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40)
“샤페릴은?”
“방에서 물감을 만들고 계세요.”
“그래….”
안절부절못하시긴.
템버는 피식 웃고는 냉동실에서 얼린 멜론과 우유가 든 통을 꺼냈다. 엔프리제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우유를 얼린 거야?”
“네. 멜론이랑 같이요. 이렇게 해서 갈아먹으면 맛있어요. 지난번에 드렸던 게 맛있었는지 또 찾으시더라구요.”
지난번이라니, 대체 언제를 말하는 걸까. 템버는 속이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자신을 보는 엔프리제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마법 도구들이 점차 발전해서 좋은 것 같아요. 제가 젊었을 때는 이 여름에 얼음 한번 먹으려면 생고생을 했었는데.”
“그대가 젊었을 때면 적어도 서른 해도 전….”
“굳이 상기시켜 주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전하.”
나이를 먹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나이를 먹으면서 무언가를 잃어 간다는 게 서글펐다.
비록 샤페릴만큼은 아니었지만 템버도 젊었을 적 꽤 미인으로 통했다. 그녀 역시 누군가의 꽃이었고, 빛이었던 때가 있었다.
주름진 지금의 얼굴도 꽤 마음엔 들었다. 그 주름에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세월이 새겨져 있으니까.
다만 잃어버린, 자신의 피부에 새겨져 버린 젊은 날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서글플 뿐.
그런 미묘한 마음을 모르니까.
“그래서 아가씨께 미움받는 거예요.”
“…하.”
최근 일주일.
이상할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 서먹한 기류가 감돌았다. 샤페릴 역시 무언가를 숨기는 데 그리 능한 사람이 아니라 알아채기 쉬웠고, 애초에 엔프리제는 템버의 눈을 속일 수가 없었다.
그 전에 며칠간은 이상할 정도로 달달한 기류가 감돌더니. 대체 뭘 또 잘못하셨길래 일이 엇나간 걸까.
“전하께서 또 둔감한 말이나 행동을 하신 거죠? 아가씨는 알기 쉬운 분이라 분명히 티가 났을 텐데.”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 하지만 모르겠어. 뭐가 잘못된 건지.”
“무슨 일인데요.”
“…샤페릴이…, 기억을 잃고 난 후의 샤페릴이 무서웠어.”
“무서워요?”
“…너무 듣기 좋은 말만 해 줘서, 너무 사랑스러운 행동만 해서.”
엔프리제는 행복이라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호의라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템버는, 엔프리제로서 살아 본 적이 없어서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다만 그 어둠밖에 없는 삶에 스며든 빛이…, 너무 강해서 무서울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겁을 주려고 했을 뿐이야.”
“네?”
“너무 그, 사랑스럽게 굴지 말라고.”
귓바퀴가 빨개지는 걸 보니 뭔가 저지른 모양이었다. 부끄러워할 만한 행동이라.
설마 입맞춤이라도…?
아니, 엔프리제가 샤페릴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성에 대한 것이기도 했지만, 신앙 같은 면이 있었다. 소중하고 신성해서 쉽게 손댈 수 없는….
그런 그가 샤페릴에게 난폭한 행동을 했으리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끽해야 끌어안는 정도 아니었을까?
그것도 억지로 했다면, 지탄받아야 마땅할 행동이긴 하지만.
“그랬더니 아가씨가 싫어하셨어요?”
“조, 조금은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해도 된다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길래….”
설마 진짜로 난행을…! 템버가 저도 모르게 입가를 손으로 막았다.
“나도 남자라고…, 너무 그러시면 참기 힘들다고….”
엔프리제의 목소리는 숫제 기어가는 개미만 했다.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그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던 템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을 했을 뿐이지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진 않으셨다는 뜻인 듯했기에.
“그랬더니 죄송하다면서 울더군.”
“울어요…?”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샤페릴이 밝고 상냥한 성격이라 그렇지, 다른 여자였으면 뺨을 때려도 모자랐을 것이다. 허락하지도 않는 스킨십을 하는 남자를 용서할 레이디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울었다니. 대체 왜…?
템버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후로 계속 저 상태야. 차라리 화를 내면 미안하다고 하겠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행동하니까 더 모르겠어.”
이건 템버가 도와줄 수 있는 영역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조언은 해 줄 수 있었다.
“전하. 제가 이걸 다 갈면, 전하께서 아가씨께 가져다주시겠어요?”
“…내가?”
“저는 지금부터 청소로 바쁠 예정이어서요. 그 정도는 도와주실 수 있죠?”
“차라리 청소를 도우면 안 될까.”
“무슨 말씀을! 가주님께 청소 같은 걸 시켰다간 저는 시녀들의 입방아에 올라 가루가 될지도 몰라요.”
어차피 이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템버는 너스레를 떨며 대패처럼 생긴 것을 꺼내 얼음을 갈았다.
우유로 된 얼음은 쉽게 부스러져 힘들이지 않고 얇게 갈렸다.
“아, 이런. 제가 먹을 것까지도 갈아 버렸네요. 저는 청소를 해야 해서 못 먹는데. 이렇게 되어 버리면 금방 녹아서 빨리 먹어야 하는데. 어쩐담.”
엔프리제는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템버가 들고 있는 그릇을 받아 쟁반에 담았다. 그리고 숟가락 두 개까지 옆에 나란히 놓았다.
“이상한 연기는 그만하고 어서 청소하러 가도록 해.”
“그럼 잘 부탁드려요, 전하.”
생글생글 웃으며 배웅하는 템버를 뒤로 하고, 엔프리제는 낮은 한숨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 * *
“플리, 빙수 오면 너도 먹을래?”
“삐?”
“근데 먹어도 되나?”
“삐-!”
엔프리제한테 물어보…긴 좀 그렇지.
뭐든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때가 좋았는데. 하긴, 내가 마냥 좋으면 누군가에게는 싫은 점도 생기는 법일 테니 어쩔 수 없지.
“먹고 또 글자 공부해야지. 그래도 이제 자음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모르는 것 같기도 해. 자하가 오면 물어봐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템버인가?
드디어 빙수가…!
“접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엎드린 자세로 있다가 빙수를 향해 달려가기 위해 애매하게 몸을 일으켰던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지금 엔프리제 목소리였지?
쟤가 지금 여기 왜 와?
“…레이디 리베테?”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는 했지만, 꼬박꼬박 레이디 리베테라고 부르는 건 어쩐지 기분 상하네. 내 마음이 내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 감정적이 된다.
…원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는 건 이런 거려나?
엔프리제가 그랬듯, 내가 그렇듯.
“무슨 일 있으십니까? 레이디 리베테?”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잠시만요.”
일단 자세를 바로 잡았다. 또 이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면 안 되니까.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머리카락도 뒤로 넘겼다.
혹시 이상한 곳은 없는지 거울 앞에서 잠시 확인하고 난 뒤에야 문을 열었다.
“늦게 열어서 죄송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템버가 이걸 가져다드리라고 말하더군요.”
“아.”
빙수다!
엄밀히 말하면 제빙기로 자잘하게 갈아 낸 빙수랑은 좀 다르지만, 뭐 어때. 맛만 좋은걸. 나는 환하게 웃으며 쟁반을 받아 들었다.
…응? 근데 왜 숟가락이 두 개래?
“숟가락은 왜….”
“…너무 많이 갈았다고 저도 같이 먹으라고 하더군요.”
템버…! 그런 배려는 없어도 돼요!
끄응. 같이 먹으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것 같은데. 하지만 엄밀히 이 저택 주인은 엔프리제인데 쫓아낼 수도 없고. 이거 다 엔프리제 돈으로 산 거고.
내가 혼자 먹겠다고 하면 그냥 순순히 물러날 테지만, 그러면 내가 거부하는 줄 알고 또 상처받을 거 아니야.
“그…, 들어오세요.”
…잠깐. 그림 카드 정리했던가?
전생에서는 주변에서 살짝 질려 할 정도로 정리에 집착했다. 동생이 하도 어지르는 성격이라, 내가 바로바로 정리하지 않으면 집안 꼴이 난장판이 나기 마련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나는 동생 정도는 아니지만, 사실 정리도 좀 미뤘다가 한다. 그렇다는 건.
“헉…!”
역시나!
탁자 위에 널브러진 그림 카드가 떡하니 보인다. 방 안으로 들어오려던 엔프리제가, 내가 문을 열어 주지 않자 의아한 듯 나를 보았다.
“저, 저기, 대공님.”
“네?”
“저한테 5초만 시간을 주세요.”
“네?”
“그, 뭐야. 뺨에 뭐가 묻은 걸 방금 발견했어요. 이것만 닦고 다시 열어 드릴게요.”
“뺨에요? 제 눈에는 안 보입니다만.”
아, 이, 익!
고기도 먹어 본 놈만 먹어 본다더니 거짓말도 해 본 놈이 잘하나 보다. 독자일 때는 왜 맨날 들키는 거짓말을 하냐면서 비웃었는데 이젠 내가 그러고 있네!
망할!
“아무튼! 5, 5초만 기다려 주세요!”
쾅, 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바로 열면 어쩌나 하고 잠시 기다렸지만 열 기색은 없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내가 기다리라고 했으니 엔프리제 성격에 막 문을 열어젖히진 않겠지.
그럼 저걸 어디다 숨기지?
잠시 망설이던 나는, 오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림 카드를 집어 서랍장 속에 밀어 넣었다. 침대 근처에 두면 요즘 내 물건을 물어 가는 데 재미를 붙인 플리가 꺼낼지도 모르니까.
혹시 떨어진 카드가 없는지 다시 확인한 후 후다닥 달려가 다시 문을 열었다.
“…….”
명백하게 기분이 상한 듯한 표정의 엔프리제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아까 내가 문을 닫았을 때부터 계속 이 자세로 서 있었던 걸까.
“죄송해요. 이제 들어오셔도 돼요.”
문을 열어 주고 살짝 비켜나자 엔프리제가 말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금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방 안을 훑는 게 느껴진다.
엔프리제에게서 뭔가가 느껴진 걸까. 최근 데면데면하게 굴던 플리가 살짝 경계하더니 털을 세운 채 침대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왜, 왜 그러세요? 얼음 다 녹겠어요. 빨리 먹어요, 우리.”
그렇게 말하며 슬쩍 서랍장을 확인했다. 응, 제대로 닫았어. 티 안 나. 쫄지 말자.
“…네.”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자리에 앉은 엔프리제가 쟁반을 내려놓았다. 우유로 된 얼음이라 그런가. 벌써 살짝 녹아내렸다.
그래도 이게 또 맛있지.
“…근데 저건 뭡니까?”
맛…있….
…….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엔프리제가 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거기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