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33)
일단, 여기가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본다.
이제 막 날 믿기 시작한 엔프리제가 집착 또라이가 되느냐 마느냐의 분기점. 요컨대 말을 아주 잘 해야 한다.
거짓말하지 말고 진실 되게.
“넘어질 뻔한 걸 잡아 줬어요.”
“…….”
엔프리제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진다.
알지. 나도 잘 알지. 이게 참 믿기 힘든 상황이고 자세가 좀 거시기하다는 걸 알아. 하지만 봐 봐.
내 손에 든 걸 보라고!
“이거 안 떨어뜨리려고 엄청 애썼어요. 무지 비싼 거라면서요?”
아, 왜 얼굴이 더 일그러지지.
여긴 날 칭찬해 줘야 하는 타이밍 아니야? 이거 하나에 어마어마한 돈이 왔다 갔다 한다며….
“일단… 제 손을 잡으십시오.”
더 기분 상하게 만들기 싫어 순순히 엔프리제의 손을 잡았다. 그 와중에도 한 손은 안료 병을 꽉 쥐고 있었다. 슬쩍 자하의 눈치를 살피자, 그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린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해하지 마요, 대공님.”
“무슨 오해 말입니까.”
거참. 또 까칠해지려고 하네?
으음, 생각해 보니 오히려 이쪽이 낫나? 최근의 솔직하고 몽실몽실한 엔프리제는 심장에 좀 나쁘다. 차라리 까칠거릴 때가 더 낫긴 했는데….
그래도 오해받는 건 싫다.
“제 취향은 대공님이에요.”
“……?!”
오, 빨개진다.
솔직히 이번 건 좀 많이 노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믿어 주는 걸 어쩌겠어.
“이 약사님은 확실히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사실을 부정하면 거짓말 냄새가 너무 짙어진다. 엔프리제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지는 걸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대공님은 더 잘생겼어요.”
동의를 구하듯 자하를 보았다. 그는, 왠지 모르지만 조금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레이디뿐만 아니라 누구든 그렇게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죠? 우리 대공님이 좀 잘생겼죠. 게다가 목소리는 또 얼마나 좋아요? 약사님, 대공님이 시 읽는 거 들어 보신 적 없죠? 진짜 사람이 녹아내릴 정도로 멋져요.”
너무 녹아내려서 가끔 잠드는 게 문제지만.
엔프리제가 책을 읽어 준 건 몇 번이나 되는데 제대로 기억나는 시가 거의 없다. 덕분에 시집을 바꾸지 않아도 늘 새로운 시를 듣는 느낌이라 좋긴 하다.
“거기에 비율도 죽이죠. 얼굴은 조그만데 키는 크고 다리도 엄청 길고. 저번에 품에 안겨 보고 안 건데 가슴도 딴딴….”
…응?
“아니, 잠깐. 안겼다는 게 그런 뜻이 아니라, 공주님 안기를 좀….”
“공주님 안기를….”
“그게 제가 떨어지려던 걸 구해 준 상황인데….”
“떨어지려던 걸 구해 주시려 공주님 안기를 하신 거군요.”
…….
아니, 진짜인 걸 어떻게 하라고!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여긴 소설 속이란 말이야! 물리 법칙이나 인과 법칙을 무시하고 그런 일들이 벌어지기 마련이라고!
지금처럼!
하필이면 수많은 타이밍을 두고 네 위에 넘어진 순간 엔프리제가 들어와서 오해하는! 그런 불가항력적인 상황들이 있단 말이다!
소설이라서 그런 걸 어쩌라고!
“레이디 리베테,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레이디의 말을 믿습니다.”
웃는 얼굴이 되게 사기꾼 같은데요.
어린애 달래는 얼굴이 되었는데요. 저는 어린애가 아닌데요. 요즘 어리광이 좀 늘긴 했지만!
그건 엔프리제랑 템버 한정이란 말이야!
“믿으시면 됐어요….”
하지만 귀찮아서 그냥 넘겼다. 어차피 이 남자가 오해하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엔프리제가 오해하지 않는 거지.
“아무튼, 제 말 뜻 아시겠죠?”
“알겠으니 제발 그만하십시오.”
엔프리제의 얼굴이 펑 터질 것 같다. 찌르면 분명 터질 것 같은데.
살짝 찔러 보고 싶은 충동이….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아셨어요?”
“알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공님이 워낙 의심 많고 사람을 잘 못 믿으니까 저도 거듭 확인하는 거잖아요.”
“당신이 절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좋게 보는지는… 아플 정도로 잘 알았으니 제발 그만하십시오. 심장이 멈출 것 같습니다.”
오, 나도 그 기분 알지. 나도 네가 막 내 이름 부르고 돌직구 날리고 할 때 그랬었지.
…응?
엔프리제는 날, 아니 샤페릴을 좋아해서 그렇다. 그거야 명약관화인데.
나는 왜 그러는 거지?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할까요…? 물감 만드는 법은 알려 드렸으니 나머지는 두 분이 하시는 게….”
내가 독자였으면 자하를 보며 눈치 빠른 놈, 잘했어! 를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당사자가 되었을 때는 좀 다르다. 이 눈치 없는 놈아! 지금 네가 여기서 빠지면 우리가 얼마나 어색할지 알아?
안 그래도 요즘 틈만 나면 어색해지는데.
“아니요…. 제가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리시는 동안 간식으로 드시라고… 준비했습니다.”
대공씩이 나 되는 네가 왜 직접 케이크랑 홍차를 가져오니….
라고 하면서도 머리 어딘가에서는 알아채고야 말았다. 나랑 자하가 같은 방에 있는 게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거겠지.
“감사합니다, 전하.”
자하가 억지로 웃으며 차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차를 받는 대신.
“대공님.”
“네.”
“진짜 아니라니까요!”
“…….”
끝까지 내 결백을 주장했다.
* * *
“흐음, 의외네.”
청년일까, 아니면 소년일까.
그 중간 경계에 걸쳐져 있는 듯한 아슬아슬함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얼핏 가냘파 보이는 체격이었지만, 홍차 찻잔을 든 손 아래로 보이는 팔 근육은 꽤 단단해 보였다.
백금색으로 반짝이는 속눈썹을 몇 번 깜빡인 남자가 짐짓 심각하게 중얼거리자 자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좀 의외였습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좀 더… 가시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레이디 리베테에게는 굉장히 약한 모습을 보이시더군요.”
“사랑은 원래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고들 하니까. 그리고 내가 의외라고 한 건 레이디 리베테 쪽이야.”
남자는 찻잔을 내려놓고 다리를 꼰 채 턱을 괴었다.
샤페릴 드 리베테. 모두가 성녀라고 부르는 그 여자는 생각보다 제멋대로였다.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건 사실이었고, 나름대로 깨어 있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감금 생활을 버텨 낼 수 있는 성질머리는 아니었다.
정말로 모든 기억을 잃은 건가?
남자는 고민했다. 그녀의 기억상실이 진짜라면 무언가 문제가 생기는가?
잠시 고민하던 그가 도출해 낸 결론은 ‘아니다’였다. 오히려 상황이 더 좋아진 건지도 모른다.
그 제멋대로인 성격을 예측하고 도망을 막는 것보다는 차라리 얌전히 저택에 있어 주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형님과의 사이가 좋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운을 띄운 보람이 있었네.”
“글쎄요…. 저는 레이디가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만약 기억을 찾아도 지금처럼 하실까요?”
“아니겠지. 하지만 그녀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고, 그건 쉬이 풀어질 일이 아니니까. 차라리 형님에게는 이게 잘된 걸지도 몰라. 두 사람이 좋은 감정을 쌓은 후에 기억을 되찾는 게 오해를 풀기도 더 쉽겠지.”
하지만 문제는 둘째 형님이었다.
둘째 형님은 갈수록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번에 대공저를 갑자기 방문한 일도 그랬다. 심지어 남자에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런 건 처음이었다.
“폐하는 좀 어떠십니까.”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갔나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지.”
“들키면….”
“나도 좋게는 끝나지 못하겠지.”
둘째 형님은, 제 분수를 알고 있는 데다 그에게 도움이 되는 막냇동생을 아꼈다. 그래서 큰 형님과 어느 정도 가깝게 지내도 눈감아 주는 중이었지만….
들키는 순간 최소한 유폐 정도는 받겠지. 그럼에도 이 모험은 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남자가 생각한 모든 시나리오 중에 가장 좋은 시나리오였기에.
“그런데도 계속하실 겁니까?”
“응. 미안하지만 자하 경, 당분간은 두 사람의 곁에 있어 주겠어?”
“저는… 왕제 전하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생각입니다. 다만.”
“다만?”
“…왕제 전하께서 굳이 위험을 감수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건 당신이 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야.
남자, 현 황제의 동생이자 임페리오 제국의 왕제인 엘마레는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그는 교양과 상식을 갖춘 황족이었으니까.
“내가 이러는 이유는 하나야. 나는 큰 형님이 행복해지시길 바라. 지금까지 불행하셨던 만큼.”
기왕이면 레이디 리베테와 사랑하는 사이까지 발전하게 되면 바랄 게 없었다. 다만 연애는 처음인 데다 소통에 서툴러 고전하는 듯하여 포기하고 있었지만….
기억을 잃은 레이디 리베테가 생각보다 첫째 형님을 잘 따르고 있다는 낭보를 듣자 다시 희망이 솟았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
“전하께선 혹시….”
자하는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말을 목 아래로 삼켰다. 하지만 엘마레는 이미 이해했다는 듯 피식 웃곤 다시 찻잔을 손에 들었다.
약간 식어 옅은 김이 피어오르는 홍차. 엘마레는 이 정도의 홍차가 가장 좋았다.
식기까지의 기다림은 길지만.
“후….”
단번에 들이켤 수 있으니까.
하지만 기다림이 너무 길어서는 안 된다. 너무 식으면 맛이 없어지니까. 적당한 때를 가늠하여 단번에 마시는 것.
그게 엘마레의 비밀스러운 즐거움이었다.
“나 역시 레이디 리베테를 선망하고 우러러 본 사람 중 하나지.”
그 자유로움을 동경하지 않을 젊은이가 있을까.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편견을 갖지 않고 만민을 평등하게 대한다. 그녀가 없었다면, 그리고 큰 형님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엘마레는 없었을 터였다.
“그리고 큰 형님 역시 내게는 몹시 소중한 분이야.”
그러니 엘마레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바랐다. 신을 믿은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기도했다.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이 부디 행복해지기를.
그리고.
“두 분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나는 어떤 희생을 치러도 좋아.”
그로 인해 자신 역시 행복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