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41)
진짜 뭐지, 저건. 저런 게 내 방에 있었나?
엔프리제의 시선이 향한 곳은 옷장 뒤편이었다. 뭔가 종이 같은 게 비쭉 튀어나와 있는데, 그림 카드는 아니었다. 새하얀 종이인데.
뭐지?
일단 가까이 다가가 주워 들어 봤다. 하지만 글자를 읽지 못하는 나는 뭐라고 쓰여 있는지 전혀 모른다. 슬쩍 엔프리제를 보자 짐짓 심각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보여서 그러는 건가? 아니면 그냥 내 방에 못 보던 게 떨어져 있어서 그러나?
으으, 신경 쓰여.
“뭐라고 쓰여 있는지 모르겠어요.”
엔프리제에게 종이를 넘겼다. 그는 종이 위를 슥 훑더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뭐예요?”
“별건 아닙니다. 자하 경이 흘리고 간 모양이네요.”
“그게 왜 옷장 뒤에 들어…, 아!”
짚이는 게 있었던 나는, 황급히 옷장 뒤를 살폈다. 그리고.
“플리!”
“삐-!”
“왜 또 여기다가 뭘 집어 넣어 놨어? 세상에! 딸기는 왜 여기다 넣어 놓은 거야?”
“삐-! 삐삐-! 꺄아-!”
“꺄아가 아니라! 물건을 숨길 거면 침대 밑에만 하면 되잖아. 거기도 공간 넓은데 왜 옷장 뒤에까지 그래?”
이것도 족제비의 습성인가? 알 수가 없네, 진짜.
구석진 곳으로 음식을 물어 가서 먹는 건 자주 있는 일이지만, 옷장 뒤에서 뭘 먹은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어제 준 딸기가 여기에 있는 걸 보니 침대 밑에서 먹는 척하다가 이쪽으로 옮긴 모양이었다.
“그럼 저 종이 옮긴 거도 너지? 자하 물건을 왜 네가 숨겨?”
“삐-?”
…저, 저 영특한 것.
귀엽게 굴면 내가 더는 뭐라고 못할 거 알고 고개만 갸웃거린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순진무구한 표정까지 더해서.
이래서 동물들은! 지가 귀여운 걸 너무 잘 안다니까!
“…….”
어라.
이쪽은 왜 또 기분이 상한 거지.
“왜 그러세요, 대공님?”
플리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질투 난다고 했던 건…, 저번에 풀었고. 자기는 아직 이름으로 불릴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했었잖아?
지금 말한 것 중에 문제 될 만한 건….
“자하 경과는… 많이 친밀해지신 것 같군요.”
“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약사님이라고 부르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 아아? 내가 방금 자하라고 했나?
편하게 부르는 게 습관이 돼서 나도 모르게 그랬나 보다. 실수했네. 근데 저렇게 화낼 일인가?
자하를 여기에 데리고 온 것도 엔프리제고, 내 미술 선생으로 붙여 준 것도 엔프리제잖아. 대체 왜 친해졌다고 화를 내는 거지.
“저는 그분께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다니까요? 그분도 저한테 관심 없어요.”
물론 샤페릴이 천상의 미모이긴 하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그 천상의 미모를 사랑하게 되면 인생 너무 고달프지 않겠는가.
게다가 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도, 이성으로서 내게 호감을 보이는 것과 그냥 호의를 보이는 것 정도는 구별할 줄 안다. 자하는 그냥 태생이 상냥한 성격인 거지 딱히 샤페릴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굳이 있는 걸 꼽자면 호기심이려나. 내가 보통의 귀족 영애들과 다르게 행동하니까.
“당신이야말로… 당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셔야 합니다.”
아니, 왜 또 그러는데?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했잖아!
보고 싶어도 혹시 또 행동을 잘못할까 봐 참고 참는 중인데!
“대공님. 저 진짜 진지해요. 설마 절 바보로 보시는 건 아니시죠?”
“…….”
“저번에 대공님 말 듣고 많이 반성해서 저도 지금 열심히 참는 중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그러지 마세요.”
“뭘… 참으신다는 겁니까?”
너에 대한 팬심! 주접!
나한테는, 뭐랄까. 처음으로 생긴 남사친 같은 존재이다 보니 내가 너무 의지하고 감정적으로 구는 면이 있다. 심지어 내 생활 전반이 엔프리제에게 달려 있으니 더 그렇다.
그래서 반성하고 이성적으로 굴려고 노력 중인데. 괴롭히지 않으려고 노력 중인데!
“대공님께서 싫다고 하셨던 것들이요.”
“제가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일단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거의 우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빙수를 잠시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공님은 제가 대공님을 놀린다고 생각하시잖아요.”
“…지금은 아닙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하여간, 그거 때문에 여러모로 괴로우시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그, 대공님에 대해 너무 직설적으로 마음을 표현하거나 친근하게 구는 행동을 할 때요.”
“그건….”
보통의 소설이면 여기서 남주 말을 끊어 버리고 여주가 계속 말을 하겠지. 하지만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엔프리제는 자기 속내를 잘 이야기하나 싶다가도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리기 일쑤였다. 뭐라고 해야 하지. 자존감이 굉장히 낮다고 해야 할까?
아마 템버가 말한, 어렸을 때 배워야 할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 원인이 지금의 자존감 낮은 그를 만든 게 아닐까.
아마 속내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도 내 텐션에 이끌려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엔프리제는 스스로의 의지로 내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려고 하고 있었다.
“괴로웠…던 것은 맞지만, 싫었던 건 아닙니다.”
으음,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괴로운 건 보통 싫기 마련 아닌가? 왜 괴로운데 싫지는 않다는 거지.
“이미 당신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엔프리제는 지금까지, 두 사람 모두가 피해 왔던 이야기를 꺼냈다.
* * *
처음이라 그리 불러도 좋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엔프리제는 이것이 사랑이라고 느꼈다.
사랑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봤던 그날부터, 계속.
“처음에는 동경에 가까웠던 건지도 모릅니다.”
마치 성녀, 아니, 여신처럼 느껴졌었다.
샤페릴이라는 존재는, 감히 더러운 피 도둑놈이 손을 뻗어서도 입에 담아서도 안 될 고귀하고 성스러운 존재라고까지 느껴졌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사람.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자유로운 사람. 그 어떤 소문에도 흔들리지 않고 편견을 가지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었다.
“당신께선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연회 같은 곳에서 마주치면 당신을 지켜보곤 했죠.”
괴롭진 않았다. 처음부터 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조금 슬프긴 했다. 처음으로 이성에게 느낀 연정이, 이렇게 허무하게 스러져 가는 것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사정이 있어 당신을 여기에 모시게 된 후로는 정말로 괴로웠습니다.”
지키기 위해선 뭐든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녀에게 미움받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접점조차 없어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이, 혹여 말 한마디 걸었다가 괜히 그녀에 대한 안 좋은 중상이 떠돌게 될까 봐 그저 몰래 훔쳐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로 미움받게 되자 괴로웠다.
“당신은 기억을 잃기 전에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밝고, 사랑스럽고,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의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했습니다.”
알면서도 내보낼 순 없었다.
그녀에게 닥친 위험을 알면서도 놓아주기엔, 엔프리제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지켜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는… 선택했습니다. 당신이 절 미워하고 혐오하시게 되더라도 당신을 지키겠다고.”
중요한 게 비어 있는 이야기였다.
샤페릴은, 일부러 엔프리제가 그것을 제외한 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섣불리 끼어들어 그의 이야기를 가로막지 않았다.
분명 그건 엔프리제에게 있어서 아직 말할 수 없는 것인 듯했으니까.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엔프리제는 사랑을 이유로 샤페릴을 납치한 게 아니었다. 사랑을 갈구하며 이 저택에 가둔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로부터 샤페릴을 보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원작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갔던 것일까.
샤페릴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처음 만났던 날, 당신은 저에게 웃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저택에 처음 당신을 모셔 온 날, 눈을 뜬 당신이 절 보는 눈동자를 보고 그 웃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직감했습니다.”
주르륵, 하고 물방울이 그릇을 타고 흘러내렸다. 샤페릴에게서 시선을 피한 채 물방울을 바라보며 엔프리제는 말을 이었다.
“그랬던 당신께서 제게 웃어 주셨습니다.”
울컥, 하고 콧잔등이 뜨거워졌다. 무언가가 솟아 눈가를 맴돌기에 엔프리제는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을 참아 내기 위하여.
“그 후로 당신께서는 제게 많은 걸 주셨습니다. 분에 넘치는 말들도, 당신과의 친밀한 관계도. 정말로 바라지도 못하던 것들을 잔뜩 받았는데도.”
엔프리제가 꽉, 주먹을 쥐었다.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놈인지를, 얼마나 욕심 많고 추악한 놈인지를 제 입으로 드러내야만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오해한 채로 있는 건 더 싫었다.
이대로 서먹해지는 건 싫었다.
손에 넣지 못한다고 포기했을 때는 아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손에 넣은 것은… 너무나 달콤하고 연약해서.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 위태로워서.
잃으면 그 파편에 찔려 죽을 것 같아서.
“저는 그 이상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엔프리제는 눈을 떴다.
그리고 샤페릴을 보았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고요한 눈으로, 그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눈을 피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조용히.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괴로웠던 건 제 욕심 때문입니다. 혹여 제 욕심이, 이 작은 마음을 채우고 넘쳐흘러 당신을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제가 당신께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건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만은… 알아주십시오.”
엔프리제의 말이 끝났다.
그리고 잠시 이어진 침묵 뒤에.
“…….”
샤페릴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