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38)
“글씨 말씀입니까?”
“네. 배우고 싶은데 많이 어려울까요?”
“저보다는 전하께 여쭤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자하의 말에 웃는 얼굴인 채 표정이 굳어 버렸다. 그의 말이 옳았다. 일주일에 두 번 오는 자하보다는 매일 오는 엔프리제에게 부탁하는 게 맞겠지.
하지만, 그.
“약사님도 아시겠지만…, 대공님께서 좀 잘생기셨잖아요?”
“네….”
자하의 얼굴이 떨떠름해진다. 왠지 애인 자랑 늘어놓는 팔불출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좀 쓰리다. 하지만 이건 결이 다르다!
나는 애인이 아니라 팬이라고!
“이게, 그러면 안 되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생각이나 마음과 다르게 말이나 행동이 나올 때가 있잖아요?”
“그렇죠…?”
“제가 지금 그러거든요.”
아무리 굳게 다짐해도 이게 얼굴을 보면 잘 안 된다.
성덕의 마음이 이런 걸까? 자꾸 건드리고 싶고 만지고 싶고 반응을 보고 싶고. 오늘도 그걸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일부러 다른 데를 쳐다보면서 최대한 엔프리제 쪽은 안 보려고 노력했다. 너무 피하면 눈치 볼 것 같아서 말을 나눌 땐 일부러 눈을 더 봤다. 거짓말 하면 눈을 못 마주친다는데, 이 정도 했으면 믿어 주지 않을까?
평소의 나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걸.
다시 생각해도 완벽했어, 난. 응응.
“무슨 의미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공님이 되게 순진하시잖아요.”
“순…진이요?”
아, 그 얼굴에 순진은 좀 아닌가? 그래도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데.
“순수?”
“순수….”
“에잇, 어쨌건!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투신 분이잖아요.”
“아, 네. 그렇죠.”
드디어 이해했나. 하긴, 뭐든 남을 이해시킨다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긴 하지. 같은 현상을 봐도 다들 다른 감상을 느끼니까.
내 기준으론 아무리 봐도 순진이 더 어울리는 말 같은데.
“근데 저는 돌려 말하는 걸 잘못하는 성격이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돌려 말할 생각이 없지만.
어차피 엔프리제도, 템버도 샤페릴을 오구오구 해 주기만 하는데 굳이 돌려 말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 …라고 어제까지는 생각했지.
너무 어리광을 피운 탓인가. 오늘은 좀 돌려 말하려고 애썼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20여 년을 납작 엎드려 살았는데,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해 온 게 더 편하고 몸에 빨리 익는다는 게 참 신기하다.
“글자를 배우려면 가까이 앉아서 얼굴 마주 보고 계속 그, 공부를 해야 하잖아요.”
“네.”
“그럼 제가 참을 수 있을는지….”
낮은 한숨을 내쉬자, 자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엔프리제는 좀 더 강렬한 빨강으로 물드는데….
같은 흰 피부라도 이렇게 다르구나.
…근데 왜 빨개지는 거지?
“약사님?”
“확실히…, 이런 대화는 전하께는 좀 자극적일 것 같군요.”
“이런 대화?”
뭐가 문제였지.
찬찬히 돌아보다가 내 말의 문제점을 발견했다. 아니, 그게 그런 뜻이 아닌데….
“약사님, 제가 아무리 솔직해도 그, 그런 걸 막 이야기하진 않아요!”
“네…?”
“참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건, 저번에 약사님 앞에서 저질렀던 그걸 말하는 거예요.”
“제 앞에서요?”
아직도 감이 안 잡히나 보다. 내가 너무 목적어를 빼고 말하나.
그래도 내 입으로 말하긴 좀 쑥스러운데.
“그, 있잖아요. 대공님에 대한 칭찬이나….”
“아.”
자하가 이해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난 여태껏 별문제 없이 의사소통하고 살아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이쯤 되면 내가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확실히….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발언을 하시는군요.”
“윽.”
마음이 따끔거린다.
일부러 그런 건 10퍼센트도 안 되는데! 그, 그런 오해의 90퍼센트는 우연과 실수와 착각으로 이루어져 있단 말이야.
…10프로는 일부러 그런 거 맞지만.
“하지만 대화하지 않으면 오히려 오해가 더 커질 겁니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뭐랄까.
지금까지 나는 내가 참을성이 강한 인간인 줄 알았다. 그래서 엔프리제에 대한 어리광도 딱 끊어 버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왜일까?
마치 무너진 둑 같은 느낌이다.
버티다 버티다 넘쳐 버린 둑. 그 위로 끝없이 물이 쏟아져 내려서, 무너진 부분이 수복이 안 된다. 무너진 부분을 메울 수 없으니 당연히 물도 멈추지 않는다.
그 악순환의 반복.
한 번 넘쳐 버린 감정이 더는 멈춰 있기를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아니, 자제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잖아요.”
그럼. 나는 할 수 있다!
25년의 삶, 거짓말로라도 평탄하다고는 부르기 힘든 삶이었다. 그걸 견뎌 내고 이걸 못 참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일단 알았습니다. 저한테 부탁하신 이유는 납득했습니다만, 글씨는 왜….”
“찾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여기 온 첫날, 자하는 내게 약에 대해 설명하려다가 끌려 나갔다. 그 후에 다시 말하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엔프리제에게 입단속을 당한 거겠지.
그럼 물어봤자 의미가 없을 거다.
“그러니까 도와주실 거죠?”
사실 이것도 위험도가 있긴 했다. 자하가 혹시라도 엔프리제에게 다 일러 버리면 오해를 푸는 데 또 한참 고생할 테니까.
그래도 약사인 자하를 처음부터 저택에 부르지 않은 걸 보면, 엔프리제는 이 남자를 완전히 신용하진 않는 것 같다. 즉 완전히 엔프리제의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글자 공부를 도와드리긴 힘들지만, 아이들이 사용하는 그림 카드나 책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 고마워요, 약사님!”
“자하로 충분합니다, 레이디 리베테.”
아, 약사님이라는 칭호가 좀 부담스러웠나? 신분을 알 수가 없어서 그렇게 불렀는데.
“대공님은 경을 붙여서 부르시던데, 저도 그렇게 해야 하죠?”
“아니요. 저는 평민이라서…. 전하께서는 저에 대한 예우의 의미로 그리 불러 주시는 것뿐입니다. 편하게 그냥 자하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오호, 평민.
평민인데 이 미모에 이 성격. 틀림없이 귀족들에게는 차별받으면서도 평민들에게는 지지를 받는 캐릭터겠지.
어쩌면 중요 조연 캐릭터쯤 될지도 모르고.
“네, 자하. 그럼 자하도 절 편하게 샤페릴이라고 불러 주세요.”
“하지만…, 귀족 영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지라.”
“에이, 제 기억이 없는 건 이미 들으셨죠? 귀족 영애였던 기억이 없는데 평민이랑 뭐가 다르겠어요? 그냥 편하게 부르셔도 돼요.”
알맹이는 평민이고.
아니, 서민…. 소시민…? 그래도 천민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러시다면…, 이렇게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렇게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사실대로 말하면 그 호칭 같은 거 너무 어려워서 좀 그랬거든요.”
오글거리고.
책으로 읽을 땐 괜찮았는데 막상 입으로 내서 말하려니까 너무 오글거린다. 다른 빙의물 여주들은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연기를 하는 거지.
나는 글렀어.
“저는 샤페릴을 만난 적이 거의 없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라도 원하신다면 들려드릴까요?”
흠.
필요한 초기 설정은 어차피 소설 초반에 다 나와서 알고 있다. 그 외에 다른 게 필요한가?
아, 내 지병에 대한 거.
하지만 그건 지금 입막음 당한 건지 말을 안 하잖아. 그럼 굳이 다른 건 들을 필요 없지 않을까.
“괜찮아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귀족 영애였던 샤페릴이.”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 되겠죠? 일단은 제 일이니까. 그래도 없어도 괜찮아요.”
자하의 표정이 오묘하다. 보통은 이렇게 가르쳐 준다고 하면 덥석 달려들어야 정상일 테니까.
“언젠가 대공님께서 제게 말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이 사슬과 족쇄가 풀린 것처럼. 언젠가는.
병이나 약에 대해서도 언젠가 말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랄까. 하나하나씩 나에 대한 정보를 푸는 것과 달리 그건 대놓고 물어보는데도 가르쳐 주지 않는 게 좀 걸린다.
분명 끝은 해피 엔딩일 거라고 믿고 있지만….
혹시나, 만에 하나 아주 드물게 있는 배드 엔딩이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내 병이 심각한 거라 엔딩쯤에는 죽는 거면 어떻게 하지?
사람은 누구나 죽긴 한다. 하지만 묘한 보상 심리가 발동한다.
25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여기서도 25년은 살아야지. 50살까지는 살아야지, 못해도!
그런 심리?
어쩌면 내가 처한 환경이 달라져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뭐랄까. 그냥 죽으면 죽는 거지, 라는 생각이었다.
죽으면 밥 안 해도 되고 청소나 빨래도 안 해도 되겠지. 그런 정도.
하지만 지금은 만약 그런 거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어떤 약이라고 해도 필요하다면 무조건 먹어야지. 설령 살아 있는 무언가를 먹어야 하는, 그런 거라도 기꺼이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엔프리제가 말하기 힘든 듯하니 내가 알아낼 수밖에 없지.
“…샤페릴은 전하를 진심으로 믿고 계시군요.”
“네.”
씩 웃자, 자하도 살짝 눈을 휘며 웃었다.
워낙 온화한 인상이다 보니 눈웃음이 참 잘 어울린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가지고 온 이젤과 캔버스를 꺼냈다.
“일단, 저는 오늘의 수업을 시작해야겠군요. 오늘은 젯소 바르는 법을 배우겠습니다.”
“젯소?”
“네. 캔버스란 천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물감을 묻히면 원하는 대로 잘 칠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젯소로 바탕을 만드는 거죠.”
자하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냥 보기엔 새하얀 물감이 든 통 같은데.
“이건 물감이랑 다르게 석고와 아교를 섞은 겁니다. 이게 굳으면 나중에 물감을 칠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커다란 페인트 붓 같은 것과 넓은 그릇, 물이 담긴 통을 꺼낸 자하가 젯소를 그릇에 덜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림 수업이 빨리 끝나면…, 궁금하신 글자가 있으면 대답해 드리는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고마워요, 자하.”
왜 마음이 바뀌었는진 모르겠지만, 그의 배려가 고맙다. 아무래도 도움이 있는 것과 없는 건 다르니까.
“그럼 잘 집중해서 들으세요.”
“네.”
“젯소는 그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물을 약간 섞어야 하는데….”
그렇게 자하의 미술 수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