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43)
슬쩍 자하를 보자, 그가 웃으며 붓을 내려놓았다. 하긴 이 저택 주인이 엔프리제인데 자하라고 싫다고 하겠어?
그냥 내가 괜히 찔릴 뿐이지.
글자 배운다고 이야기해 둘 걸 그랬나. 깜빡했네.
“잠시만요.”
후다닥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거기엔 쟁반을 든 채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엔프리제가 있었다.
“간식을 가져 왔습니다.”
“감사해요. 근데 왜 대공님이…?”
엔프리제는 대답하지 않는다. 슬쩍 시선을 피하는 걸 보니까….
또 템버 앞에서 구시렁거렸구나?
보아하니 나와 자하 사이가 신경 쓰여서 그러나 보다. 그럼 자기도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하면 되지.
아, 하긴. 그건 심장이….
으음.
“대공님도 같이 드실래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뭐 어때요. 근데 안에 지금 냄새가 좀 심한데. 저게 기름을 쓰는 거라 냄새가 고약하더라구요.”
물감 자체는 그리 냄새가 지독하지 않지만, 기름은 뭐라고 해야 하지….
두 종류를 섞어서 쓰는데 하나는 식용유와 비슷한 냄새지만, 하나는 정말 지독하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여튼 지독하다. 주유소에서 나는 냄새와도 닮았다.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습니다.”
하긴. 이 남자가 지금 그게 신경이나 쓰이겠어? 기름 냄새 없어도 다과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텐데.
“안녕하십니까, 전하.”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자하 경.”
“방해라니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럼 레이디 리베테께서는 전하와 함께 다과를 드시면서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차피 제가 본을 보여 드리는 것이니까요.”
크으. 역시 자하는 분위기를 잘 읽는다. 아니, 엔프리제가 질투를 감추지 못하는 건가?
지금도 이글이글 타는 것 같은 눈으로 자하를 보고 있으니.
저러면서 지난 두 번의 수업은 어떻게 견딘 거지? 첫 수업 때 말고는 안 왔었잖아.
아, 하긴 두 번째부터 분위기가 좀 그랬었으니까. 그렇다고 화해하자마자 이러기냐. 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기쁘다.
소설에서 남주들이 쓸데없는 질투할 때마다 ‘야, 그걸 왜 질투하냐!’라며 답답해했었는데. 막상 내 일이 되니까 이상하게 좋네.
엔프리제라서 그런가.
“큰 구도를 잡고 나면 짙은 색부터 색을 채웁니다. 하지만 같은 색이라도 명도와 채도가 다르죠.”
“명도는 밝기고 채도는 선명함을 말하는 거죠?”
“맞습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자하가 날 향해 씩 웃다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슬쩍 옆을 보니 엔프리제가 뚱한 얼굴로 포크를 부여잡고 있는 게 보였다.
“명도를 조절할 때, 매번 새로운 물감을 만들기는 번거로우니 보통 흰색을 섞어서 사용합니다.”
사과 꼭지 부분의 어두운 곳을 얇은 붓으로 슥슥 그려 나가던 자하가, 흑갈색의 물감에 노란색 약간과 하얀색 약간을 섞었다. 그러고는 색을 채웠던 곳 옆에 칠하기 시작했다.
오, 뭔가 그럴듯해 보인다. 깊이…? 라고 해야 할까. 꼭지 부분의 그 움푹 파인 느낌이 나름대로 표현된다.
“이런 식으로 짙고 어두운색부터 밝은색으로 옮겨 가며 칠하시면 됩니다.”
그 후로 자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 엔프리제를 배려한 거겠지. 자꾸 나한테 말 걸면 신경 쓸 게 뻔해서.
나도 아무 말 없이 그저 자하의 손이 움직이는 걸 보고만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엔프리제를 배려한 건 아니었다. 다만 최근 유행하던 물멍, 불멍처럼 그냥 멍 때리고 봤을 뿐.
이건 물감멍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림멍?
여튼 은근히 보는 재미가 있다.
붓이 슥슥 움직일 때마다 사과 안 같으면서도 사과 같은 형체가 나타난다. 사과에 저런 색이 있다고?! 싶다가도 그 위에 다른 색을 살짝 덧칠해 주면 나도 모르게 오오, 저건 사과지! 하고 쳐다보게 되는 마력이….
“됐습니다.”
“오오. 자하는 엄청 빨리 그리네요.”
“사과는 여러 번 그려 본 거기도 하고, 자세한 묘사까지는 하지 않았으니까요. 원래라면 여기서 좀 더 자세히 그려야겠지만…, 본보기는 이 정도로 충분할 것 같아.”
붓을 내려놓은 자하가 이젤 앞을 떠나 의자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내게는 대각선, 엔프리제에게는 바로 옆인 자리에 앉는다.
그를 흘끗 바라보고 이번엔 내가 이젤 앞으로 다가갔다.
“이번엔 제가 그려 볼래요. 이거 위에다 그려도 되죠?”
“눈과 코 부분만 하얀색으로 덧칠하시면 괜찮을 것 같군요.”
하얀 물감을 듬뿍 떠서 눈과 코를 지워 냈다. 미안해, 플리. 비둘기 소리 듣게 해서….
내가 빨리 잘 그리게 되어서 너의 귀여움을 대대손손 남겨 물려줄게.
“먼저 노란색에 기름을 좀 많이 섞어서 동그라미를….”
…동, 동그라미를….
동그라미가 왜 이러지. 이상하다. 누가 파먹었나? 아니면 누군가 옆에서 눌렀나?
…그럴 리가 없잖아! 일단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부터 난관일 줄이야!
“…….”
“…….”
몇 번 더 덧그려 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비뚤어짐만 더 가득해질 뿐.
두 사람의 반응이 궁금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엔프리제는 웃는 건지 화난 건지 슬픈 건지 알 수 없는 요상한 얼굴로 캔버스를 보고 있었고, 자하는 포기한 건지 난감한 건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기, 자하.”
“일단… 그, 사과는 일단 미뤄 두고 원을 그리는 연습부터 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 과제는 그걸로 하죠. 다음에 제가 올 때까지.”
“네….”
나는, 낮은 한숨을 흘리고 다시 붓을 쥐었다.
* * *
습.
세상에 노력해서 안 될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조금 생각이 바뀌려고 한다. 이놈의 글자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고 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지.
“좀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조금만 더 하구요.”
제일 억울한 건 그거다. 한글 쓸 때 ㅇ을 얼마나 많이 썼는데 내가 동그라미를 못 그리겠어?
근데 왜 붓으로 그리면 안 그려지냐고!
“…샤페릴.”
“네!”
“지금…, 그, 당신을 안으면 안 되겠습니까?”
“…으, 으으….”
아, 좀 더 하고 싶은데.
슬쩍 곁눈질로 엔프리제 쪽을 보았다. 빨개져선 고개를 살짝 돌리고 우물거리고 있는 게,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귀엽다.
끙. 뭐, 이건 나중에 해도 되니까.
붓을 놓고 엔프리제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슥, 몸을 기울여 그의 어깨에 기댔다.
“제가 그림 연습만 하니까 질투 나세요?”
동물한테도 질투했던 남자다. 그림한테 질투한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그런 생각에 물어본 거였는데,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다가 제가 입은 옷한테도 질투하시겠어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아니, 거기서 동의하면 어떻게 해?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진 아닙니다! 하고 부정해야지.
너무 순순히 긍정하니까 할 말이 없어지잖아.
“제가 그림 배우는 게 싫어요?”
“…솔직히 말하면 좋지는 않습니다. 제가 가르쳐 드릴 수 있는 거라면 괜찮겠지만….”
“저랑 자하랑 수업하는 거 보셨잖아요. 서로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흠, 중증이네.
이게 다 작가 잘못이다. 뭔진 모르지만 어떤 과거 설정을 만들었길래 애가 이렇게 자신감이 없는 거야?
“제가 대공님 놔두고 누구한테 마음을 줘요?”
“당신은 그럴지 모르지만…, 다른 남자는 모르지 않습니까.”
살며시 등을 감싼 팔은 이렇게나 듬직한데. 이 남자, 나랑 있으면 계속 이렇게 불안해하려나.
“아.”
그러고 보니 글자.
흠,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낫겠지? 내게는 지금 현실이라도 이 세계는 일단 소설 속 세계다. 그리고 난 여주한테 빙의했고.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내가 뭘 숨기면, 이 세계가 어떻게든 그걸 까발릴 거란 뜻이지.
“저 대공님한테 말해야 하는 게 있어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저 자하한테 부탁해서 글자를 배우려고요.”
아직 배우진 않았다. 그림 카드를 받았을 뿐이지.
오늘은 엔프리제가 들어와서 방해하는 바람에 글자의 ㄱ자도 못 꺼냈고.
“왜… 자하 경한테…?”
“정확히는 지난번에 부탁했어요. 그땐 대공님과 거리를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그랬는데…. 대공님이 제가 멀어지는 게 더 싫으시다니까 사실대로 말하는 거예요.”
“…….”
팔을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또 무언가를 참고 있는 걸까.
“그냥 대공님한테 배울까요?”
“네.”
와, 대답 빠르다. 거의 5G급이네.
“저랑 둘이 붙어 앉아서 공부해야 되는데 괜찮아요?”
“네. 당신이 다른 남자랑 그러고 있는 걸 보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흠.”
슬쩍 손을 들어 엔프리제의 허리를 감았다. 움찔, 하고 단단한 몸이 더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진짜 괜찮아요?”
“…아마도요.”
“알았어요. 그럼 대공님한테 배울래요.”
지금 분위기 괜찮은데 약에 대해 다시 물어볼까? 그리고 내 병에 대해서도.
“근데 대공님,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어떤 겁니까?”
“대답해 주신다고 약속해 주세요.”
“네.”
아니, 뭔지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대답하는 거야?
“뭘 물어봐도 대답해 줄 거예요?”
“…….”
그제야 흠칫한다. 아직 대답할 수 없는 일들이 남아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거겠지.
에이, 물어보지 말고 그냥 물어볼 걸 그랬나. 하지만 엔프리제가 곤란해하는 얼굴을 보는 건….
예쁘긴 하지만 기분 좋진 않으니까.
“저번에 저한테 지병이 있다고 말했잖아요.”
“네.”
“어떤 지병이에요?”
“…….”
아, 또 입을 닫는다.
이유라도 알면 좋겠는데. 설마 진짜로 내가 시한부라서 그런 거야? 아닌데, 원작 소설에 그런 키워드 없었는데!
하긴. 요즘은 숨은 설정 같은 건 키워드로 나타내지 않으니까 그런 거였을지도…. 아니, 뽕빨물에 왜 숨은 설정이 필요한 건데?
어차피 있더라도 씬을 위한 설정일 거 아냐?!
“…그렇죠. 당연히 궁금하시겠죠.”
대답 듣기를 반쯤 포기한 내게, 엔프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