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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34화 (34/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34)

“아.”

실수.

가장자리에 잘못된 곳을, 반사적으로 손으로 슥슥 문질렀다. 그러자 도리어 내 손에도 묻어 버렸다.

“대공님.”

“…네.”

“제발 움직이지 말아 주세요. 자꾸 엇나가잖아요.”

“죄송합니다….”

말로만 죄송하다고 하면 뭐 해. 내가 손을 움직이면 또 움찔거리면서.

이렇게 떨고 있으면 어떻게 하라고!

“대공님.”

“죄송합니다, 이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내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견디기 힘들다는 듯 엔프리제가 눈살을 찌푸린다. 귀엽기도 하고 나름대로 섹시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래서야 끝이 안 난다.

“대공님.”

“네….”

“그냥 하지 말까요?”

“아니요. 죄송합니다. 움직이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계속해 주십시오.”

끙….

내가 엔프리제라서 참는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세 번째로 붓이 엇나갔을 때 때려치웠을 거야.

나는, 최대한 그의 떨림을 막아 보고자 커다란 손을 있는 힘껏 꽉 쥐었다. 그리고 엔프리제에게 말했다.

“대공님도, 대공님 손 꽉 잡으세요. 안 흔들리게. 팔꿈치는 탁자에 대구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아잇, 빨리요!”

잠시 망설이던 엔프리제가 내 손 위로 자기 손을 잡았다. 이렇게 할 필요 없이 그냥 손목을 잡으면 될 텐데.

게다가 이렇게 하니까.

“…….”

이번엔 내 손이 떨린다.

아니, 같이 떨리는 건가? 누구 손이 떨리는 건지도 이제 모르겠다.

“잠깐만요. 제 손을 빼는 게 더 낫겠어요.”

슬쩍 손을 당겨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세게 잡는 것 같은 기분도….

고개를 들어 엔프리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니, 고개를 돌리는 게 아니라 손을 놔 줄래요? 계속 이렇게 손잡고 있자고?

…아니, 차라리.

“좋아요.”

“네?”

“차라리 이렇게 해요.”

나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붓을 놓고 그의 손 위를 감싸 잡았다.

“저기, 이건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긴 무슨 뜻이야.

“우린 서로한테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네?”

안 그래도 최근 계속 생각한 것이 있다. 엔프리제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거나 가까이 다가오거나 스킨십을 할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것. 이걸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아무리 엔프리제가 귀엽고 멋지고 섹시해도 책 속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인물에게 이렇게까지 두근거리면서 이성을 잃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다. 그럼 이건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다각도로 고민해 본 결과.

‘내가 남자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할머니의 주장으로 일부러 가까운 남녀공학 두고 멀리 떨어진 여중, 여고에 진학했고 대학마저도 다른 곳은 등록금을 내 주지 않고 집에서 내쫓겠다는 말에 여대를 갔다. 그런 내가 가까이 지내 본 남자라곤 집에 있는 남동생이 전부인데, 그놈은 얼굴이랑 허우대만 멀쩡했지 성질머리가 썩었다.

회사에 있는 놈들은…, 말할 필요도 없는 쓰레기들이었다. 어찌 보면 차라리 걸신이 든 남동생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수희 씨, 전설의 여중 여고 여대라며?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네. 남자 손은 잡아 봤어?

-냄새 나는 사내놈들은 다 저리 가고, 수희 씨! 이리 와서 술이나 좀 따라 봐. 남자한테 술 따라 본 적 있어?

-거참 콧대 높게 구네. 요즘은 여대가 더 문란하게 논다더니, 나로는 성에 안 차? 수희 씨 주제에 그렇게 따지면 시집 못 가. 알아?

…어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힌다.

친구가 다니는 회사에는 멀쩡한 놈들도 많다던데 왜 내가 다니던 회사에는 그런 놈들밖에 없었는지, 원.

집에서 버스 타고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고, 점심때 밥하러 나올 수 있고, 월급은 좀 적어도 이른 시간에 칼퇴 할 수 있는 회사를 찾다 보니 조건 좋은 회사에서는 모두 떨어졌다.

나도 좋은 곳으로 가고 싶긴 했으나….

고등학생 때부터 조금씩 알바를 하긴 했지만, 아직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할머니가 통장 관리를 해 준다고 했었다. 불안하긴 했다. 그래도 엄마 아빠가 사업으로 돈을 적게 버는 게 아닌데 설마 내 돈을 쓸까 싶은 마음에 얌전히 맡겼다. 내가 경제 관념이 없었던 건 사실이니까.

알바는 닥치는 대로, 고등학생을 써 주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식당 서빙 일도 해 봤고 택배 분류 일도 해 봤다. 운 좋게 타이핑 알바를 한 적도 있고. 제일 좋은 건 편의점 알바였다. 점장님이 허락해 줘서 일하는 중에 손님이 없는 시간엔 공부를 할 수도 있었으니까.

나름 힘들었지만 차곡차곡 모일 돈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았다. 대학은 꼭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서 독립하고 싶었으니까.

경기도가 집이었으니 통학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뭐랄까. 그냥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미리 독립할 때 방을 잡을 용도로 알바를 한 것이었다. 틈틈이 공부한 보람이 있어 그리 유명하진 않지만, 인서울에 있는 여대 한 곳과 마침 경쟁률이 낮아 운 좋게 턱걸이 합격한 인서울의 나름대로 유명한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합격 소식을 전하자 부모님은 기뻐해 주셨다. 제대로 신경도 쓰지 못했는데 서울권에 들어가 줘서 고맙다고.

너라면 혼자서도 잘할 거라고 해 주셨다. 하지만, 할머니가.

-계집년이 무슨 대학이야? 집에서 살림이나 살고 일이나 해.

-어머니!

-게다가 저년 나가면 우리 장손 밥은 어쩌고 나는 어쩌란 말이냐. 난 못 한다. 늙어서 관절도 안 좋고 힘도 없어.

아버지는, 할머니의 말을 거역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언제나 아버지의 가장 든든한 우군이자 가장 무서운 스승이 할머니였다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은 할머니가 하자는 대로 했었다. 그런 아버지가 처음으로 할머니에게 소리를 지른 게 그때였다고 했다.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어머님! 겨우 집안일 때문에 아이 대학을 안 보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엄마는 그런 할머니 때문에 아빠랑 몇 번이나 싸웠다.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 것한테 걸레질을 시키고 하는 게 말이 되냐고.

두 분이 싸우면 언제나 몸싸움까지 번지곤 했다. 때리는 건 아니었지만 물건을 던지거나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가 던진 물건을 맞고 두 분 중 한 분이 병원에 가는 일도 있었다.

-걸레질, 재밌어! 내가 재밌어서 한다고 했어!

-뭐? 수희야, 그게 무슨 말이야.

-싸우지 마. 내가 재밌어서 하는 거야. 응?

-애가 재밌다잖아? 이제 그만 말해! 아무리 어머니가 손자 손자 하셔도 싫다는 애한테 강제로 일하게 시키시겠어?

두 분의 싸움을 멈추고 싶었다. 그냥 그뿐이었다.

그 후로 엄마는 내게 불평을 늘어놓는 일은 있어도 할머니나 아빠에게 직접 뭐라고 하는 일은 없어졌다. 집안이 평화로워졌다. 난 그걸로 만족했었다.

-겨우라니?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아느냐! 왕실의 족보를 타고난 집안이야! 그런 집안의 사대 독자가 아무거나 먹고 입어서야 쓰겠냐?

-정 그러시면 일하는 사람이라도 들일게요. 수희 대학은 가게 해 주세요.

-일하는 사람? 대학 등록금이 한두 푼이냐? 내 아들이 번 돈으로 계집년 대학 보내고 대신에 사람을 쓰라고?

-그만 좀 하세요, 어머님! 이이만 돈 버는 거 아니고 저도 벌어요! 제가 번 돈으로 사람 구할 테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세요!

-넌 그럴 돈 있으면 장손한테 써야지 왜 쓰지도 못할 계집년한테 써? 계집년이 공부해서 뭐 할 거냐. 너처럼 어른 말에 따박따박 대들기밖에 더 하냐?

-어머님!

며칠 동안 집 안에서 고성이 오갔다. 동생은 내게 말했다.

-집안 꼴 자알 돌아간다. 너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냐? 엄마 아빠 제대로 회사도 못 가고.

-뭐?

-너만 없으면 집안이 다 조용할 텐데. 너 하나 때문에 진짜 이게 무슨 고생이야. 난 PC방에나 가야겠다. 오늘 안 들어올 거니까 그렇게 전해.

나 때문이라고?

나는 동생을 위해 많은 걸 참았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말대로 우리 집안을 이을 유일한 독자니까. 귀하디귀한 사대 독자니까.

결혼하면 이 집안이랑 결별할 내가, 그런 주제에 나한테 들어갈 돈은 돌려주고 가지도 않을 내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참는 게 그 값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에게 지겨울 정도로 그리 들었었으니까.

실제로 그랬다. 나 하나 참으면 집안이 조용했다. 평화로웠다.

…그런데 왜 내가 계속 참아야 하는데?

나는 엄마에게 갔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엄마가 내게 불평을 흘렸듯 나도 엄마에게 불평을 토해 내고 편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술에 잔뜩 취한 채 날 맞이한 엄마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수희야. 집 근처 대학으로 가면 안 될까?

-…뭐?

-대학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로 한다고 하고 엄마가 뒤에서 몰래 줘서 갚으면 해결될 것 같은데…. 네 할머니 고집 알잖니. 이렇게 질질 끌면 여러 사람이 힘들어져. 엄마나 아빠도 언제까지 회사에 나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왜, 나만? 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여러 번 생각했다. 할머니가 동생에게 살갑게 굴 때마다, 부모님이 할머니 등쌀에 밀려 나를 홀로 둔 채 동생만 데리고 나갈 때마다, 동생이 새로운 장난감을 가질 때마다, 먹고 싶은 걸 먹을 때마다.

아니, 일상의 매 순간 생각했다.

왜 나만?

내 마음 속은 아마도 그 말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이해하려고 했다.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니까. 할머니는 고집이 세니까. 부모님은 할머니를 못 이기니까. 제일 발언력 있는 동생이랑 아빠가 할머니 편이니까.

나 하나만 참으면 집이 조용하니까.

-…왜 나만 참아야 해?

그 가득 찼던 말이, 나도 모르게 또르륵 굴러 나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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