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49)
“저기, 대공님?”
“네.”
“왜 이게 또 나왔을까요…?”
빙의한 이후로 매일 마셨던 차. 이름은 모르겠지만, 여튼 몸에 있는 마력을 감소시켜 준다는 이 차가 왜 또 나온 걸까.
말똥말똥 눈을 뜨고 엔프리제를 보자 그가 내 시선을 피했다.
“…약초의 양은 자하 경이 방문할 때마다 조절하고 있습니다. 내일모레 가급적 약의 양을 살짝 적은 정도로 유지해 달라고 부탁하겠습니다.”
“흐음….”
그것도 방법이긴 하겠구나.
근데 나랑 뽀뽀하는 거 좋다면서 왜 또 다른 방법을 강구했대? 막상 해 보니까 별로였나?
“대공님.”
“네….”
뭔가 불길했는지 엔프리제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슬쩍 고개를 돌린다. 그 모습이 얄미워서 일부러 바짝 다가가 다시 말을 걸었다.
“저랑 그러는 거 좋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
“근데 왜 다른 방법을 막 찾으신 거예요?”
“…….”
흠, 이게 바로 묵비권이라는 건가.
이렇게 묵묵부답인 엔프리제는 처음 본다. 최소한 비아냥이든 뭐든 어지간하면 대답은 했는데.
심지어 말을 돌리지도 못하고 묵비권만 행사하는 건 처음인데.
“…알았어요.”
“……?”
축 늘어진 목소리를 내자 놀란 엔프리제가 내 쪽을 본다. 여전히 입술은 열리지 않았지만, 이래도 안 여나 보자.
“제가 싫었던 거죠….”
“네?”
이 봐, 이 봐. 이러면 열 줄 알았어.
내 양심을 위해 말해 두자면, 이건 괴롭히는 게 아니다. 심문을 위한 정당한 기술이다!
“제가 막 먼저 달려들어서 뽀뽀하고 하니까 싫으셨던 거죠…? 사실은 제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왜 다시 약을 주신 거예요?”
솔직히 나도 엔프리제가 제시한 방법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약간 약을 적게 먹고 쌓인 마력이 미열을 내기 시작하면 엔프리제가 받아 가고.
이러면 내 체질에 대해 조사할 시간적 여유도 더 생기니까 말이다.
근데 어제 그렇게 도망가서 내내 날 찾아오지 않다가, 갑자기 나와서 약을 건네면서 말을 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
내가… 내가 얼마나 용기를 내서 그 뽀뽀를 한 건지 니가 알아?!
“…….”
“…….”
엔프리제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닫았다. 귓바퀴가 빨간 걸 보니 말하기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 같은데.
톡, 톡 하고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던 엔프리제가 낮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습니다.”
“네?”
“그, 저기, 저번엔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는… 그, 뭐랄까.”
“명분?”
“네…. 명분이 있었으니까 괜찮았었는데 그냥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왜요?”
뭐가 다르지? 명분은 확실히 있었지만, 어차피 그때도 사심 반 들어 있었다면서.
“…마치 연인의 행위 같지 않습니까.”
“어….”
하긴…. 이해가 가긴 하네.
당장 죽을 것 같은 사람, 혹은 호흡 곤란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하는 건 당연히 의료 행위라고 생각해서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앞으로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인공호흡을 해 두자! 라는 이유로 입을 맞추면 좀….
그렇긴 하겠네.
“저랑 그런 걸 하는 게 싫은 건 아니고요?”
“절대로 아닙니다.”
“에이.”
“당신께서…, 제게 이런 건 저와만 하고 싶다고 하신 것처럼 저 역시 그렇습니다. 저는 분명 평생… 당신이 아니면 안 되겠죠.”
남주에게 순정은 패시브 스킬이긴 하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이런 말을 대놓고 들으니까 기분이 좋긴 하다. 처음에는 이 모든 게 샤페릴에게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어딘지 먼 곳에서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다 내게로 향하는 것 같아서 감정적이 된다.
“대공님, 저번에 글자 공부했을 때처럼 해도 돼요?”
엔프리제는 가타부타 말없이 살짝 허리를 등받이까지 당겨 앉았다. 앞에 생긴 조그만 틈에 쏙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 엔프리제가 가져온 차를 마셨다.
뭐, 맛도 나쁘지 않고. 꿀꺽꿀꺽 마시면서 점점 몸을 엔프리제에게 기대게 된다. 거의 끝까지 컵을 기울였을 때, 날 바라보고 있던 엔프리제와 눈이 마주쳤다.
이 남자는 알고 있을까.
처음에는 사납고 차갑게만 보였던 인상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걸. 자하처럼 생글생글 웃는 건 아니지만 훨씬 인상이 부드러워졌다. 눈매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런가.
아. 그러고 보니 이마가 하트네. 머리카락이 저렇게….
“저기…, 그렇게 보시면 쑥스럽습니다.”
어느덧 나는 컵을 든 손을 내려놓은 채 고개를 한껏 치켜 올려 엔프리제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었다.
밑에서 봐도 이렇게 잘생긴 건 반칙 아닌가. 콧구멍도 잘생겼네. 하트 모양까진 아닌데 모양이 예쁘다.
“대공님은 이마도 예쁘네요.”
“그렇…습니까?”
“저는 이마가 좀 좁은 편인데, 대공님은 시원시원하면서도 대머리 느낌은 안 나요.”
“…당신 이마도 예쁩니다.”
“보신 적 있어요?”
어라, 내가 이마 까고 다닌 적이 없는데?
“저번에, 열이 나셨을 때.”
“아.”
“템버는 밤에 쉬어야 낮에 다시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쉬게 하고 제가 곁에 있었으니까요.”
이 남자, 그때 별짓을 다 했구나, 진짜.
그런 눈으로 바라보자 엔프리제가 황급히 변명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이마의 수건을 갈아 드리다 보니….”
“흐음….”
그건 어쩔 수 없긴 하지.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다음에 대공님이 아프실 때는 제가 옆에 달라붙어서 간호할 거예요.”
“당신께 그런 걸 시킬 수는….”
“저도 볼 거 안 볼 거 다 볼 거예요.”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땀에 젖어서 앓는 엔프리제.
빨갛게 뺨을 물들이고 촉촉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엔프리제.
약해져서 손을 내밀며 잡아 달라고 부탁하는 엔프리제.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 모두 잘 수집해 둬야지. 아쉽게도 게임이 아니라 사진첩에 담아 둘 순 없지만 기억에라도.
“…아니, 역시 됐어요.”
“후….”
“기왕이면 대공님이 안 아픈 게 더 좋으니까요.”
지금까지 곤란해하는 얼굴도 보고, 난감해하는 얼굴도 보고, 화난 얼굴도 보고, 노려보는 얼굴도 보고….
다양한 얼굴을 봤지만 그중에서 제일 예뻤던 건 역시 남자의 등에서 굴러떨어지는 나를 받아 내곤 안도의 웃음을 띠던 엔프리제의 얼굴이었다. 앞으로 어떤 얼굴을 봐도 그 웃음보다 예쁘진 않겠지.
“으음…, 오히려 내가 더 위험에 자주 빠져야 하나.”
“그건 무슨 소리십니까, 또!”
아, 이런 것도 또 말이 씨가 될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야지.
“죄송해요.”
“그런 말씀은…!”
“다신 안 할게요.”
순순히 먼저 사과하자, 엔프리제의 입이 막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언젠가 이런 일상에도, 이런 두근거림에도 무뎌지는 날이 오겠지?
얼마 전까지는 그게 좀 더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겪어 보는 감정이 무섭고 또 낯설어서.
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오래 지속되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남자는 어떻게 됐어요?”
문득 떠오른 질문을 뱉자 엔프리제가 또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 * *
“쓰레기 같은 놈들!”
바르카는, 황좌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그의 허리춤에 항상 장식되어 있는 황제의 보검을 빼어 들자, 보검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불길한 색이 검신을 타고 흘렀다.
“어디에 있는지도, 어떻게 들어가는지도 다 알려 주었는데 그걸 못 데려와?!”
“죄, 죄송합니다, 폐하.”
“그 빌어먹을 놈은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야?! 마법 결계도, 알림 마법도 전부 해제했는데!”
황제의 눈이 궁전 마법사에게로 향했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마법사는 초연한 듯 보였지만, 그 뺨에 한 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대의 실력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제대로 다 해제된 게 맞겠지?”
“물론입니다, 폐하. 제13대 궁정 마법사의 이름을 걸고 완벽하게 해제했습니다. 애초에 그리 수준 높은 마법도 아니었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놈이 어찌 알고 튀어 간단 말이냐! 그것도 황제인 짐을 두고!”
엔프리제와 바르카는 사이 좋은 형제라고 부르긴 어려웠다.
적장자임에도 겨우 용모가 황제를 닮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 도둑놈 소리를 들으며 천대받는 엔프리제와, 능력은 엔프리제보다 떨어지지만 황제를 꼭 닮아 총애를 한 몸에 받은 바르카. 두 사람이 가까워지기에는 그 사이에 쌓여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적대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엔프리제는 제 주제를 아는 남자였다. 선황이신 아버지께서 조용히 스스로 황태자의 자리를 고사하고 대공의 자리로 만족하라고 했을 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건 그놈이었다. 그 후에도 중앙 정치나 제 세를 불리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활을 쏘는 매일을 보냈었다.
그렇기에 바르카도 나쁘게 대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귀히 대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무리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고 하더라도 엔프리제가 바르카를 그런 식으로 버리고 갈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저택을 나가자마자 곧바로 향한 곳이 다름 아닌 비밀 별장이라니.
침입을 눈치채고 갔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 무능한 놈. 무능한 놈의 종은 무능한 놈밖에 없는 것이냐!”
그런 남자의 시종을 쓰는 게 아니었다.
만에 하나라도 샤페릴이 반항할 것을 우려해 그 남자의 시종을 사용했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무능하고 더러운 놈의 시종을. 얼굴이 익은 그 남자라면 순순히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게 뭔가.
순순히 따라오기는커녕 예상 시간을 한참 넘겨서 저택을 나온 데다 결국은 엔프리제에게 잡히기까지 하지 않았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남자는 제 주인이 모든 것을 시킨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남자는.”
“황성 지하 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괜히 대공이 데리고 가 여러 가지를 캐내면 귀찮아지니.”
그 남자는, 아마도 이미 바르카를 의심하고 있을 터였다.
하필이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갑자기 저택을 방문했다. 황제가 이리 움직이는 것도 드문 일인데, 하필이면 그날 침입자가 들어 샤페릴을 데리고 나가려 했다.
대놓고 의심할 순 없어도 사람의 머릿속은 검열할 수 없는 법이니까.
“젠장!”
마음 같아선 대군을 움직여 샤페릴을 데리고 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교회 측과 마탑 측에 샤페릴의 소재를 알려 주는 꼴이 되리라.
“…됐다. 어차피 있는 곳을 알았으니 시간만 들이면 어떻게든 빼 올 수 있겠지. 단.”
황제의 검이 다시 기사단장에게로 향했다. 제 임무를 다하고도 엉뚱한 걸로 욕을 먹고 있던 세실리오는, 반박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덜덜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부디 이 젊은 황제가 자신의 목을 붙여 주기를 바라며.
“다음은 정말로 없다고 생각해라.”
“두 번의 실패는 없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바르카는, 으득 이를 갈며 황좌로 돌아갔다. 그리고 턱을 괸 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그리운 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
샤페릴.
그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 안에 들어오게 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피 도둑놈이 가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