고 생각했다면, 그런….”
무언가를 말하려던 엔프리제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어쩐지 수상쩍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야,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런…, 뭐.
“그런, 뭔데요?”
“…마, 마사지라면 당신께서 스스로 하시는 것보다 제가 해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누가 봐도 말 돌리는 게 명백해 보이는데, 초조한 얼굴로 말하는 게 또 귀여워서 순간 태클 걸 타이밍을 놓쳤다. 그사이 엔프리제는.
“괜찮으시다면… 해 드릴까요?”
발그레 물든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