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36)
“어….”
뺨에 와 닿는 탄탄하면서도 까칠까칠한 감촉. 새하얀 천 위로 보이는 하얀 목선. 등을 끌어안는 단단한 팔.
와르르, 하고 무언가가 무너지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어, 잠깐, 대공님, 잠깐만요! 뭐 떨어졌….”
“괜찮습니다. 익숙해지는 게 먼저지 않습니까?”
언제나 낮게 울린다고만 생각했던 목소리가 묘하게 야하게 들린다. 사람의 목소리를 야하다고 말해도 되나? 하지만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 되는걸.
나도 모르게 몸이 떨릴 정도로.
“저기, 어, 대공님. 일단 제가 이쪽으로 와서 그, 이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 다리가….”
어떻게든 일단 벗어나려고 핑계를 댔다. 실제로 다리도 탁자에 걸려서 아팠다.
그러자 엔프리제는 벌떡 일어나더니 내 곁으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배려가 없었군요.”
“그건 괜찮으니까 일단 좀 놓아…주세요.”
“뭐든 다 저와 함께 할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이런 것도 당연히 익숙해 져야죠.”
그건 좀 궤변 같은데! 내, 내가 언제 이런 걸 같이 한댔어? 일상적인 걸 말한 거지!
“제가 말한 건 밥 먹거나, 놀거나, 그런 거였어요….”
“그럼 이런 건 누구랑 같이 하실 겁니까?”
“어….”
어…, 누구랑…. 아무랑도 할 생각 없었는데.
잠시 넋을 놓은 사이 내 곁에 온 엔프리제가 덥석 나를 안아 올렸다. 아니, 잠깐!
“손톱! 손톱 색 아직 더 말랐어요!”
“괜찮습니다.”
“옷이 더러워지잖아요?!”
“새로 사면 됩니다.”
지난번에, 남자의 어깨에서 떨어질 뻔한 걸 잡아 주었을 때처럼 날 꽉 끌어안은 엔프리제가 내 얼굴을 내려보았다.
내 시야는 엔프리제의 가슴과 팔에 막혀서 오롯이 위밖에 볼 수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건 내 심장의 소리일까. 엔프리제의 심장 소리일까. 그걸 확인하려는 듯 내 가슴께를 꾹 눌렀다.
아, 내 심장 소리다.
“저기… 대공님.”
“네.”
“이런 건 안 해도 되지 않을까요?”
“제가 하고 싶은 것들도 같이 해 주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어, 그건 그랬지. 근데 이런 건 생각 못 했는데.
워낙 나한테 닿는 것만으로도 덜덜 떠는 남자라 이렇게 급발진할 줄 몰랐다. 심지어 지금은 나만 떠는 것 같기도 하고.
“저랑 이런 게 하고 싶으세요?”
“…네.”
“제가 닿기만 해도 덜덜 떠시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저는 끝없이 당신과 닿고 싶습니다.”
금색 눈동자가 살며시 휘어진다.
마치 뜨거운 도가니 안에서 녹아 액체가 된 금이 가득 찰랑이는 것 같다. 아니면 물기가 가득 차 있는 것이든지.
어느 쪽이건 참 예뻐 보였다.
“당신이 절 놀리는 걸 재미있어 하신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제게 아무 마음도 없으시다는 것 역시.”
커다란 손이 내 얼굴로 다가왔다. 살며시, 얼굴 위를 흐르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밀어 내 주는 손가락은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이러다가 제가… 당신을 다치게 할까 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던 설정이 다시 불쑥 떠오른다.
그렇지, 얘 뽕빨물 남주였지. 보통 로판 남주들도 절륜이 기본 설정으로 붙어서 19금 외전에서 활약하는 판국에, 얘라고 다를 리가 없겠구나.
엄청 참고 있는 거겠지.
그럼 혹시, 내가 심하게 장난치거나 했을 때 도망친 건 그게 이유였을까? 그는 어떻게 했을까.
혼자 날 떠올리며 자신을 위로했을까? 아니면….
아니, 잠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엔프리제가 아무리 귀엽고 매너가 좋아도 남자는 남자라는 사실을 인식하라는 거잖아. 자길 너무 편하게 대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잖아, 이건.
“저기, 그…. 조, 조금은 괜찮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머리와 달리 입은 멋대로 다른 말을 꺼냈다.
“…네?”
경고할 셈이었던 엔프리제도 당황하고, 말을 꺼낸 나도 당황했다. 서로 당황해서 멀뚱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제가 지금 뭐라고 한 거예요?”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내 팔을 꽉 끌어안고 있던 엔프리제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그래도 벗어나지 않았다.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대공님.”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또 절 놀리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아니요. 전 대공님 놀린 적 없어요. 조금 짓궂게 한 적은 있지만, 그건 없는 사실을 지어 내서 그런 게 아니라 다 진심이었어요. 그리고 짓궂은 짓을 한 건….”
사실 아까부터 좀 거슬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런가. 엔프리제의 머리카락이 살짝 흘러 눈가를 애매하게 가리고 있었다.
저게 신경 쓰여서 아마 헛말이 나온 게 아닐까.
손을 뻗어 새까만 머리카락을 옆으로 치웠다. 한국인이었을 때의 나보다도 더 까만 머리카락. 모든 걸 다 집어삼키는 어둠만큼이나 깊고 어둡고….
몹시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을.
“대공님이 반응해 주는 게 좋아서 그랬어요.”
씩 웃고는 손을 치웠다.
이제 완벽해. 거슬리는 게 없어졌으니 분명 헛소리도 안 하겠지.
…어라, 나 근데 방금 무슨 소리를 했더라.
“당신은…, 제가 남자라는 자각이 있긴 합니까?”
“네? 어딜 어떻게 봐도 남자잖아요.”
“그런…, 사랑스러운 말을 함부로 하면 제가 얼마나….”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
목소리에도 형태가 있는 것 같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와인 글라스에 들어 있는 물 같다. 가득 찬 물이, 글라스를 툭 건드리면 흔들리며 튀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도 출렁이며 흘러넘쳤다.
“제가 얼마나 많은 걸 참고 있는지….”
-왜 나만 참아야 해?
-나야말로 얼마나 많은 걸 참은 줄 알아?!
순간, 그의 목소리 위로 내 목소리와 엄마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제가… 죄송해요.”
소리 없이 눈물이 뺨을 타고 기어 내려온다. 마치 뱀처럼 뺨을 휘감고 머리카락을 적시며 톡, 톡 하고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
떨림 없는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제가 어떤 의도로 그랬건 대공님을 괴롭게 했다면 죄송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샤페릴…?”
엔프리제에게 씩 웃어 보이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순순히 날 놓아주었다.
애초에, 억지로 뭘 할 생각조차 없었겠지.
“전 옷을 갈아입어야겠어요. 대공님도 손 얼른 씻으시는 게 좋겠어요. 아교가 굳어 버리기 전에.”
나는, 침대로 다가가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 * *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있다.
-너무 좋아해서 그랬어.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
-널 사랑하니까 참은 거야.
이런 대사가 나오면 보던 웹소설도 덮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읽기 시작한 소설 중 상당수는 완결까지 보지 못했다.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나 사람을 상처입힐 수 있는지 알고 있는 걸까. 사람을 꼼짝도 하지 못하게 구속하는 말인지 알고 하는 걸까, 저 캐릭터들은.
-너 좋다는데 왜 싫어해?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다잖아. 별것도 아닌데 좀 용서해 줘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이 왜 폭력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내가 원하지 않는 기다림을 하는 게, 나에게는 괴로움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원하지 않는 선물을 안겨 주는 게 왜 날 위한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바란 적도 없는 일에 억지로 휘말리게 해 놓고 왜 기뻐하지 않는다며 화를 내는 걸까.
그래서 하지 말아 달라고 하면.
-넌 왜 틈을 보여 주지 않아?
-혼자 다니는 게 불쌍해서 일부러 말 걸어 줬는데 왜 이렇게 튕겨?
-재수 없어. 그러고 다니면 독특해 보이고 남자들이 좋아할 거 같아서 그러지?
나는… 엔프리제를 좋아한다.
그는 내가 원하는 건 뭐든 이루어 주려 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건 하지 않고, 하더라도 금방 그만둔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꺼내 나를 속박하려 하지 않는다.
이 감금의 이유를 사랑이라 설명하지 않는다.
이 감금 생활이 내게는, 원래 묶여 있던 족쇄보다도 훨씬 자유로웠기에 처음부터 여기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엔프리제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그도 나에 대해 별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반항하지 않고 온순하게. 피폐물을 보면 여주가 거부하고 싫어할수록 상처 입어 더 큰 집착과 광기를 보이는 남주들이 많다. 그래서 난 반대로 하고자 한 건 사실이었다.
이 좁은 천국에서 살 수 있다면 뭔들 못 할까.
엔프리제는 그걸 위한 수단이었다. 이 천국을 유지할 수단. 그렇기에 잘 보이려 했다.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처음엔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감히 사랑이라고는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엔프리제를 좋아하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가 쑥스러워하는 게 귀여웠고, 날 제대로 쳐다도 보지 못하며 우물쭈물하는 게 사랑스러웠다. 내 말 하나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그가 나를, 아니, 샤페릴을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이런 걸 동족 혐오라고 하는 건가? 나는 아무래도 내가 혐오하고 있던 그들과 같은 인종이었던 모양이다.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 남들이 그러는 걸 그토록 싫어했으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면서 내가 엔프리제에게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심지어 더 나쁜 건, 나는 알면서도 했다는 거다.
그가 날 좋아하고 있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오히려 그도 좋아하겠지. 그런 마음이 분명 어딘가에 있었겠지.
그가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니라 ‘샤페릴’이라는 걸 잊고.
“…후.”
낮은 한숨을 흘리며 물감을 갈았다.
무슨 안료로 만든 건지는 모르지만, 먹물처럼 새까만 색이 난다. 마치 엔프리제의 머리카락 색처럼.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안료를 유리판 위에 붓고 있었다.
필요한 것보다 기름을 많이 부어 버린 걸까. 자하가 보여 주었던 물감의 질감보다 한없이 묽어 보인다.
그래도 포기하지 못해 안료를 더 붓고 페인팅 나이프로 물감을 개어 어떻게든 제대로 된 물감을 만들려 애써 본다.
“…괜찮아. 아직 고칠 수 있어.”
엔프리제가 좋다.
그렇다면 그의 다양한 얼굴을, 다양한 표정을 보고 싶다는 내 마음을 억누르고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줄 수 없는 나는.
샤페릴이 되어 줄 수 없는 나는.
“…어?”
이상하게도, 조금 전까지 너무 되직해져 곤란했던 물감에 톡톡 물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기름을 부은 적 없는데.
아아, 이건 고칠 수 없겠구나. 물이 들어가 버린걸.
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유리판을 옆으로 밀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