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39)
“어서 와요, 자하.”
템버에게 이끌려 온 자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는 엷게 웃더니 템버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드실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홍차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아가씨는 뭘로 가져다 드릴까요?”
으음, 이제 본격적으로 더워져서인지 슬슬 차가운 게 당긴다. 차갑게 먹을 수 있는 허브 티….
뭐가 좋을까.
“엄청 차가운 게 먹고 싶어요.”
“엄청…?”
“네!”
근데 이 계절에 얼음이 있나?
마법이 있으면 얼음도 있지 않겠나 싶긴 한데. 확신이 없으니까 뭐라고 말하기 좀 그렇네.
아이스티 같은 게 있음 좋겠는데.
“멜론을 얼려 둔 것이 있는데 갈아 드릴까요?”
“멜론을요?”
“가끔 제가 간식으로 먹는 건데 맛있어요. 멜론을 잘게 잘라 우유와 함께 얼려 둔 후에 갈아서 먹으면 얼음 가루가 사각사각하고 씹히거든요.”
오오, 듣기만 해도 맛있겠다.
“좋아요.”
“그럼 그걸로 가져다 드릴게요. 다과는 뭐가 좋으세요?”
“전 멜론 얼린 것만 있으면 될 것 같아요. 자하는요?”
“저도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흘끗 나와 자하를 번갈아 본 템버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그녀가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고 있다가, 살짝 문을 열어 확인까지 하고 나서야 나는 자하의 맞은 편에 앉았다.
“가져왔어요?”
“네. 예전에 제가 쓰던 것이라 조금 낡았지만….”
“자하가 쓰던 거요? 이걸로 공부한 거예요?”
“네.”
주섬주섬 가방 안에서 꺼낸 그림 카드는, 누가 봐도 오래된 게 보였다. 끝이 누렇게 뜬 데다 귀퉁이도 너덜너덜하고.
그런데도 맨 위의 사과 그림은 꽤 선명했다.
“새 걸 사 오는 게 나을까 싶었는데…. 최근에 나온 교재들은 대부분 글자에만 초점이 맞춰져서 배우기 어려워 보이더군요. 이런 그림 카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저도 이런 게 좋아요.”
한글을 배울 때도 그랬다.
유치원에서 한글 자음모음표 같은 걸 줬었지만, 솔직히 외우기 힘들었다. 그것보다는 그림을 보며 단어를 통째로 그림 그리듯 외우는 게 더 쉬웠다.
아니, 재미있었다고 해야 하나. 안 그래도 글자 모양도 복잡해서 머리 아픈데 처음부터 그걸 외우라고 했으면 짜증 냈을지도.
“게다가 엄청 소중히 보관하셨나 봐요. 그림이 여전히 선명한데요?”
생글생글 웃으며 그리 말하자, 자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민들은 글자를 배울 기회가 그리 없습니다. 이런 종이도 사실은 비싸서 그리 손에 넣을 수가 없죠. 어린 제가 철없이 글자 배우고 싶다는 말을 기억해 두셨다가 학교에 가서 버리는 그림 카드를 몰래 주워 오셨다더군요.”
…좋은 부모님이구나, 싶었다.
우리 부모님처럼 금전적으로는 풍족하게 해 줄 수 있었지만, 다른 건 해 줄 수 없었던 부모님도 있을 거고 자하의 부모님처럼 가난해도 다른 건 풍족하게 채워 주려 노력한 부모님도 있는 거겠지. 다만 나는….
솔직히 말하면 가지지 못한 쪽이 부럽다. 이런 말을 하면 자하는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좋은 부모님이시네요.”
“네. 열심히 공부한 것도 부모님을 편하게 모시고 싶어서였으니까요. 지금은 나름대로 만족스럽습니다. 너무 공부만 하다 보니 장가를 못 가서 걱정하시지만요.”
아, 이 흐름 딱 그건데.
여주 시녀랑 자하랑 짝짜꿍해서, 어?
시녀는 보통 귀족 영애니까, 자하에게 부족한 집안을 채워 주고 자하는 시녀의 부족한 무언가를 채워 주면서 꽁냥꽁냥 조연 커플이 되는 루트가 딱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템버랑 자하는 나이 차이가 너무 난다.
서로 좋아한다면 괜찮겠지만…. 으응, 애초에 템버가 결혼했는지도 확인해 봐야 할 테고.
“자하는 어떤 여자가 좋은데요?”
“글쎄요. 아직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으음, 나이를 묻는 건 실례예요?”
“아니요. 올해 서른입니다.”
헉.
보통 로판 세계에서는 10대나 그보다 어릴 때 약혼하고 성인 되자마자 결혼하는 루트 아니던가?
하긴. 시대나 세계관이 무슨 상관이야.
결혼하고 싶으면 하고 말면 마는 거고. 바빠서 못 한 사람도 있는 거지.
“자하는 좋은 사람이니까, 분명 금방 좋은 반려가 나타날 거예요.”
능력 있지, 잘생겼지, 키 크지, 성격 좋지. 빠지는 곳 없으니 금방 좋은 사람이 나타날 테지.
“그럴까요?”
“물론이죠.”
동서고금 막론하고, 착한 사람은 주변에도 좋은 사람들이 가득한 법. 현실에서야 다소 다름이 있을지 모르지만 창작물 속에선 늘 그랬다.
조심해야 되는 건.
“근데 오지랖 부리지 않게만 조심하세요.”
“오지랖요?”
“네.”
도와달라고 해 놓고 이건 좀 이상한 소리일지 모르지만, 뭐…. 글자 공부 좀 도와줬다는 이유로 엔프리제가 자하를 어떻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괜히 큰일에 끼어들어서 누구를 구하려고 한다거나 하지 마시고요.”
“큰일이라니….”
“그런 거만 조심하면 분명 잘되실 거예요. 오래오래 화목한 가정에 둘러싸여서 행복한 삶을 살 게 틀림없어요.”
착한 조연들이 죽는 이유의 대부분이 그거거든. 위험한 처지에 빠진 주인공을 도우려다가 대신 죽거나 스토리 흐름상 죽거나.
이게 그냥 소설이었다면, 자하는 딱 봐도 나중에 죽을 캐릭터네 하면서 넘겼겠지. 하지만 나는 자하를 만나 버렸다.
이렇게, 책 속의 세계에 내가 들어와서.
막상 앞에 두고 뒤에 어떻게 될지가 대충 읽히는데 입 다물고 있기는 좀 그랬다. 심지어 날 도와주는 사람인데.
“…샤페릴은 정말 이상한 사람입니다. 혹시 기억을 잃으면서 미래를 보는 눈이라도 얻으신 건가요?”
“설마요. 그냥…,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괜히 그런 생각이 들 때.”
“그렇습니까?”
“흠흠. 그러니 꼭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고 단언하는 게 아니에요. 혹시 그런 일이 생기면 몸을 잘 사리라는 거지.”
“명심하겠습니다.”
피식 웃은 자하가 내게 그림 카드를 건넸다. 사과 카드 뒤를 살피자 전혀 읽을 수 없는 꼬부랑 글자가 튀어나왔다.
알파벳 같은 구조려나. 하.
“자음과 모음은 합쳐서 총 40개 자입니다. 그걸 조합해서 다양한 글자를 만드는 거죠.”
어? 한글 자음 모음 개수랑 같은 것 같은데?
“자음은 몇 개고 모음은 몇 개인데요?”
“자음은 총 19개, 모음은 21개입니다. 기본 글자는 자음 14개, 모음 10개고 나머지는 그 파생 같은 것이니 한 번 습득하면 그리 어렵지 않으실 거예요.”
오, 한글이랑 구조가 같은가 보다.
이제 바랄 건 이 글자들이 나름의 변별력이 있기를 바랄 뿐. 잘 외워져야 할 텐데.
7살짜리였을 때도 한글 외우는 데 그리 오래 안 걸렸는데, 지금은 더 쉽지 않을까? 그래도 성인인데!
“고마워요, 자하. 열심히 해 볼게요.”
“다음에 왔을 때 모르겠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자, 그럼 오늘은 저번에 젯소를 발라 두었던 캔버스에 색을 칠해 보도록 하죠.”
주섬주섬 가방에서 여러 모양의 새 붓과 나무로 된 팔레트, 나무로 된 작은 통, 여러 크기의 페인팅 나이프와 찰랑이는 액체가 차 있는 물통 같은 걸 꺼냈다.
“와, 준비물이 엄청 많네요.”
“천도 필요합니다만, 그건 레이디 템버가 준비해 주신다고 하셨으니 그 전에 잠시 붓과 도구에 대해 설명해 드리도록 하지요. 이 붓은….”
그렇게 나는, 템버가 올 때까지 자하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 * *
“…으아아아! 플리이!”
“삐-!?”
오늘은 웬일인지 침대 위에 올라와 있는 플리에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라 한 번 도망갔던 플리는, 내가 침대 위에 철퍽 엎어지자 잠시 후 조심스럽게 다가와 얼굴 주위를 맴돌았다.
살짝 손을 내밀자 플리가 손 위로 올라왔다.
“플리. 난 왜 그런 오만한 생각을 했을까?”
“삐-?”
어린아이의 머리가 더 유연하다는 둥, 영어는 조기 교육이라는 둥 하는 소리를 들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글을 통해 언어의 구조를 알고 있는 어른들이 더 잘 배우지! 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내 경우, 초등학교 들어가서 영어나 중국어를 시작했지만 크게 어려움이 없었고.
하지만 잘못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라도 시작했으니까 문법이나 단어나마 잘 외운 거였다. 지금의 내 머리는 완전히 썩었어!
“플리이, 나 너무 힘들어어.”
이래서 할머니가 맨날 머리 빈 년이라던가 멍청한 년이라고 불렀나?
그 말에 대한 반발심으로 더 공부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던 나는 어디 가고, 겨우 40여 개의 글자를 외우지 못하는 나만 남게 된 걸까.
이놈의 글자는 복잡하기도 더럽게 복잡해서 끊어지는 부분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어린 아이용 그림 카드라 쉽게 만들어진 걸 텐데. 그걸 찾지 못하는 내가 멍청이인 건가?
내가 멍청인가!
“난 멍청이야아!”
“삐-! 끼우, 끼유?”
파닥거리며 발을 동동 구르자 플리가 한 발 물러났다가 다시 다가온다. 킁킁하고 냄새를 맡는 것이 경계하는 모양이다.
하긴 요즘엔 플리랑 있을 때 끌어안고 자거나 털을 빗어 주거나 놀아 주는 것밖에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여기도 반려동물용 장난감 같은 게 있을까?”
생각해 보니 꼭 엔프리제랑 놀지 않아도 되잖아. 플리랑 놀면 되지!
간단한 게임이라면 같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 고양이나 강아지들 놀아 주는 낚싯대 같은 그거, 그런 거 없으려나. 나도 운동 되고 좋을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호신술 가르쳐 달라고 하는 거 잊어버렸다.”
흠.
침입자가 들어온 지 일주일하고도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엔프리제와 데면데면해진 지는 닷새.
계속 이야기는 했지만, 뭐랄까. 서로 형식적인 이야기만 하는 느낌이었다.
내게서 뭔가 이상한 걸 느낀 걸까? 아니면 엔프리제가 받은 상처가 내 생각보다 커서 날 피하는 걸까.
“플리.”
“끼우?”
“다시 엔프리제랑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빨리 내가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오늘 아침에 책 읽어 줄 때, 처음으로 엔프리제의 낭독을 들으면서 깨어 있었다. 너무 긴장된 탓이었겠지.
안 보려고 해도 계속 엔프리제한테 시선이 가고, 목소리에 심장이 약하게 두근거렸다. 그렇다고 귀를 막을 수는 없어서 결국 주먹을 꽉 쥔 채 참아 내야만 했다.
그리고 끝나자마자 혹시라도 목소리가 너무 예뻐서 내용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든가, 설레서 무슨 시를 말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쫓아 보내 버렸다.
으으. 빨리 엔프리제한테 익숙해져야 할 텐데. 글자도 빨리 습득해야 할 텐데.
“플리이이-!”
“삐-!”
큰 소리로 플리를 부르며 꽉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플리는, 안타깝게도 휙 뛰어오르더니 쪼르르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홀로 침대 위에서 한참을 더 파닥거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