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32)
흐음. 대체 엔프리제는 뭘 숨기고 있는 걸까.
“…….”
분명 자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려고 했었지. 그렇다는 건 그리 이상하거나 위험한 약은 아니라는 뜻일 텐데.
왜 막는 걸까.
“…….”
슬슬 말해 주지 않으려나. 궁금한데.
“저….”
오, 입을 열었다!
“드디어 말씀해 주실 생각이 드셨어요, 대공님?”
“네?”
엔프리제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나 역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그를 보았다.
“저기, 응? 그거 있잖아요, 그거.”
약에 대한 거 있잖아, 응?
그렇게 눈치를 주면서 입가에 손을 대고 약을 마시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뭔 착각을 한 건지 엔프리제의 얼굴이 빨개졌다.
“뭘 말하라는 건진 모르겠습니다만…, 그, 아까부터 그렇게 빤히 바라보고 계셔서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아니! 그거 아니잖아!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그보다 자하 경에게 부탁해 두었습니다.”
“부탁?”
“자하 경은 미술에도 조예가 깊습니다. 그라면 당신께 그림을 가르쳐 주실 겁니다.”
…뭐야, 엔프리제가 가르쳐 주는 게 아니야?
아니, 잠깐. 난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누가 가르쳐 주든 상관없잖아! 그림만 배우면 그만이지!
…라고는 생각하는데.
“대공님은… 안 돼요?”
“저요?”
“대공님은 가르쳐 줄 수 없어요?”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 물어봤다.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내겐 엔프리제가 가장 친밀도가 높고, 가급적이면 다른 이들과는 접촉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혹시 뭐, 샤페릴이 너무 예쁜 나머지 자하가 나한테 반해서 구해 내겠다고 또 그러면 곤란하니까.
그래서 그런 거지 별 의미는 없다.
“제가… 좋으십니까?”
흠칫, 하고 몸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딱딱한 의자 등받이가 더 이상 뒤로 갈 수 없게 막아서고 있었다.
진중한 얼굴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금색의 눈동자가 좀 부담스럽다.
“누가 좋대요?!”
“…그럼 싫으십니까?”
“누가 싫대?!”
난 뭔 소리를 하는 거래!
으으, 침착하자. 요즘 엔프리제와 대화를 하다 보면 지나치게 감정적이 될 때가 있다. 엔프리제도 아니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야지.
“좋고 싫은 게 아니라 대공님이 제겐 가장 편안하게 접할 수 있는 분이니까요.”
“그렇습니까. 그건 기쁘지만, 아쉽게도 저는 미술에는 전혀 조예가 없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랬었지. 미술에는 소양이 없다고.
매니큐어 칠할 때를 생각해 보면 잘할 것 같은데.
문득 생각나서 손톱을 보았다. 가급적 손톱이 벗겨지지 않게 조심하려고 씻을 때는 천으로 꽁꽁 동여매기까지 했지만, 벌써 색이 꽤 벗겨졌다. 아무래도 아교라서 접착력이 약한 모양이었다.
아깝다. 기껏 엔프리제가 발라 준 건데.
“…아니, 그게 아니지!”
금이라서 아까운 거지! 엔프리제가 발라 준 게 무슨 상관이야?
“손톱 색이 많이 벗겨졌군요.”
“그러게요. 대공님은 어떻게 됐어요?”
그날, 공언한 대로 사과 주스와 함께 되돌아온 엔프리제의 손톱에도 매니큐어를 발라 주었다. 나도 손이 떨리고 엔프리제도 손이 떨리는 바람에 꽤 삐뚤삐뚤하게 되었었지.
벌써 다 지워 버렸으려나.
“…최대한 장갑을 끼거나 하면서 색이 벗겨지지 않게 노력했습니다만….”
엔프리제가 안타깝다는 듯 제 손을 들어 보였다. 손톱 위에서 반짝이는 금색은 내가 발라 주었을 때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손톱 선에서 삐져나온 것까지도 그대로다. 저건 지웠어도 되는데….
“거의 그대로인데요?”
“조금 벗겨졌습니다.”
“어디요?”
“여기에….”
슬쩍 손을 눈앞까지 올린 엔프리제가 거의 티도 나지 않는 끄트머리를 들이밀었다. 지워진 건가…. 잘 모르겠는데.
“흠. 대공님은 둘째 치고 전 다시 발라야겠네요. 아니면 그냥 벗겨 내든가.”
그리 말하자, 엔프리제의 얼굴이 살짝 빨개진다. 내가 대체 언제 얼굴을 붉힐 만한 이야기를 한 거지.
“다시 발라 주실래요? 혹시 바쁘거나 하셔서 곤란하시면 아예 다 벗겨 주세요.”
내가 했다가 손톱에 상처라도 나면 어떻게 해? 라는 생각에 말한 건데.
말하고 나서 깨달았다.
아, 벗겨…, 크흠.
“물론 벗겨 달라는 건 옷이 아니라….”
“그만 말씀하셔도 됩니다.”
원래 얼굴이 빨간색이라고 해도 믿겠다. 왜 말한 나보다 더 부끄러워하는 걸까.
아니면 나도 저 정도로 얼굴이 빨개져 있는 걸까.
누가 보면 토마토 파티라도 열린 줄 알겠다.
“다음엔 무슨 색이 좋으십니까?”
무슨 색….
지금 그걸 물으면 한 가지밖에 생각이 안 난다.
“빨간색이요.”
* * *
“와.”
“꽤 오래 걸리긴 하지만, 즐거운 작업입니다. 원하는 색을 만들어 낸다는 건 언제나 즐거운 법이니까요.”
자하는 물감을 만드는 법부터 가르쳐 준다고 했다.
이 세계에서 그림이란 유화 그림을 뜻하는 모양이었다. 물감은 튜브형 물감이 있는 게 아니라 유리 튜브에 담긴 물감을 사서 쓰거나 안료와 기름을 사서 직접 만들어 쓰는 게 보통이라고 했다.
“생각한 것보다 냄새가…, 훨씬 이상하네요.”
“하하, 그렇죠? 하지만 나중에는 이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안정되기도 합니다.”
물감을 만든다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가루로 된 안료를 아마씨 기름이랑 섞어 준다. 안료마다 필요한 기름 양이 다르고, 화가마다 원하는 묽기와 질감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양을 섞어야 하는지는 여러 번 만들어 보면서 자신만의 비율을 찾아보는 게 좋다고 했다. 자하가 가장 먼저 만들기 시작한 색은 하얀색이었다.
“색의 밝기를 조절할 때 보통 하얀색으로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얀색이 가장 많이 사용되죠. 레이디께서 가장 많이 만드시게 될 색이기도 합니다.”
“이건 뭘로 만든 안료예요?”
“보통 하얀색은 백랍을 이용합니다. 더 예전에는 석회나 뼈를 이용했었지만, 그걸로는 안료로 만들었을 때 불투명한 흰색이 나오지 않거든요.”
“백랍….”
이름의 어감으로 보면 시랍 같은 어감을 주는데. 설마 진짜 시체를 시랍화 시킨 그건 아니겠지…?
아니지, 애초에 시랍의 랍은 밀랍화 됐다는 뜻의 랍이잖아. 그럼 밀랍을 말하는 건가?
“밀랍이랑은 다른 건가요?”
“으음, 다르지요. 밀랍은 벌집에서 나오는 거지만, 백랍은 납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납이라면 그, 금속이요?”
“네. 납과 식초, 동물의 분뇨를 항아리에 넣고 발효시키면 백랍을 만들 수 있습니다.”
동물의 분…, 그럼 이거 똥으로 만들어 진거야?!
갑자기 기분이 좀….
그런 내 마음속 절규와 상관없이 자하는 물감을 페인팅 나이프로 이리저리 뒤섞었다. 마치 미장이가 벽돌 위에 흙이나 시멘트 같은 걸 바르는 듯한 손놀림이었다.
몇 번이나 으깨듯 위를 슥슥 문지르고 뒤집어서 다시 섞고를 반복하더니 엄청 예쁜 걸 꺼냈다.
“와, 이게 뭐예요?”
작은 병처럼 생겼는데 병은 아니다. 다만 모든 부분이 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부 다 하나의 유리로 만들어져 있는 건가?
예쁘다.
“글래스 뮬러라는 것입니다. 페인팅 나이프로 어느 정도 섞어 준 후엔 이 뮬러로 갈아 주면 됩니다.”
“오오. 이건 꼭 필요한 거예요?”
“뮬러로 갈아 주지 않으면 물감이 다소 거친 질감이 됩니다. 그쪽을 원하신다면 굳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신기한 세계네.
안료와 기름의 비율이 어떻게 되는지, 페인팅 나이프로 얼마나 개어 주는지, 뮬러로 얼마나 갈아 주는지에 따라 물감의 질감과 농도가 달라지는 것 같다. 그렇다는 건 내가 원하는 물감도 막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거겠구나.
“원하는 질감의 물감이 만들어지면 작은 유리병에 넣어 두시고 쓰시면 됩니다. 다만, 주의하셔야 할 건 가급적 빨리 사용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어…, 왜요?”
“굳어 버리거든요.”
“그럼 다시 기름 부어서 원래대로 돌리면 되는 거 아니에요?”
“한번 굳은 유화 물감은 다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요.”
흠. 잘은 모르지만, 이런 안료는 꽤 비싸다고 들었다. 이전에 금색만 봐도 진짜 금을 갈아서 썼다잖아. 여기는 화학이 그렇게 발전하지 않은 세계 같으니 분명 천연 재료로 만들어서 다 비싸겠지.
아껴 쓰도록 하자.
“그렇다고 너무 적게 만드시는 것도 좋진 않습니다. 특히 흰색은요. 정말 많이 사용되니까요. 그리고 굳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니 그림 두어 번 그릴 정도는 미리 만들어 두셔도 됩니다.”
아잇, 그렇다면 미리 말해 주지.
처음엔 감이 안 잡히겠지만… 만들다 보면 알겠지.
“그다음엔 뭘 만들어 볼까요.”
“으음….”
금색은 또 금가루겠지? 자주색이나 빨간색은 비싸서 왕들만 몸에 두르는 색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그럼… 파란색으로 할까?
“이거요.”
“파란색이군요. 이건….”
자하가 안료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빙긋 웃으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깨끗하고 선명한 파란색이네요. 울트라 마린 색으로 보입니다.”
“울트라 마린이요? 이건 뭘로 만드는 거예요?”
“라피스라줄리입니다.”
라피스라줄리…. 아, 들어 본 적 있다. 게임에서도 본 적 있다. 게임 내에서는 꽤 싼….
“보석이죠?”
“네. 청금석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울트라 마린의 안료를 4g 만들기 위해서는 라피스라줄리 100g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죠.”
“우와…, 정말 조금밖에 안 나오네요.”
“네. 라피스라줄리 자체가 금보다도 비싸서.”
…응?
“이 병에 든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평민 가정이라면 일 년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 됩니다. 저도 이 정도 양의 울트라 마린 색의 안료를 보는 건 처음이군요.”
…네? 뭐라고요?
갑자기 손이 무겁다. 이게 일반 가정이 일 년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라고…? 이 쬐끄만 게?
“이 정도 양이면 그래도 아까 만든 흰 색의 절반 정도는 물감이 나올 것 같습니다. 물감을 만드는 데 안료가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거든요.”
…….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그 와중에도 손에 든 병만큼은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꽉 쥐고 옆의 탁자를 짚으려 했다.
하지만 주륵, 하고 미끄러진 손 탓에.
“아.”
“레이디 리베테!”
다행인 건 자하 쪽으로 넘어졌기에 병을 떨어뜨리지 않고 무사히 안착했다는 걸까. 이거 떨어뜨렸으면 나 진짜 울었을 거야.
많이 울었을 거야.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병은 무사해요.”
“아니, 병이 아니라…!”
그리고, 언제나 그렇지만. 소설을 보면서는 나도 같이 즐겼었지만. 여주가 다른 남자랑 같이 있다가 꼭 이렇게 오해받을 만한 자세가 되면 인지상정으로 나오는 장면이지만!
“…뭐 하시는 겁니까, 두 분.”
왜 하필 엔프리제가 지금 들어오는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