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47)
으어어….
진이 쪽 빠져서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자 플리가 슬금슬금 올라왔다. 내 상태를 보기 위해서 올라왔던 것 같은데, 막상 폭신하고 시원한 이불에 닿자.
“삐이-! 꾸꾹꾸꾸꾸! 꾸꾸꾸꾸꾹!”
또 비둘기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저거 좋아하는 거 같지? 이거야말로 난리부르스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광경이 아닌가. 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플리에게 밟혀 주고 있었다.
“플리…. 너무 밟고 다니지 마, 나 힘들어.”
어떻게 된 게 공부 한 번 하는 게 등산보다 더 힘들지?
아니, 뭐. 엔프리제는 약속을 잘 지켰다. 소설에서 봤던 등 뒤의 흉기도 느끼지 못했고, 진지하게 내 손을 잡은 채 글자를 가르쳐 주었다. 덕분에 어느 정도 감은 잡았는데, 감은 잡았는데….
솔직히 말하면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엔프리제 때문에 집중이 하나도 안 됐다.
아니, 무슨 남자가 그렇게 좋은 냄새가 솔솔 나? 숲 향만 나는 줄 알았더니 무슨 과일 향 같은 달달한 냄새가 같이 난다. 공부에 아무리 집중하려고 해도 향기가 방해해서 자꾸 심장만 쿵쿵 뛰었다.
심장이 뛰니까 귀가 잘 안 들린다. 내 몸 안에서 뛰는 심장 소리와, 내 귓가에서 나지막하게 울리는 엔프리제의 목소리가 무슨 전쟁이라도 하듯 번갈아 들리더니 어느 순간 섞여 버렸다.
나중에는 이게 심장 소리인지 엔프리제의 목소리인지 목소리 때문에 설레는 건지 그냥 목소리만 들어도 설레는 건지 알 수 없는 엉망진창의 상태가 되었다. 그럼에도 한국 수능 올 2등급 이상의 저력을 발휘해 집중하려 했지만.
“…흐으….”
“왜 그러십니까?”
“아, 무것도 아니에요…. 그, 조금 전에 그거 다시 해 줄래요? 어느 쪽으로 삐침이 나간다고요?”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허리에 감긴 손이 자꾸 꼬물거렸다. 내가 넘어질 것 같았던 걸까?
그 손길을 피하려고 나도 모르게 살짝 움직이면, 미끄러진 거라고 생각했는지 손 위치를 바꿔서 꽉 끌어당긴다. 이게, 그, 스킨십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하면 막…, 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를 정도의 간지러움이랄까, 짜증과도 닮은 무언가랄까….
아무튼 나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어서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혼자 할 때보다는 훨씬 이해하기는 쉬웠다.
그냥… 진이 다 빠져서 그렇지.
“빨리 글자를 마스터해야겠어. 그래야 그 생고문 같은 수업을 빨리 끝내지.”
그렇게 중얼거리자 플리가 내게 다가왔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내 얼굴을 한 번, 늘어져 있는 손을 한 번 보더니 살랑살랑 손가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입안에 넣더니 아작아작 씹었다.
“플리?!”
간지러워!
송곳니는 엄청 날카롭지만, 아플 정도로는 깨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지압기 같은 걸로 손끝을 콕콕 찌르는 정도의 자극만 남았다.
처음에는 아팠지만 여러 번 당하니까 익숙해져서 그런가. 이제는 좀 간지럽다.
“이거 설마 마사지야? 너 마사지 기능도 있어?”
“삐-?”
“아! 아퍼!”
“삐-!”
아, 익숙해져서 안 아팠던 게 아니구나. 플리가 살살 물었던 거구나.
순간 눈물 날 뻔했다.
“마력이라.”
나한테서 과잉 생산되는 마력은 모조리 허공에 흩어지는 걸까. 그걸 누구한테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 문양이 있다는 건 엔프리제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거지? 엔프리제가 더 많은 마력을 가져서 세질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도 엔프리제한테 뭐라고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엔프리제가 가시를 세워서 자신을 지키지 않아도, 여유롭게 다른 사람들을 대할 수 있도록.
아니면 플리한테 주는 것도 좋고. 마법 생물이니까 마력이 더 있으면 좋지 않을까?
“내 마력 가져가라, 플리.”
“삐-?”
“네가 마력을 가져갈 수 있으면 난 목숨 걱정 안 하고 살아도 될 텐데.”
이상한 약도 안 먹어도 되고.
엔프리제는 약초라고 표현했지만 쉽게 말하면 독인 거잖아, 그거.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되는 게 우연히 내 체질에는 생명 연장의 약이 되었던 것뿐이니 용량을 조금만 잘못하면 나 역시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한부는 아닌데 시한부 인생과 다를 바 없네.
“…응?”
잠깐.
점막 접촉으로도 마력 배출은 할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러면 엔프리제랑 거, 흠, 흠흠.
19금다운 일은 하지 않아도 12금 정도의 행위만 해도 마력 조절을 할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점막 접촉으로 생명 유지에 필요한 마력까지 배출되면 이 세계의 인간은 벌써 멸종했을 거 아냐. 그건 여분의 마력만 배출되는 거 아닐까?
“플리, 엔프리제한테 갈래?”
“끼유!”
아, 싫은가 보다.
플리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침대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여간, 거길 아예 집처럼 쓴다니까.
플리 집도 따로 만들어 주면 좋을 텐데.
습성을 알아야 집도 만들어 주고 아지트도 만들어 주고 할 텐데. 일단 어둡고 좁은 곳을 좋아하는 건 잘 알았다. 침대 밑이나 옷장 뒤를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서랍장 안에 자꾸 들어가는 것도 그렇고.
“캣 타워 같은 것도 좋아하려나. 침대나 탁자 위에도 잘 기어오르 잖아, 너.”
대답이 없다. 그새 또 자나?
족제비는 원래 잠이 많은 걸까? 플리도 나랑 놀거나 밥 먹을 때 빼면 하루에 거의 14시간은 자는 것 같다.
“나 갔다 올 테니까 방 잘 지키고 있어.”
이번에도 역시 대답이 없다. 자나 보네.
나는 플리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 * *
“대공님!”
“당신이 왜 여기에…. 절 부르시면 될 텐데.”
“이제 사슬도 없는데 제가 만나러 오는 게 더 빠르죠. 아니면 제가 오는 건 싫으세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다만 당신께서 귀찮으실까 봐 그런 것뿐입니다. 일단…, 여기에라도 앉으십시오.”
으응….
여기가 사람이 거의 안 오는 곳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의자가 하나밖에 없다니.
나한테 의자를 주면 엔프리제는 어디에 앉지? 흠.
“아니에요, 대공님 앉으세요.”
“당신께서 서 있도록 둘 수는….”
“전 또 대공님 무릎에라도 앉죠, 뭐.”
물론 농담이었다. 일단 최소한 오늘만큼은 사양하고 싶다.
지금 체력은 가득 차 있는데 기력은 거의 0에 수렴한 캐릭터가 된 느낌이란 말이야.
“…그냥 제가 서 있겠습니다.”
아, 역시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그보다 무슨 일이십니까? 템버에게 차라도….”
“조금 전에 다과 같이 먹었잖아요. 괜찮아요.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엔프리제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창가에 섰다. 나 혼자 의자에 앉기도 뭐해서 나도 일어선 채 이야기를 꺼냈다.
“제 병 말인데요.”
“네.”
“그, 저, 크흠. 점막 접촉으로도 마력 배출이 가능하다고 하셨잖아요.”
“…네.”
“그럼…, 그, 대공님이랑 한 번씩 그 접촉을 하면… 약 안 먹어도 되는 거예요?”
“네?”
역시 놀라는구나.
하긴. 엔프리제는 내가 자기랑 ㅋ, 키…, 점막 접촉하는 것보다 약을 먹는 걸 더 기꺼워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죽음의 가능성이 있는 독약과 죽음의 가능성이 없는 키…스랑 두고 비교하자면 당연히 후자를 택하지 않겠어?
게다가 뭐, 싫은 사람이랑 억지로 하라는 것도 아니고 엔프리제니까.
“저번에 설명해 줬잖아요. 그 약은 몸에 있는 마력을 감소시켜 준다고. 그런데 몸에 있는 마력에는, 그 과잉 생산된 마력 말고 생명 유지에 필요한 마력도 있는 거잖아요.”
“맞습니다.”
“그럼 양이 잘못되면 여분의 마력이 다 나가지 않아서 몸에 쌓이거나, 혹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마력까지 깎을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맞구나, 역시.
“점… 에잇, 입맞춤도 그런 부작용이 있어요?”
“…….”
엔프리제가 말이 없어졌다.
너무 의외의 말을 꺼내서 혼란스러운 걸까?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걸까.
혹시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어요! 뭐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아직 거기까지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첫키스 한 지 아직 한 달도 안 됐는데, 우리!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니, 그, 그렇게까지 표현할 건 없지 않을까. 일단은 치료 행위인데.
그거랑 같은 거잖아. 인공호흡.
“어차피 한 번 했잖아요. 두 번이나 세 번 해도, 뭐…. 그리고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예전이라면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저도 뽀뽀한 거 좋았으니까 괜찮았어요, 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엔프리제는 또 여러모로 힘들겠지.
차라리 냉정하게 보이더라도 솔직한 이유를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혹시나 싫거나 혐오스럽게 느껴지시면….”
“제가 언제 싫댔어요?”
“좋진 않으셨다고….”
“좋지 않다고 싫은 건 아니잖아요. 왜 그렇게 사람이 이분법적이에요?”
“이런 스킨십은 본래라면 제가 감히 당신과 나눌 일도 없는 연인 간의 행위입니다. 그러니 당신께서 불쾌하게 느끼신다고 해도… 저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당장이라도 울 것 같으면서.
싫다고 했다간 저거 뚝뚝 떨어지게 생겼는데 뭘 괜찮대? 그래도 엔프리제가 우는 모습, 조금 보고 싶기는 하다. 분명히 예쁘겠지.
금색 눈동자가 젖어서 반짝반짝….
…….
아니, 정신 차려! 겨우 그런 이유로 사람을 울려서 어쩌겠다는 거야?
“지, 질문에 아직 대답 안 해 주셨어요. 그 방법도 뭔가 부작용이 있는 거예요?”
“부작용이… 없지는 않습니다.”
헉. 설마 이 세계의 사람들은 뽀뽀도 함부로 못 하는 건가? 막 마력 배출돼서 목숨 걸고 해야 하는 그런 거야?
임출 하면 수명 깎이는 거야?!
“당신께는 아무런 부작용도 없습니다. 다만….”
나한테는 없다는 건….
설마.
엔프리제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