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35화 (35/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35)

엄만, 놀란 듯 날 보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게는 그 표정이 마치 귀신처럼 보였었다.

-너,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누가 너더러 참으라 그랬어? 네가 좋아서 하는 거랬잖아!

엄마는 몰랐을까? 아니면 모르는 척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지쳐서 볼 수 없었던 것뿐일까.

-네가 언제 힘들다는 말 한마디라도 한 적 있니? 학교생활도, 집에서의 생활도 즐겁다고 했었잖아! 너는… 나야말로 얼마나 많은 걸 참은 줄 알아?!

엄마는, 늘 나에게 많은 걸 터뜨려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아직도 앙금이 남았던 걸까.

그도 아니면 아예 지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엄마 마음에 진득하게 눌어붙어서 점점 덩치를 키워 왔던 걸까.

-너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이혼했었어! 너만 아니었으면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일도 없었다고! 이게 뭐야, 대체? 내가 꿈꾸던 평화롭고 온화한 가정은 어디 갔어? 남편과 알콩달콩 지내는 시간이나, 아이들과 함께 여행 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그런… 그런 생활은 대체 어디로 가 버렸냐고!

엄마.

우리는 언제든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 하지만 엄마는 늘 바쁘다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잖아. 엄마는 나보다 회사가 우선이었잖아.

아니면… 나는 엄마의 가족이 아니었어? 나와 그런 시간을 가지는 걸론 채워지지 않았던 거야?

나는 그럼 대체 엄마의 뭐야?

절규하는 엄마의 이야기는, 대부분 내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그렇구나. 나는 족쇄였다.

할머니에게는 거슬리는 종기 같은 존재였고, 아빠에게는 할머니의 역린을 건드리는 귀찮은 모기 같은 존재였고, 동생에게는 제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는 가정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에게는 족쇄였다.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다만, 학교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오롯이 내가 노력해서 이뤄 낸 것이었으니까.

-자취는… 안 할게요. 그냥 집에서 통학할게요.

-그럼 집 근처로 가지 그러냐.

-대학 등록금도 제가 알바해서 번 돈으로 충당할게요. 앞으로도 알바는 계속 할 거고, 집안일도 소홀히 하지 않을게요. 그냥 학교만 가게 해 주세요.

-네가 번 돈? 그런 거 없다.

-네?

어딘가에서 꺼림칙하게 생각하던 것은 분명 있었다.

-못 보던 거네. 뭐야?

-니가 무슨 상관이야? 때 타니까 만지지 말고 가서 청소나 해. 집이 무슨 먼지 구덩이야?

원래도 내게 까칠하게 굴긴 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귀여운 구석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내게 막말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할머니처럼.

그 시점부터 동생의 방에는 새로운 게임기 같은 것이 늘어나곤 했다.

-요즘은 용돈 아껴 쓰나 보더구나. 너도 이제 경제관념을 잡을 때가 되긴 했어. 예전처럼 게임 결제 같은 데 돈 많이 쓰지 말고.

-아이씨, 내가 알아서 해요. 아빠가 무슨 상관이에요? 잔소리 더럽게 많네, 진짜.

돈 이야기가 나오면, 동생은 내 눈치를 보며 버럭 화를 내곤 했었다. 동생의 방에서는 간간이.

-아, 씨발, 대박! SS카드 뽑았어! 이걸로 덱 완성! 씨발, 내가 서버 최초 아냐?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오곤 했었다.

하나하나는 별것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예감은 있었다. 그런데도 의심하지 않은 건 아마도.

나 역시 눈을 감는 게 편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할머니의 말에 충격 받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던 내 반응은 반쯤 진심이었지만, 반은 연기였다. 마음 어딘가에서는 그러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그걸 자신에게조차 속이며 덮고 있었을 뿐.

-고작 그거, 누구 코에 붙이냐? 수혁이 용돈이나 쓰라고 줘 버렸다.

-…한 달에 30에서 50만원은 들어왔었어요, 할머니.

-그게 뭐 대수냐?

-수혁이는 자기 손으로 십 원 한 장도 벌어 본 적 없어요.

-우리 장손은 그런 푼돈 필요 없다. 나중에 더 큰일 할 사람이니 씀씀이도 그에 맞게 큼직큼직 해야지.

-…대체, 저한테 왜 그러세요? 제가 뭘 잘못했어요? 할머니가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요. 그런데 왜 그 얼마 안 된다는 푼돈까지 건드리셨어요? 대체 왜?

-이년이! 눈깔 똑바로 뜨고 노려보는 것 봐. 어디 할미한테!

-저한테 왜 그러시는데요.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뺨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감촉만이 알려 주고 있었다. 내가 울고 있다는 걸. 그리고 할머니는.

-계집년들은 툭하면 눈물을 짜 대서, 원. 왜가 어디 있냐. 네가 집안도 못 잇는 계집년이니까 그렇지. 내가 네년한테 제사상을 받아 먹겠냐, 우리 장손한테서 받아 먹겠냐?

그 전까지의 내가, 어딘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후의 나는…. 아마 망가져 버린 게 아닌가 싶다.

이게 불합리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이니까. 내가 이런 사람이니까. 내가 남자도 되지 못했고, 이런 불합리에 반항하고 일어날 정도의 사람도 못 되었으니까.

내가 못났으니까.

이 모든 걸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다.

최소한 결혼할 때쯤이면 놓아 주겠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매일 하교 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집에 가 버리는 내가, 스마트폰도 없어서 귀찮게 늘 문자로 연락해야 했던 내가 어디가 좋았던지 챙겨 주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 아이들은, 내가 가끔 흘리는 일상의 작은 일 몇 가지를 가지고도 큰일이라도 난 듯 화를 내 주었다.

-너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

-큰일?

-그 집에서 빠져나오고 싶어서 쓰레기 같은 남자들한테 걸려서 결혼 후의 생활까지 망치면 어떻게 해? 우리 수희 얼마나 고생했는데, 결혼한 후에는 행복해야지. 언니가 선별하고 선별한 오빠들 리스트 푼다. 나와라.

-못 나가는 거 알잖아.

-야! 누가 소개팅 하러 나간다고 나오래? 친구 엄마 상 당했다고 하고 나와! 옷이랑 화장품은 우리가 다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고마웠다. 친구들의 배려가.

그리고 솔직히 빨리 이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도 맞았다. 누군가 결혼하자고 하면 덥석 그러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친구들 말처럼.

무슨 비밀 첩보 작전처럼 소개팅 계획을 세웠다. 재미있었다. 남자를 소개받는다는 게 좋다기보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 준다는 게 너무 좋았다.

하지만.

-이년이, 공부하라고 보낸 대학에서 이런 거나 배워 가지고.

어떻게 알았던 걸까.

효자손을 든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공포에 질려 덜덜 떨고 있는 내 눈에 동생이 들어왔다. 씩 웃으며 내 핸드폰을 들고 있는 동생이.

동생은, 자신의 핸드폰 결제는 거의 게임으로 쓰고 필요한 게 있으면 종종 내 핸드폰을 사용하곤 했다. 그래도 한 번도 대화 어플을 뒤진 적은 없었는데.

대체 왜.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계집년들 배워 봤자 이런 뒷궁리밖에 더해? 아직 스물다섯밖에 안 처먹은 년이 벌써 남자 물어 집을 나갈 생각을 해? 에라이, 이년아! 정숙하기를 하나, 대가리가 차 있기를 하나, 동생을 잘 위하길 하나? 이럴 거면 차라리 나가 죽어!

소개팅은 못 나갈 것 같아. 같이 준비해 줬는데, 미안해.

이틀간 대답이 없던 나를 걱정해 주던 친구들의 메시지 뒤에 나는 겨우 그런 메시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내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친구가 날 불러 냈다.

-미안. 못 나가.

-너 설마 또 할머니한테 맞았어?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좀 일이 생겨서. 미안해.

그런 내가 답답했는지 친구들도 하나둘 말이 없어졌다. 그렇게 내가 누군가를 만날 기회는, 오로지 집과 회사 사이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집과 회사에 있던 놈들은 다 저런 식이었고.

“예전의 제가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저는 기억이 없으니까 남자에게 익숙하지 않잖아요?”

“…네.”

“제가 보기엔 대공님도 그리 저한테 익숙하지 않으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져요.”

그런 내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끝내주는 남자 앞에 서 있게 되었다.

오로지 한 사람만 바라보고, 설령 비뚤어진 애정이라 해도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주며,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 사람. 그리고 그 한 사람이 하필 내가 빙의한 사람인 남자가.

덤으로 잘생기고 귀엽고 섹시하고 혼자 다 해 처먹는 그런 남자.

그런 남자를 앞에 두고 설레지 않는 게 이상한 거겠지. 그러니까 익숙해지면 분명히 괜찮을 거야.

“꼭… 익숙해져야 합니까?”

“당연하죠.”

내 대답을 어떻게 이해한 걸까. 엔프리제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설마 두근거리는 감정이나 설레는 감정이 싫어서 빨리 없애고 싶다는 걸로 들리는 건 아니겠지?

“제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이대로 평생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잖아요? 그럼 저는 평생 여기서 대공님이랑 같이 있어야 하는데.”

좀 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손끼리 뭉쳐 있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설레임 때문일까. 긴장 때문일까.

손이 뜨끈뜨끈한 난로처럼 느껴진다.

내 손도, 그의 손도.

“그때마다 이렇게 설레면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저와 어떤 걸 하고 싶으십니까?”

“전부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웃었다.

“혼자 먹는 밥도, 뭐, 레이디 템버의 실력이 워낙 좋으니까 맛있긴 해요! 그래도 대공님이랑 같이 먹었을 때가 제일 맛있었어요. 저 혼자서는 손톱도 못 칠하니까 이것도 같이 해야 하고, 글자를 배우든 책을 읽어 주시든 그것도 같이 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앞으로 제가 하고 싶은 것들, 대공님이 하고 싶은 것들도 같이 해야만 하니까.”

그러니까.

“일생 두근거리면서 살면 심장이 터져 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그쵸?”

동의를 구하며 웃어 보이자, 엔프리제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어…”

“그럼, 이런 것도 함께 하게 되는 겁니까?”

무언가 넓고 따스한 것이 날 감싸 안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