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52화 (52/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52)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괜찮다니까요.”

벌써 몇 번째 묻는 거야?

이 세계 사람들은 뭐 하나 할 때마다 괜찮냐고 묻는 게 습관인가? 왜 말이 몇 발자국 앞으로 전진할 때마다 물어보는 걸까.

“당신께서… 곤충 관찰에 흥미가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얘길 굳이 다시 끄집어내는 이유가 뭘까…? 내가 수치스러워하는 걸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럼 차라리 비웃으라고! 비웃어!

나이 먹을 대로 먹고 개미 쳐다보고 있었다고 비웃으라고!

“대공님은 곤충 싫어하세요?”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어렸을 때는 제법 열중했었던 적도 있지만요.”

개미 관찰에 열중하고 있는 엔프리제…. 왠지 상상이 안 된다.

애초에 어렸을 때의 엔프리제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지금 그대로 약간 건방진데 미래가 기대되는 꼬맹이 느낌이었을까? 아니면 뭔가 반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대공님의 어린 시절은 뭔가… 상상하기 힘드네요.”

“그렇습니까?”

“어떤 아이였는지 물어봐도 돼요?”

누군가에게는, 유년 시절이 힘든 기억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엔프리제가 책으로 봤을 때는 그냥 집착 또라이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사실 알고 보니 이래저래 사정이 있었던 것처럼. 어렸을 때의 엔프리제도 무언가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게 하고 싶진 않았다.

“궁금하십니까?”

“으음, 네.”

엔프리제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

이 사람은 왜 이토록 샤페릴 하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을까. 왜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거북해진 걸까. 왜 이런 방식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 밖에도 수많은 의문이 있다.

엔프리제는 무슨 음식을 좋아할까? 좋아하는 노래는 어떤 걸까? 책은 어떤 걸 자주 읽을까? 좋아하는 음료는 뭐지?

엔프리제는 내가 무언가를 요구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알아간다. 하지만 나는 모른다.

엔프리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그리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든 좋아요. 저는 대공님에 대해 알고 싶어요.”

“…그렇습니까.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을까요.”

무언가를 밟은 걸까. 순간 말이 살짝 흔들렸다.

나는 말을 멈추는 방법은커녕 고삐를 쥐는 방법도 잘 모르기에, 고삐를 잡는 대신 엔프리제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고삐를 잡고 있던 두 손 중 한 손을 거두어 내 허리를 감았다.

나는 그대로 그의 가슴에 기대어 이야기가 시작되는 걸 기다렸다.

“저는… 제 외모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어야 했거든요.”

아니, 엔프리제의 외모가 어디가 어때서?

이렇게 잘난 남자는 소설 속에도 별로 없겠구만. 이 세계의 사람들은 다 눈이 삐었나?

“제 아버지인 선황 폐하는 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응?

엔프리제는 검은 머리카락에 금색 눈동자잖아. 아, 어머니를 닮은 건가?

“제 어머니는 제국 내의 한미한 백작가의 셋째 딸이었습니다. 원래라면 황후의 자리는 꿈꿀 수도 없는 자리였지요. 그래서 제 어머니는, 좋은 자리에 시집가는 건 애초부터 포기하고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내던 백작가 영식과의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여자가 어떻게 황후가 된 걸까. 그 의문을 해소해 주려는 듯 엔프리제가 말을 이었다.

“어머니의 가문에 황궁에서의 초대장이 오는 건 거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만은 달랐지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선황 폐하께서 수도에 체류하고 있는 모든 가문에게 무도회의 초대장을 보내셨거든요. 마침 결혼 준비 때문에 수도에 와 계시던 어머니는, 황궁에 가 볼 마지막 기회일 거라 생각하고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뭔가 평소와 다른 일이 일어난다는 건, 소설 속 세계에서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전조 증상 같은 것이다.

평소와 같았는데 무언가 하나만 달랐다든가. 혹은 평소엔 아니었는데 그날만 이랬다든가.

“아직 젊었던 선황 폐하는…, 어머니를 보시고 한눈에 반하셨던 모양입니다. 당시 황후로 내정되어 있던 영애와의 결혼을 취소하면서까지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려 했습니다.”

뭐, 대충 이런 거 아닐까?

-어찌 제가 감히 그런 자리에! 당치도 않으신 말씀, 거두어 주소서.

-대체 왜 안 된다는 것이냐. 후궁의 자리라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느냐. 그렇다면 네게 황후의 자리를 주겠다.

-폐하!

뭐, 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끝끝내 거부하려 했습니다. 이미 결혼 준비를 시작한 정인까지 있었던 상태니까요. 그러자 선황 폐하께서는 가문의 사람들을 회유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가문 사람들이야, 당연히 그냥 귀족 남자보다는 황후가 되는 걸 더 기뻐하겠지. 분에 넘치는 행복의 끝은 파멸이라는 공식도 모른 채.

원래 다들 그런 거다. 그런 행복이 왔을 때 자신이 그걸 움켜쥐게 된 줄 알지만….

대부분은 운명의 장난인 경우가 많지.

“결국 어머니는 선황 폐하의 구애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아니, 받아들이실 수밖에 없게 만드셨죠. 그리고 아홉 달 뒤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응?

잠깐. 아버지가 선황이고 어머니가 황후면….

응?

엔프리제, 설마 황제의 적장자야?! 근데 왜 대공이야? 황태자던지 황제가 됐던지 해야지!

“결혼한 후 바로 저를 가졌다고 한다면, 말이 안 되는 출산 시기는 아닙니다. 다만 제 머리카락이나 눈의 색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선황 폐하를 닮은 곳이 단 한 곳도 없었던 것이죠.”

문득, 침입자가 엔프리제를 칭하던 말이 생각난다.

피 도둑놈이라고 했던가?

설마 그 별명이 생긴 건….

“어머니에게 결혼을 준비하고 있던 연인이 있었던 점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그렇게 사교계에서는 제가 전 연인의 아이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죠.”

아니, 이상하잖아?

어머니를 똑 빼닮았다며? 완전히 외탁만 할 수도 있는 거지, 그게 왜 다른 남자의 아이라는 증거가 된다는 건데?

다들 머리에 총이라도 맞은 건가? 이성적인 생각이라는 게 불가능한 거야?

“논란이 일었다는 걸 인지하신 선황 폐하께서는,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언하셨습니다. 제가 당신의 아이라고. 황후는 깨끗한 몸이었노라고.”

그래 그래, 그래야지.

자기 자식이 그딴 소리를 듣는데, 그토록 애타게 바라서 얻은 아내가 그런 소리를 듣는 데 가만히 있으면 남자가 아니지.

…근데 왜 지금 엔프리제는 여기 있는 거지?

“하지만 가장 어머니를, 황후를 의심한 건 다름 아닌 선황 폐하였습니다. 그분은 어머니 몰래 뒷조사를 하고 두 가문의 사용인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탐문을 하며 증거를 잡으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아니라고 하자 그분은 끝내 전 연인이었던 남자까지 불러내어 사실 확인을 하셨습니다. 물론, 그는 아니라고 했죠. 그런데도 선황 폐하의 의심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미친놈이네, 그놈도.

아니, 엔프리제의 아버지를 나쁘게 말하고 싶진 않지만…. 이 남자의 감정적이고 격정적인 부분이, 집착 또라이의 면모가 어디서 나왔나 했는데 아버지를 닮았나 보다. 그럼 다정하고 상냥한 부분은 어머니를 닮은 건가?

“왜냐하면…, 제 용모가 갈수록 어머니를 닮아갔기 때문입니다.”

“그게 왜요? 자식이 어머니를 닮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둘째인 바르카, 그러니까 현 황제 폐하께서 태어나고 적통으로는 막내인 엘마레까지 태어나자 선황 폐하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머리카락 색도, 눈 색도 아버지를 닮았거든요.”

아니…!

애가 셋인데! 하나는 엄마 닮고 둘은 아빠 닮을 수도 있는 거지! 유전자 검사 해 봤어? 아니면 뭐 친자 검사할 수 있는 뭔가를 해 본 거야?

이 세계에도 그런 거 있나? 있으면 당장 하게 해 주고 싶네.

“막내인 엘마레가 걸어 다닐 때쯤엔… 제가 선황 폐하의 아이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거의 기정사실처럼 황궁 안팎에 퍼졌습니다. 그건 이미 겉잡을 수 없을 정도였죠.”

끄응.

이후에 일어질 일은 안 봐도 뻔하긴 하네. 왜 엔프리제가 삐뚤어졌는지도 좀 알겠다.

소문이란 무섭다. 특히 귀족 사회처럼 폐쇄된 사회에서의 소문은,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신의 명령과도 닮은 것이 된다.

모두가 수군거리는 이야기에 반대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도 없겠지. 심지어 그걸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가장 의심을 하고 있어서야.

하지만 그건 엔프리제의 잘못이 아닌데.

설령 어머니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게 왜 엔프리제가 지탄받아야 할 일이 되는 걸까. 그들은 엔프리제를 한번 만나 보기라도 한 걸까? 어떤 사람인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보고, 그러고도 피 도둑이니 더럽니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데.

“어렸을 때의 저는… 그런 소문을 제 노력으로 이겨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제가 뛰어난 능력을 보이면, 제가 착하게 굴면, 제가 선황 폐하의 인정을 받으면 모든 게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었죠.”

으으, 기특해 가지고.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손 위에 겹쳤다. 그리고 등을 토닥이는 것처럼 손등 위를 토닥였다.

“…….”

엔프리제도 그 손길을 느낀 걸까. 잠시 이야기가 끊겼다.

내가 좀 더 빨리 빙의했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빙의하지 않고 다른 빙의물에 나오는 여주들처럼 무언가 현상을 바꾸어 살아남으려는 사람이 빙의되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

나처럼 이 감금이 영원히 이어지길 바라는 사람보다는….

엔프리제를 위해서는, 말이다.

“위로해 주시는 겁니까?”

“아닌데요.”

“그럼 이 손은 무엇입니까?”

“그냥, 어린 대공님이 기특해서요. 이건 대공님한테 하는 게 아니에요. 이야기 속 어린 대공님한테 하는 거지.”

그렇게 말하자 엔프리제는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지금 당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당신에게 안겨 있는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분명 몹시도 예쁜 얼굴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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