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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46화 (46/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46)

“그렇습니까.”

“제가 가르쳐 달라고 해 놓고, 죄송해요.”

“아닙니다. 왠지 이렇게 될 것 같았어요.”

엔프리제가 글자를 가르쳐 주기로 해서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 이야기하자 자하는 오히려 온화하게 웃으며 그리 대답했다.

“그림 카드는 여기 있어요. 소중한 거잖아요.”

급하게 서랍장에 넣었지만, 다행히 구겨지거나 망가지진 않았다. 애초에 가장 밑에 있는 서랍장은 텅 비워 둬서 뭐가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어떻게 들어가는진 모르겠는데, 가끔 플리가 거기에 들어가 있는 경우가 있다. 문이 열려만 있으면 어떻게 발톱으로 쇽쇽 해서 들어갔다고 치겠는데, 닫는 것까지는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내가 지켜보고 있는 동안은 안 들어가고.

“감사합니다.”

“동그라미 연습도 많이 했어요. 어때요?”

나는 자신 있게 캔버스를 내놓았다.

아직 좀 일그러지긴 했지만, 엔프리제가 그랬다. 이 정도면 처음보다 많이 좋아진 것 같다고. 입가를 가리고 말한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자하는 한동안 말없이 캔버스를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었다.

“많이 좋아지셨네요.”

…저기, 자하? 진심으로 말하는 거 맞지?

입가가 씰룩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 기분 탓이지? 그런 만화 표현 같은 입꼬리 실제로 존재할 리가 없잖아.

그치?

…응, 그럴 리가 없지.

“붓은 잘 세척하셨군요.”

“네. 뭉친 물감은 천으로 닦아 낸 뒤에 기름에다가 충분히 헹궈 내고 비누 묻혀서 손 위에 놓고 살살 문질러서 기름 빠질 때까지 했어요. 그렇게 하는 거 맞죠?”

“헹궈 내실 땐….”

“한쪽 방향으로 쓸듯이, 맞죠?”

“네. 너무 휘저으면 붓이 벌어지니까요.”

“넵.”

역시 대한민국 주입식 교육의 힘.

외우는 건 나름대로 자신 있다. 외우지 않는 쪽이 문제지만.

“그리기 연습은 계속 원으로 하도록 하지요. 오늘은 다른 채색 방법에 대해서도 알려 드릴게요.”

“다른 채색 방법도 있어요?”

아직 동그라미도 못 그리는데 채색 방법을 배우라니!

너무 스텝을 많이 밟는 거 아닐까요, 선생님?

“어려운 건 아닙니다. 오히려 형태를 그리는 것보다 더 쉬울 수도 있어요. 채색에는 정도라는 게 없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가르쳐 드리는 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방법이지, 이렇지 않은 방법으로 그리셔도 상관없습니다. 미술이란 원래 구애되지 않는 자유가 매력이니까요.”

오오, 예술가 같은 말을 한다. 약사면 이과 아닌가?

이과랑 예과를 둘 다 잘하다니. 역시 탐난단 말이야. 딸이라도 있으면 시집보내고 싶은데 근처에 시집 보낼 딸이 없네.

작가한테 따지고 싶다. 왜 내게는 귀여운 딸 같은 하녀를 주지 않았는가!

아, 하긴 있었으면 좀 곤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 쪽이.

나랑 엔프리제야 아직 깨끗한(?) 관계지만 원래라면 지난번 도주극이 끝나고 감정이 극에 달한 샤페릴의 마력이 엄청나게 과잉 생산돼서….

크, 크흠. 그, 어, 그.

그런 씬이 펼쳐졌을 것인데 어린 아가씨가 혹시 듣기라도 했다간 큰일 났었겠지. 크흠흠.

“제가 대공님한테 말해서 꼭 자하의 혼처를 찾아 달라고 할게요.”

“네?”

“자하 같은 신랑감이 어딨어요? 성실하지, 자상하지, 성품 온화하지, 착하지! 거기에 다른 사람의 입장도 잘 헤아리고. 오히려 지금까지 여자들이 그냥 둔 게 이상….”

“크흠!”

…….

아, 맞다. 여기 엔프리제 있었지.

“이상…한데 저는 자하한테 전혀 흥미가 없어서 어떻게 해 드리지 못하고, 다른 여자를 소개시켜 달라고 할 수밖에요?!”

미, 미안해요, 자하. 저 질투쟁이가 또….

나로선 이럴 수밖에 없어…!

“괜찮습니다. 전하께서 아시는 여성이라곤….”

힐끔, 하고 엔프리제를 본 자하가 살짝 짓궂은 웃음을 띠었다.

“샤페릴밖에 없는데, 샤페릴을 소개해 달라고 할 순 없잖아요?”

“크흐흠!”

그러다가 목 다 갈라지겠습니다, 대공님.

엔프리제가 불쾌한 티를 팍팍 내며 의자 손잡이를 손끝으로 두드린다. 보니까 뭐 생각하거나 싱숭생숭할 때 많이 저러던데.

버릇도 귀엽지, 엔프리제는.

“그렇구나. 대공님이 아는 여성이라곤 저뿐이구나.”

“다른 여성들이 다가오지 않은 건 아닙니다. 샤페릴의 말대로 여러모로 뛰어난 분이시니까요. 다만….”

“다만?”

“늘 가시 돋친 말을 하거나 무례한 언행을 하셔서 가까이 오는 사람들을 밀쳐 내곤 하셨죠. 그래서 전하께서 샤페릴한테 하는 걸 보면 신기합니다.”

오호, 그랬단 말이지.

휙 하고 고개를 돌려 엔프리제를 봤다. 내 행동을 예상했는지 어딘가 먼 곳을 보며 턱을 괴고 있는데, 턱을 괴었다기보다는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저거 슬슬 가르쳐 주는 게 좋을까. 고개 옆으로 돌리면 빨개진 귓바퀴가 더 잘 보인다고.

…아니지, 어차피 모르잖아. 그걸로 내가 뭐 놀리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내 은밀한 즐거움 중 하나를 또 빼앗길 순 없다.

모르는 척해야지.

“자, 일단 수업을 진행할까요? 제가 빨리 떠나야 반기시는 분이 계시니.”

“네, 네. 좋아요.”

뭐, 이 정도는 내가 놀리는 게 아니니 괜찮겠지? 자하는 엔프리제를 좋아해서, 사랑해서 놀리는 게….

…그러고 보니 요즘 로판에 BL 설정 섞는 일이 많던데. 설마 내가 자하가 나오는 곳까지 못 봐서 그렇지, 사실은 자하가….

“아닙니다.”

“네?”

“그게 뭐든 아니니까 그렇게 의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건 그만두어 주세요…. 그런 눈초리는 전하 하나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아, 내가 그렇게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봤어? 미안.

거참.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어떻게 알아챘대. 나 나름대로 포커페이스에는 자신 있는데.

크흠.

“먼저 글레이징이라는 걸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어? 글레이징요?”

그거 표지 일러레님들 파란 새 같은 거 들어가 보면 자주 말하던 건데. 유화로도 그걸 할 수 있는 건가?

근데 애초에 글레이징이 뭐지?

“아십니까?”

“아뇨…. 어쩐지 귀에 익어서요.”

“아하. 글레이징이라는 건 밑색을 깔아 놓고 그 위에 투명하게 다른 색을 덧칠해서 색을 겹치는 기법이에요.”

“어? 투명하게요? 하지만 물감은 엄청 진하잖아요?”

“제가 전에 기름을 얼마나 섞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씀드렸죠? 기름을 이만큼 섞어서 쓰면….”

오. 진짜로 색이 투명하게 칠해진다.

“파란색 아래 흰색이 옅게 비치죠? 젯소가 비쳐서 그런 거예요. 이 위에 다른 색을 또 덧칠해 볼게요.”

파란색 위에 더 노란색을 엷게 덧칠한다. 그러자 예상한 색이 나오긴 하는데….

“초록색이 되는데 좀 신기한 초록색이네요.”

“그렇죠? 그냥 초록을 원한다면 팔레트 위에서 섞으면 돼요. 하지만 이 글레이징 기법만이 주는 매력이 있죠. 샤페릴도 해 볼래요?”

“네!”

이걸 나중에 매니큐어에도 응용할 수 있으려나? 아교를 많이 타서 약간 투명한 감이 들게 만들면 손톱 위에 글레이징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엔프리제의 손톱에 해 봐야지.

딴청을 피우면서도 계속 나를 힐끔거리던 엔프리제와 타이밍 좋게 딱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를 보며 씩 웃었다.

* * *

“제국어는 끊어지는 부분이 애매해서 그냥 그림 카드로는 다소 배우기 어렵습니다. 이걸로 독학해서 글씨를 깨쳤다면…, 자하 경은 생각한 것 이상의 천재인 모양이군요.”

내가 천재의 길을 감히 따르려고 한 게 잘못이었구나. 어쩐지 죽어라고 안 외워지더라.

“잠깐, 여기 앉아 보시겠습니까?”

툭툭, 하고 엔프리제가 제 앞을 두드린다. 거기 앉을 자리가 거의 없는데?

이 남자는 내가 무슨 작은 인형같이 보이나.

“어디에 앉아요? 앉을 데가 없….”

크흠, 하면서 엔프리제가 뒤로 더 붙어 앉는다. 그 앞에 있던 좁은 공간이 아주 약간 더 넓어졌다. 하지만 저기 앉으면 거의 엔프리제랑 밀착 상태 아닌가?

나보고 남자로 보니 어쩌니 하더니 저런 위험한 자세로 앉으라고?!

“제국어는…, 자음이 점 하나 차이로 달라지거나 삐침의 방향으로 글자가 달라지기도 해서 직접 써 보면서 익히는 게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대공님 무릎에 앉아야 해요? 이거 명백하게 사심이….”

“물론 사심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건 맞습니다.”

…거참. 그렇게 솔직하게 대답하시니 제가 할 말이 없어지잖아요.

일단 이게 효율적이라니까…. 안겨 있는 것쯤이야…. 포옹은 벌써 몇 번이나 했으니까….

…근데 이 자세는 처음인데?

이건 거의 내 몸을 엔프리제로 감싸는 거 아니야? 엔프리제가 거의 담요 수준이 될 것 같은데? 게다가 그, 그, 어?

로판 남주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절륜한 어? 거기랑도 닿잖아.

…역시 이건 아니야.

“그냥 마주 보고 하면 안 돼요?”

“절 못 믿으시겠습니까?”

응.

특히 뽕빨물 남주는 절대 믿는 거 아니야. 이런 거에 있어선 특히.

엔프리제는 믿어도 최소한 아래에 있을 그 짐승은 믿지 못한다. 거기에는 눈도 이성도 없는 법 아닌가! 심지어 좋아하는 여자를 어?! 앞에 앉히고 어?! 멀쩡하면 어?!

그것도 그것대로 자존심 상할 것 같은데.

“…이거밖에 없어요?”

“그건 아니지만, 빨리 배우시고 싶은 것 같아서요.”

끙.

그래. 솔직히 플리에 대한 책도 읽어 보고 싶고 이제 슬슬 시 말고 소설이나 동화 같은 것도 읽고 싶다. 그리고 글을 모른다는 건, 글자로 된 것들을 통해 나 몰래 뭔가 일이 진행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로판 여주는 생각보다 신경 써야 될 게 많네, 진짜.

“그, 절대로 그런 건 안 되니까요.”

“그런 거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면 지난번의 복수일지도 모른다.

“그, 아무튼. 그런 거. 안 돼요. 그냥 공부만 하는 거니까요. 알았죠?!”

“물론입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이제 꽤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워서 더 믿음이 가질 않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슬금슬금 소파 끄트머리에 앉았다. 그러자 엔프리제가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꽉 끌어안았다.

“대공님!”

“그렇게 앉으시면 떨어지실 겁니다.”

으아악.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 숨결이 귀에 닿았어! 간지러워!

그걸 말로 꺼내면 엔프리제를 자극할 것 같아서 주먹 꽉 쥐고 참았는데.

“그렇게… 떨지 마십시오.”

으아아악.

나지막하게 말하지 마. 분위기 잡지 마. 글자 공부 하자며!

“어, 얼른 글자 공부 해요!”

“…네. 빨리 하는 게 좋겠군요. 제가….”

작게 웅얼거리며 사라진 그 말이, 어째서인지 ‘생각한 것보다 제 이성이 얄팍한 모양이니’로 들린 건 내 착각이겠지?

…그럼, 내 착각일 거야.

제발 그렇다고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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