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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42화 (42/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42)

엔프리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 남자. 정말로 상냥한 사람이구나, 라고.

잘못한 건 나였다. 처음부터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짓궂게 군 건 나였다. 그가 이렇게 자신을 탓할 이유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나를 원망하면 편할 텐데.

이 남자는 끝내 자신을 탓하는구나.

“대공님,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손에 넣었던 빛을 잃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건 정말로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일이다. 아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이 좁은 천국에서 행복을 맛보았던 내가 현실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을 때 절망했던 것처럼.

그리고 나도 알고 있다. 그가 말하는, 점점 더 많은 걸 바라게 되는 마음을. 나 역시 점점 더 욕심쟁이가 되어 갔으니까.

“제가 왜 그때 조금쯤은 괜찮다고 했는지. 사실은 전, 그런 말을 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미안하다고 하려고 했지.”

없을 때는, 없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간접 경험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수많은 소설을 보며, 드라마를 보며, 만화를 보며, 게임을 보며 간접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걸로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창작물 속 세계에서 만족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알아 버렸다.

알고야 말았다.

현실에서 그게 이루어진다는 게 얼마나 달콤한 일인지를.

“근데 말이에요.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던 건 분명.”

처음에 바란 건 내 일신의 편안함이었다.

주변의 인물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며 몸 편하게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책 속의 인물들인데.

그건, 정말로… 행복해서.

나는 내가 부지런했던 게 아니라 강제로 부지런해야 했음을 알았고, 내가 어른스러웠던 게 아니라 그렇게 칭찬받는 걸 좋아해서 억지로 그런 척했다는 걸 알았으며….

내가 희생하는 게, 내 마음을 죽이는 게 당연하다 여기는 게 아니라 그저 분쟁이 싫어 눈속임을 하고 있었을 뿐임을 찬찬히 알아가게 되었다.

그걸 알려 준 건 엔프리제와 템버였다.

“정말로 괜찮았으니까라고 생각해요.”

계속 엔프리제 당신이 책 속 인물이라고 내게 되뇐 것도, 이 감정이 단순한 팬심이라고 말해 왔던 것도 그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은 무서웠던 거다. 샤페릴이 아닌 내가 당신을 이성으로 보게 되었다는 게.

당신에게 사랑받으면서도 그게 나를 향한 게 아니라 샤페릴을 향한 것임을 계속 비참하게 여겨야 할 내 미래가.

“저…, 대공님한테 안겼을 때 엄청 두근거렸던 거 알아요?”

엔프리제.

나는 욕심쟁이라서, 분명 이제 내 몸의 편안함뿐만 아니라 당신까지 원하게 되어 버린 거야. 샤페릴의 모든 것을 빼앗은 주제에 당신조차 빼앗으려 하는가 봐.

그리고 분명 이건 당연한 일이었겠지.

샤페릴이 가진 것 중에 당신이 가장…. 내가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고 꿈조차 꿔 보지 못했을 정도로 빛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정도는 사실 매일 해 줘도 괜찮겠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했나 봐요.”

있잖아, 엔프리제.

지금의 나는 감정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분명 이번에는 이 말을 한 걸 후회하지 않을 거야.

왜 그랬는지 의아해하지도 않을 거야.

내가 이 말을 하는 건, 당신이 내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니까. 당신이… 기억을 잃기 전의 나에게 품은 마음은 동경에 가까웠고, 기억을 잃은 후의 나로 인해 마음이 깊어졌으며….

그런 내가 욕심난다고 말해 줬으니까.

알고 있어. 내가 샤페릴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지 않았더라면 분명 당신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겠지.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일도 없었을 거야.

처음에 내가 샤페릴이 아니라는 걸 들켰더라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고.

…하지만 엔프리제. 나는, 당신을 만나고 너무 어리광쟁이가 되어 버렸나 봐. 지금까지의 나라면 이게 내 자리가 아니라고 깨끗하게 포기했을 텐데 지금의 나는….

당신의 말을 너무 기쁘게 받아들여.

이기적인 내가 되어서.

“그러니까, 그….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엔프리제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지켜만 보고 있다. 조금 전의 내가, 이야기를 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듯.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러니까, 그, 정말로… 포옹 정도는 참지 않으셔도 된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어라, 내가 말하려던 게 이거 맞나?

그의 시선을 의식했더니 왠지 긴장이 되어서 머리가 하얘졌다. 왜 중요한 순간에!

“제가 미우신 게 아닙니까?”

“전혀요.”

“저를… 떠나고 싶어지신 게 아닙니까?”

“왜요…?”

“제가 당신을, 그…, 강제로….”

“두근거렸다니까요?”

하긴 강제로 끌어안는 건 좋지 못하지. 그래도 원작에서 엔프리제가 했던 것들을 봐서 그런가.

그 정도면 진짜 많이 참긴 했구나 싶기도….

아니, 그래도 그건 안 되지.

“그럼 이렇게 해요, 대공님.”

나는, 녹아 버린 빙수 그릇을 살짝 옆으로 치우고 그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그리고 짐짓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앞으로 절 안고 싶으면 미리 물어보시는 걸로.”

“…네?”

“생각해 봤는데, 확실히 갑자기 그러는 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럴 린 없지만, 여주 몸에서 설마 그럴 린 없지만!

땀 냄새가 날 때라든가 머리가 부스스할 때라든가…. 여튼 신경 쓰이는 게 있는데 끌어안으면 좀 그러니까.

“크흠. 아무튼. 허락 받고 스킨십 하는 걸로! 어때요? 저도 똑같이 할게요.”

“당신도… 말입니까?”

“생각해 보면 저도 그동안 대공님 손이라든가 너무 덥석덥석 잡은 것 같아요. 남녀 사이라는 걸 잘 모르다 보니…, 그냥 가볍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 정도쯤이야, 라고 생각했지만 이름만 불러도 설렌다는 엔프리제에게는 분명 고통에 가까운 설렘이었겠지. 내가 그랬듯.

“그래서 말인데요.”

“네.”

“저 손 잡아도 돼요?”

“…….”

엔프리제는 난감한 듯 입을 꾹 다물더니, 홱 고개를 돌렸다.

흠, 지금은 싫은가?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빙수 그릇에 시선을 주려던 때 무언가가 시야 끝에서 슥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눈길을 주자 거기엔.

“…….”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이, 그저 파르르 떨리는 제 손만 내민 남자가 있었다.

잠시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그의 손을 보았다가 그의 얼굴을 보았다. 꾹 다문 입술이 떨리는 것도 보였다.

“잡아도 돼요?”

“…네.”

그의 허가가 떨어지고 나서야 그 손을 잡았다. 오랜만에 닿아 보는 그의 온기는 어쩐지 기억보다도 더 뜨거운 것 같았다.

“대공님.”

“네.”

“더우시죠?”

“…네?”

“손이 엄청 뜨거워요. 아, 우리 멜론 먹을까요? 거의 다 녹긴 했지만… 아직 시원할 거예요. 멜론 우유라고 생각하면 맛있게 먹을 수 있지 않을까요.”

씩 웃으며 쟁반을 그에게 밀어 주자, 엔프리제는.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그렇게 중얼거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 * *

“흐흐흐흐….”

“기분 좋은 일이 있으셨습니까?”

헉.

나도 모르게 여주인공에게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를…. 이건 웹소설 읽다가 흐뭇한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흘리던 음침한 웃음일 텐데.

뭐, 괜찮아. 어차피 샤페릴이 하면 뭔들 예쁠 테니.

“그래 보이나요?”

“네.”

자하가 빙그레 웃더니 내 캔버스를 들여다본다. 나름대로 플리를 모델로 해서 그린 그림을 보더니, 빙긋 웃던 게 난감해 보이는 미소로 바뀌었다.

“굉장히… 개성적인 그림이군요.”

“…그렇죠?”

중고등학교 때 미술 수행평가 점수는 나쁘지 않았었는데.

너무 오랜만에 그림을 그려 봐서 그런가. 예전보다 좀 더 못 그리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얀 비둘기라니 드문 걸 그리셨군요.”

“족제비인데요?”

“…….”

자하의 눈이 침대 밑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플리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다시 캔버스로 향한다.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하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플리를 그리신 겁니까?”

“네.”

근데 여기는 하얀 비둘기가 드문 건가? 하긴. 우리나라에서도 하얀 비둘기보다는 회색 비둘기가 많았지.

똥은 하얬지만.

“…일단 사과를 그리는 연습부터 해 볼까요?”

“사과요?”

“원을 잘 그리게 되면 어지간한 형태는 잘 그리시게 될 겁니다.”

원이라.

그림 속 플리의 눈을 보았다. 나름대로 깨알같이 귀여운 눈을 표현하려고 했는데 왠지 모르지만, 공허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동그라미가 거기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눈이 딱 비둘기긴 하네.

“노력해 볼게요.”

“흰색 안료를 더 가져왔어요. 그 외에 더 필요한 색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전하께 말씀해 주세요.”

“네. 근데 사과를 그리는 데도 흰색이 많이 쓰여요?”

“음, 잠시 보여 드릴까요?”

오늘은 처음부터 본을 보여 주려고 준비한 걸까. 자하가 캔버스를 꺼내 자신 앞의 이젤에 얹었다.

그리고 짐짓 심각한 얼굴로 가방 속의 물감 병을 꺼냈다.

아니, 저건 튜브라고 불러야 하나?

“이건 병이 아니네요?”

“아, 유리 튜브입니다. 주사기처럼 이렇게… 뒤를 눌러 압착해 주면 앞으로 물감이 나오는 구조입니다.”

“오오.”

확실히 바늘 없는 주사기처럼 생겼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그 튜브 물감은 없는 건가. 내가 그거 발명하면 대박 나는 거 아니야? 엔프리제한테 한번 말해 볼까.

“유리라서 비싸기도 하고 깨지기도 쉬운 데다 앞의 물감이 굳어 버리면 쓰기 힘들어 자주 사용하는 물건은 아닙니다. 보통은 쓸 만큼 바로바로 만들어서 쓰지요.”

나야 색깔을 몇 개 안 쓰니까 괜찮지만, 나중에 복잡한 그림을 그리려면 며칠은 물감만 만들어야겠는데…?

그땐 엔프리제에게도 도와달라고 할까.

“먼저 연한 노란색으로 대강의 선을 그려 주도록 할게요. 나중에 다른 색의 물감이 올라가면 원래 칠했던 선은 지워지기 때문에 조금 삐뚤어져도 괜찮아요.”

자하가 붓을 잡고 이제 막 색을 찍으려 할 때.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노크 소리와 함께 엔프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왜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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