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37)
“으음, 그냥 보기엔 막상막하 같은데요.”
“그렇군요.”
“이제 제 실력이 많이 향상되었다는 뜻 아니겠어요? 예전엔 세어 볼 필요도 없이 대공님 쪽이 더 우세했는데.”
“…그렇군요.”
샤페릴은 아까부터 그렇군요, 밖에 말하지 않는 엔프리제를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담담하게 빨간 돌의 개수를 세었다. 64개의 돌 중 32개가 빨간색이라는 걸 확인한 샤페릴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똑같이 32개네요. 드디어 무승부가 나왔군요.”
“이제 곧 당신께서 절 이기실 수도 있겠군요.”
엔프리제도 그녀에게 맞춰 주려 힘없이 미소 지었다. 분명 평소라면, ‘왜 오늘은 그렇게 힘이 없어요?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물어봐 주었을 샤페릴은….
“오늘 약사님이 오신다고 하셨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른 화제를 꺼냈다.
“네. 곧 도착할 겁니다.”
평소라면 분명 ‘그럼 약사님 오시기 전에 한 번 더 해요. 이번엔 제가 이길 거예요.’라고 했겠지만, 지금의 샤페릴은 얌전히 게임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리를 끝낸 그녀가 붉은 눈동자로 엔프리제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내일도 또 해요. 내일은 꼭 제가 이길 거니까 각오하세요.”
평소와 같은 목소리, 는 아니었다.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게 빤히 보였다. 샤페릴은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이용해 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그녀는 정말로 진실을 말한 것이었고, 지금의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억지로 눈을 마주치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미소를 짓는다. 전혀 들뜨지 않은 표정으로 들뜬 것 같은 목소리를 낸다. 말을 할 때 외에는….
엔프리제를 보지 않는다.
어제의 대화가 대체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기에 이토록이나 변해 버린 걸까. 자신은 대체 그녀의 무엇을 건드려 버린 걸까.
“…자하 경이 오기 전까지 한 번 더 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드물게도 엔프리제가 먼저 게임을 연장하자고 말을 꺼냈다. 시계를 흘끗 본 그녀가 미안하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다가 약사님이 오시면 기다리셔야 하니까요. 저도 많이 아쉽지만, 내일 또 하면 되죠.”
내일, 이 또 있는 걸까.
내일 또 오늘과 같은 그녀를 봐야 하는 걸까. 지금까지의 밝았던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이상해진 샤페릴을.
“…샤, 아니, 레이디 리베테.”
“네?”
무언가를 말해 보려던 엔프리제는,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붉은 눈동자에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순순히 그녀의 방에서 물러나 밖으로 나오면서 순간 불안감에 휩싸였다.
내일, 샤페릴은 여기에 있을까?
이제 족쇄는 없다. 사슬도 없다. 그녀를 묶어 둘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그녀를 묶어 두고 있는 건 단 하나.
-도망갈 생각 없는데요.
그녀가 뱉었던 그 말뿐이었다.
그건, 분명 진심이었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불안했다.
갑자기 변해 버린 샤페릴. 그녀의 진심이라고 갑자기 변해 버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을까?
그녀가 이 저택을 빠져나가고자 마음먹으면 자신은….
그걸 막을 수 있을까?
“아직은… 안 돼.”
아직은 그녀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보내 줄 수 없다.
…정말로?
오히려 그녀에게 가장 위험한 건 엔프리제, 자신이 아닐까?
엔프리제는 어느덧 도착한 서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밖을, 높디높은 철창에 둘러싸여 이 저택에서 나갈 수 있는 단 둘뿐인 통로 중 하나, 뒷문에서 나가는 길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톡, 톡 하고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는 그의 머릿속에 어제의 샤페릴이 떠올랐다.
-전부요.
-일생 두근거리면서 살면 심장이 터져 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그쵸?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는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너무나 예뻐서…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바란 적도 없는 과분한 행복이었기에 두려웠다. 이 모든 것은 꿈이나 환상이 아닐까? 사실 견딜 수 없는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만들어 낸 세상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뿐인 게 아닐까?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은 걸까?
더 무서운 건, 그 행복이 꿈이나 환상일까 봐 두려운 것보다도 더 그를 무섭게 하는 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가득 차올랐다.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그것을 참기가 힘들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엉겁결에 끌어안았던 지난번과는 달랐다.
그저 안는 것만으로도.
살랑살랑 피어오르는 달콤한 향기. 입안에 베어 물면 녹아 버릴 것 같은 하얀 속눈썹을 한입 가득 물어 보고 싶었다. 반짝이는 보석 같은 눈동자를 제 입술로 닦아 내고….
이미 한 번 맛보았던 붉은 입술까지.
모조리 먹어 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신은 만족할까?
처음엔 그녀가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녀가 먼저 닿아 주는 것만으로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 주는 것만으로도, 함께 놀자고 이야기해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런데 점점 욕심이 생긴다.
그녀가 자신을 귀엽다고, 예쁘다고 해 줄 때마다 우습게도 기분이 좋았다. 남자가 들어서 기분 좋을 말이 전혀 아닌데. 도리어 화를 내야 할 말일지도 모르는데.
그녀가 귀엽다고 하면, 예쁘다고 하면 저도 모르게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곤 했다.
전쟁터에 나갈 때 간혹 기원을 담아 손톱에 색을 바르는 치들이 있었지만, 엔프리제는 그런 걸 바보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주술 같은 것에 의존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어 보였던지.
하지만 그녀가, 그 조그만 입을 오물거리며 집중하는 걸 보면서 생각했다. 이 색이 지워지게 두지 않아야겠다고. 그래서 잘 때도 손톱을 감아 두었다. 평소에는 장갑을 끼다가 종종 벗곤 했다. 혹여 땀이라도 나서 지워질까 봐 아까워서. 그럴 때면 바보처럼 제 손톱을 들어 빤히 바라보며 웃었다.
색을 칠해 줄 때의 그녀가 떠올라서.
그녀가 달콤한 말을 해 줄 때마다, 그녀와 무언가 일상을 공유할 때마다 욕심이 생긴다. 그녀와 더 닿고 싶다. 그녀와 더 함께하고 싶다. 그녀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싶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아무리 둔하고 어리석은 자신이라도 호의와 연정의 차이쯤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쉬이 좋다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렇게 외모를, 목소리를 칭찬해 줄 수도 없다. 평생을 그리 쉽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에게 자신은 그저 돌봐 주는 이일 뿐. 호감이 가는 사람일 뿐.
남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래서 심술을 부렸다.
그녀가 기억을 잃게 된 후, 따스한 햇살에 녹아내리기라도 했던 것 같던 가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롭게 돋아 그녀를 상처 입혔다.
-당신이 절 놀리는 걸 재미있어 하신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제게 아무 마음도 없으시다는 것 역시.
꺼내지 않아도 될 말이었다.
지금까지 그랬듯 제 가슴에만 담아 두면 될 말이었다. 그랬다면 오늘도 그녀는 짓궂은 말을 하며 환하게 웃어 주었을 터였다.
설마 그 말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주길 바랐던 건가? 죄책감이라도 좋으니 그녀가 자신에게 연정을 품어 주길 바랐던 건가?
아니, 연정을 품었다고 착각이라도 해 주길 바란 건지도 모른다.
-저기, 그…, 조, 조금은 괜찮아요.
하지만 품 안에 있는 순백의 여성은, 눈만이 붉은빛을 띠는 여성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그런 말을 꺼냈다.
그녀는 알고나 대답한 걸까. 자신이 그녀에게 하고 싶은 것들이 무엇인지.
자신이 얼마나 잔혹한 사람인지.
그 작은 몸 위에 올라타 말랑말랑한 살결에 입술을 묻고 싶었다. 그 어떤 남자도 보지 못했을 깊은 곳까지 모두 제 것이라 표시를 남기고 싶었다.
그 가냘픈 몸으로 받아 내기 힘들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품속에 파고들고 싶었다. 그 누구도 닿지 못할 곳까지. 그녀의 가장 깊은 곳까지 자신의 것으로 가득 채우고.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
자신만의 것이라고… 그렇게 낙인찍고 싶었다. 분명 그녀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행위들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엄청 끔찍한 꿈이었어요.
그녀가 끔찍하다고 표현한 그 행위를 한없이 하고 싶었다. 붉은 입술이 더 빨개지도록, 통통하게 부르트도록 입을 맞추고 빨아들이며 맛보고 싶었다.
그 달콤한 것을 마음껏 탐닉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의 키스를 끔찍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랑스러운 말을 함부로 하면 제가 얼마나….
울고 싶었다.
가슴을 긁어 대는 간지러움과도 닮은, 갈퀴와도 닮은 무언가를 토해 내고 싶었다. 그게 자꾸 마음을 건드려서 그를 눈물짓게 만드는 것 같아서.
그녀의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될 것 같아서.
-제가 얼마나 많은 걸 참고 있는지….
참고 참다 흘려 버린 그 한마디. 그게 그녀를 바꾸었다.
-제가… 죄송해요.
울고 싶은 건 엔프리제였다. 그 눈물이 설마 목소리를 타고 샤페릴에게 옮겨 가기라도 한 걸까.
조금 전까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보던 그녀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이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울음소리조차, 목소리의 떨림조차 품지 않은 눈물. 그건 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 같았다.
고장 나서, 그저, 물을 품고 있지 못하고 주르륵 흘려 버리는.
마치 샤페릴이 고장 난 것처럼.
“샤페릴….”
뭐가 잘못된 걸까. 무얼 고쳐야 하는 걸까.
사람과의 접촉은 서툴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가시를 세우고 벽을 만들어 사람들을 밀어냈다. 자신을 받아 줄 사람만 벽 안에 들이고 새로운 이는 모두 거부해 왔다.
그런 자신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이토록이나 무능하다.
제국의 대공이라는 자리에 있으면 무엇할까. 그가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방법은 모르는데.
사랑하는 이의 눈물을 그치게 할 방법도 모르는데.
엔프리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내 불안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은 계속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숲으로 향하는…,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출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