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53)
그 후에도 엔프리제는 이야기를 계속해 주었다.
글자를 깨우치는 건 그리 느리지 않았으나 교사들에게 계속 혼나는 통에 자신이 공부 머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라든가, 그래서 무술 실력을 갈고닦으려고 여러 무기를 섭렵했다는 이야기라든가.
마력 통로가 있다는 이야기에 처음으로 선황이 흥미를 가져 주었으나, 제대로 된 마법 하나 쓰기 힘들 정도의 마력 양이라는 걸 알고 그럼 그렇지, 라며 돌아섰다는 이야기라든가.
“대공님의 아버지를 나쁘게 말하고 싶진 않지만, 정말 나쁜 사람이네요.”
“그렇습니까?”
“내 눈앞에 있었으면 한 소리 했을지도 몰라요.”
“그랬으면 제가 당신을 말렸을 겁니다. 선황 폐하께서는 잔혹한 분이셨으니까요. 자신을 거스르거나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이들은 용서치 않으셨습니다.”
헉, 나 목 날아가는 건가? 조금 전에도 욕했는데?
새파랗게 질려서 목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듯 엔프리제가 낮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황 폐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는 안 계시니까요.”
…죽은 건가.
나는, 아직도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다. 운이 좋다면 좋고 나쁘다면 나쁜 거겠지.
할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거의 매일 ‘죽겠다’를 입에 달고 사신 분이었다. 이번 건강검진에서는 어디가 안 좋았다는 둥, 다음엔 어디를 검진받아야 하겠다는 둥. 처음엔 그게 정말인 줄 알고 할머니가 갑갑해서 속 터져 죽겠다고 하는 말에 놀라,
-더더 빨리 할게요…. 그러니까 죽지 마요, 할머니.
그렇게 말하며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다.
죽음이란 내게 언제나 미지의 것이었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에조차도.
“하지만… 그렇네요. 당신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조금 마음이 편안해지는군요.”
엔프리제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던 거겠지. 그런 대상이 죽었다는 건 다시는 인정받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도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을까.
“전 대공님의 전부가 좋으니까요.”
“…네.”
“머리카락은 가장 깊은 밤보다도 어두워서 좋아요. 그 어떤 빛보다도, 그 어떤 색보다도 짙어서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색이 좋아요. 마치 대공님 자신 같아서.”
내 허리를 감고 있는 손을 더 강하게 쥐었다. 당신이 내 말을 입에 발린 소리로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 모든 게 진심임을 알았으면 좋겠어.
“금색의 눈동자가 너무 좋아요. 전에 손톱에 색을 발랐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아요. 진짜 금보다도 반짝이고 태양보다도 밝고 예뻐요.”
당신이 싫어할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 당신의 외모는….
그런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한없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일 뿐이야. 그게 당신에게 상처가 될지 아니면 회복이 될지는 모르지만.
“대공님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엄청 뚜렷해서 예뻐요. 눈은 시원시원하고 코는 오뚝하고. 입술도 예뻐서 좋아요. 남자 입술이 뭐 이리 모양도 좋고 색도 예쁘대요?”
엔프리제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내 허리를 감은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거 알아요? 대공님은 귓바퀴도 예뻐요.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쑥 솟아 있는데 둥그스름한 모양이 얼마나 예쁜데요. 게다가, …앗.”
아니, 뭔가 막 뱉다가 잘못 뱉었다. 귓바퀴 이야기에서 멀어지고 싶은데…?
“게다가?”
아니, 지금까지 조용히 있다가 왜 거기서 갑자기 입을 여는데?!
“게, 게다가 밑으로 떨어지는 목선은 말할 것도 없죠. 피부도 하얘서 묘하게 계속 쳐다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요.”
색기 있다는 말은 좀 그렇겠지?
빨갛게 물들면 왠지 한 입 베어 물어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거나, 너무 길게 예쁘게 뻗어 있으니까 중간쯤을 냠 하고 물어서 흔적을 남겨 보고 싶다거나.
그런 건 남에게 할 말은 아니니까….
응.
“키도 훤칠하게 크고. 손가락은 또 얼마나 예쁜데요? 악기 같은 거 연주하면 진짜 넋을 잃을지도 몰라요.”
“악기…. 어떤 악기를 좋아하십니까?”
“다 좋아하죠. 대공님, 연주할 수 있는 악기 있어요?”
“…아니요. 하지만 당신께서 보고 싶으시다면 지금부터라도 배워 보겠습니다.”
…솔직히 외모 칭찬만 잔뜩 했지만, 역시 내가 당신에게 호감을 느낀 가장 큰 이유는 이거지.
“그래도 그중에서 제일 예쁜 건 성격이에요.”
“네?”
엔프리제의 목소리가 황당하다는 듯 갈라졌다.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걸 핑계로 삼지 않는 게 좋아요. 내가 싫다고 하면 바로 그만두는 게 좋아요. 고집쟁이면서 저한텐 솔직하게 구는 것도 좋아요.”
“그건… 당신께서 그러시니까요.”
“자기가 잘난 줄도 모르고 그러는 것도 좋아요. 사실 대공님이 모를 뿐이지, 다들 말을 못 할 뿐이지 저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걸요.”
“…저를 이렇게 좋게 봐 주시는 건 당신뿐입니다.”
“아니라니까요.”
너무 칭찬을 많이 해서 진심인 걸 몰라 주는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칭찬을 아낄 걸 그랬나?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인데 왜 몰라 주는 거야.
왜 닿지 않는 걸까.
“…샤페릴?!”
속상하다.
내가 당당하게 당신에게 나를 밝힐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내 경험을 이야기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엔프리제.
부모라는 존재는, 최소한 내게는 그랬어. 그들의 신경에 거슬리면 못된 애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면 착하고 어른스러운 애라고 불렀어.
내가 그들을 배려하면 당연한 거였고, 그들이 날 배려하면 희생이었어.
있잖아, 엔프리제.
나는 그렇게 생각해. 부모 자식의 관계도 사실은 남과 다를 게 없어. 그 사람들이 당신에게 무어라고 했건, 어떻게 했건 중요하지 않아.
세상에 있는 누군가는 당신에게 이토록이나 마음을 주고 소중하게 생각해. 내게 있어서 당신은 천국의 관리인이야. 당신이 있어서 내 천국은 시작되었고, 유지되었어.
그리고 당신이 사라지면 내 천국 역시 사라져.
“대공님. 대공님은… 제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에요. 대공님이 사라지면 제 삶의 중요한 게 사라질 정도로. 사람이 누군가에게 그런 소중한 존재가 된다는 건 엄청난 거예요.”
나는…, 당신은 내게 모든 걸 말해 줬는데도 나는 그것만은 이야기해 주지 못해. 내가 샤페릴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그러면 당신은… 나를 지킬 필요가 없어지니까.
나는 너무 이기적이야.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내게 숨기는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면서, 무언가를 숨기면 화를 내면서.
나는 당신에게 꼭 이야기해야 할 것을 이야기하지 않아.
당신이 알면 어떻게 할까. 분명 화를 내겠지. 분노하겠지.
그럼에도 날 죽이지 못할 거야.
내가 아닌, 샤페릴 때문에.
그런 내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위선을 위해서는 아니야.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도 아니야.
당신은 기억을 잃은 후의 나 역시 사랑한다고 해 줬어. 마음이 더 깊어졌다고 해 줬어. 그게 내게 얼마나 큰 구원이 되었는지.
이 이기적인 사람을 얼마나….
“울지 마세요. 당신이 울면….”
날 놓치면 내가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걸까. 엔프리제는 눈물을 닦아 주지도 못하고 그저 날 강하게 끌어안기만 했다.
한없이 이어지던 숲길이 끝나 간다.
대낮인데도 태양을 가려 어둑어둑한 숲길 사이, 시야의 끝에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태양의 빛을 반사하여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환한 빛이.
“전 대공님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얼마나 대단하고,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그걸 알아줄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할 거예요. 대공님이 질려서 제발 좀 그만해 달라고 해도.”
그렇게 중얼거리자, 대답하는 것처럼 엔프리제가 내 정수리에 자신의 얼굴을 살짝 비볐다.
* * *
“괜찮으십니까?”
“그만 물어보라니까요. 정말 괜찮아요. 저보다 도시락은 괜찮아요?”
말에서 내리기 직전.
엔프리제가 이미 눈치챈 것 같기는 하지만, 직접 우는 모습을 보여 주긴 좀 쑥스러워서 황급히 얼굴을 닦아 냈다. 하지만 눈덩이가 뜨끈한 걸 보니 분명 부은 것 같다.
망할.
엔프리제는 굳이 그걸 지적하지 않고 가만히 내 손을 잡아 말에서 내려 주었다.
“생각보다도 햇살이 더 세군요.”
“생각한 것보다는 괜찮은데요?”
한국의 여름을 견뎌 낸 나로서는 뭐, 이 정도면 견딜 만하긴 하다. 전에 템버가 흘리듯 말한 날짜로 생각하면 지금이 7월 중순쯤 될 것 같은데 이 정도면 괜찮지.
다만 덥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햇빛이 엄청나게 따갑지 않다는 것뿐이지.
“어디로 자리를 잡아 볼까요.”
“으음. 나무 그늘이 있고 바람이 살랑살랑 잘 부는 곳이요?”
숲 자체의 서늘한 기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기왕 밖에 나왔으니 바람이 좀 불었으면 좋겠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엔프리제가 한 손에는 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조금 걸으면서 찾아보도록 하죠.”
“네….”
움직이기 싫은데.
어릴 때부터 별로 밖에 나와 보지 않아서일까. 다들 한 번쯤은 가 본다는 흔하디흔한 해수욕도 나는 가 본 적이 없다. 그 탓에 초등학교 때 수영 수업에서는 난감했었지.
갑자기 수영 수업이 잡혔다는데, 나는 수영복 같은 걸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바쁘니 할머니와 사러 가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리고 할머니는, 뭐.
-수영복 같은 게 왜 필요하냐? 한 번 쓰고 말 것 그냥 옷 입고 하면 되지.
수영장에는 그냥 옷은 입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도 그날 수영 수업을 가서 알았다. 결국, 보다 못한 선생님이 수영장에서 수영복을 돈 주고 빌려 입혀 주어 겨우 수업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수영의 기억은 최악이었지만.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서 그런가. 아무리 몸에 힘을 빼도 한없이 가라앉기만 했다. 판을 잡고 발장구를 쳐 봤는데, 그냥 계속 제자리에 떠 있기만 해서 나중에는 수영은 포기하고 가만히 서서 친구들이 하는 걸 구경만 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거보단 차라리 집에서 책 보는 게 훨씬 재미있는 것 같은데. 하고.
그때부터인가. 내 집순이 병이 시작된 건.
“가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어 보이는 엔프리제는, 햇빛 아래에서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걸 보니 뭐….
이 정도는 맞춰 주도록 할까. 엔프리제는 묘하게 기뻐 보이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 순순히 발을 옮겼다.
설마 이 평화로운 호숫가에서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