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31)
흠.
역시 엘프나 요정인가? 분위기가 뭔가 사람이랑 다른데.
그렇지만 귀는 또 뾰족하지 않고…. 이 소설만의 새로운 설정 종족인가? 약사라면 약초에 대해 잘 알 거 아냐. 새로운 숲의 종족인가.
“…제가 뭔가 이상하십니까?”
“네?”
“물끄러미 바라보시기에.”
“아, 그냥 종족이 궁금해서….”
“네?”
온화한 인상의 미남이 어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본다. 아니, 내 질문이 문제가 아닌가?
미남의 뒤에서 엔프리제가 굉장히 불쾌하다는 오오라를 뿜어내고 있다.
“…….”
조금 전까지 그렇게 귀엽더니 왜 갑자기 사나워졌대. 이 남자를 데려온 건 본인이면서.
“너무 오래… 그, 붙잡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 설마 이거?
맥을 짚는 건지 손가락 두 개로 손목 위를 살짝 덮고 있다. 그렇게 꽉 누르고 있진 않은데 이게 맥이 짚어지나?
애초에 서양 쪽에도 맥을 잡는 게 있나?
“어제 크게 놀라신 일이 있다고 급히 부르시길래 걱정했는데…. 다행히 괜찮으신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떨어지는 게 좋겠습니다.”
슥, 하고 엔프리제가 내 손목과 남자의 손 사이를 파고든다. 덕분에 이번엔 엔프리제가 내 손목을 잡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
“…아, 죄송합니다.”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엔프리제를 보자, 그가 손이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손을 치웠다. 으으, 손목이 화끈거려.
“약은 다소….”
“잠깐.”
약?
순간 남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엔프리제가 나와 남자 사이를 막아섰다.
“잠시 나가도록 하죠.”
“네? 하지만 설명을….”
“제가 듣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샤…, 그, 흠.”
내 말이 기억났는지 그가 내 이름을 부르려다 말았다. 그리고 황급히 미남의 등을 떠밀며 나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덩그러니 소파 위에 남았다.
“…흠.”
혹시 어제 그 약을 지어 준 건 저 남자였나? 아니, 그렇다기엔 어제 일 때문에 갑자기 불려 왔다고 했지.
그렇다는 건 어제 불려서 오늘 왔다는 뜻인데, 그 약을….
에라이,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 약을 떠나서 다른 게 신경 쓰인다.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엔프리제는 나한테 뭔가를 숨기려 하는 것 같다. 그게 괜스레 기분 나쁘다.
나는 아무것도 숨기는 게 없…진 않지. 그렇지….
그런 내가 뭐라고 하는 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뭐라고 하는 느낌인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만!
기분 나쁜걸!
“으, 으으.”
왜 이렇게 이기적이게 된 거지, 나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바라본 적이 없다. 언제나 사람들은 내 기대를 배반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날 사랑해 주지 않았고 날 알아주지 않았다.
부탁은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소망은 어느덧 진창 속에 묻어 두는 매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바라면, 그만큼 좌절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당신 때문에 나는 변해 버렸다. 겨우 한 달 남짓의 생활이 나를 이렇게나 바꾸어 버렸다.
“삐리리, 삐! 삐삐!”
작은 새가 내 주위를 맴돌며 열심히 무언가를 속삭인다. 파닥거리는 그 날개가, 허공에 떠 있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는 그 작은 게 너무 귀여워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녀석은 내 손가락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하, 너 진짜 귀엽다. 진짜 맹금류야?”
“삐삐-, 삐-.”
아무리 들어도 피리 소리 같다. 산새 소리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네 주인이 네 이름을 붙여 달라고 했지.”
뭘로 지어야 할까.
“솜털?”
“삐리리, 삐유우우!”
아, 왠지 싫어하는 것 같다. 복슬복슬한 털이 딱인데.
“솜사탕?”
“삐삐?”
고개를 갸웃한다.
이 세계에는 솜사탕이 없는 거려나. 이것도 꼭 닮았는데.
“플러피?”
별 반응이 없다. 좋다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이 세계의 마법 생물들은 원래 이렇게 이름에 까탈스러운가? 플리도 그랬는데 너도 엄청 맞춰 주기 힘들구나.
“셰, 셰리?”
아니, 이건 술 이름이던가? 떠오르길래 일단 뱉어 봤….
“삐-! 삐삐삐삐-!”
…어라?
녀석이 살살 내 손가락을 부리 사이로 물더니 고개를 끄덕거리…, 아니, 저건 고개를 끄덕인다기보다 그네를 타는 건가? 거의 온몸을 흔드는데.
“셰리?”
“삐-! 삐삐삐-! 삐-!”
아, 떨어진다.
너무 격하게 몸을 흔들다가 휘청이는 녀석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작은 새지만, 내 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지는 않다. 그래도 매라기엔 아무리 봐도 작다.
이 작은 몸으로 날 지켜 줬구나.
“…고마워, 셰리. 날 지켜 줘서.”
아아, 플리도 빨리 만나고 싶다. 언제쯤 깨어나려나.
* * *
“……!”
…어라, 왜 화내는 거지.
“플리?”
“……!”
…기분 좋은 건가? 아닌데, 역시 화난 것 같은데. 코가 엄청난 기세로 움직인다.
엄청 킁킁거린다.
“플리…?”
…저기, 플리야?
난 너한테 매우 반가움을 표하고 있는데 왜 나한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거니? 나 좀 봐 줄래? 어디 보고….
아.
“삐-! 삐유우우우! 삐-!”
내 어깨에 앉아 있던 셰리가 울부짖었다. 그러자.
“쉬잇! 쉬에엣! 쉿! 싯!”
아, 위협한다.
“플리 너, 이틀 만에 본 나한테 관심을 줘야지! 왜 셰리한테만 관심 주는데!”
“쉬이이잇!”
아주 대환장 파티네, 진짜.
“일단 둘 다 진정해 봐, 좀.”
방문을 열어 셰리부터 내보냈다. 알아서 엔프리제한테 가겠지.
그리고 문을 닫은 후 플리에게 다가갔다.
“플리.”
“…….”
킁킁, 하면서 엄청나게 경계한다. 아직 다른 동물이 더 있는 거 아닌가 경계하는 것 같다.
에라, 모르겠다. 실컷 맡아라.
플리의 앞에 주저앉아 손을 내밀었다. 한참을 킁킁거리던 플리가 살며시 손 위로 올라온다.
뭔데, 이거. 귀여워. 왜 올라오는 건데?
내 팔을 타고 열심히 올라오던 플리가 휙 하고 어깨에 타오른다. 하지만 기다란 플리가 어깨에 안착하기란 어려웠다. 한참 요리 조리 꼬물거리던 녀석은.
“힉.”
목덜미에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슥 지나간다. 보들보들하면서도 은근히 까슬까슬한 무언가.
“플리, 뭐 하는 거야?”
“삐-!”
플리는 만족스러웠는지 내 목덜미를 감싼 채 안착했다.
…이, 이건 꼭 봐야 돼!
거울, 거울 어딨…!
“으아아아!”
미쳤다!
미친 귀여움! 사진! 사진! 으아악, 카메라가 없어! 항상 필요도 없는데 내 손에 있던 폰이 왜 이 순간 없는 거야!
흑흑.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거울을 말똥말똥 바라보는 까만 눈이 너무 귀엽다. 고개를 갸웃갸웃하면서 거울을 확인하는 것도 너무 귀엽다. 샤페릴의 하얀 피부보다도 더 뽀얀 털이 너무 귀엽다.
그리고 그걸 목에 말고 있는 샤페릴도 너무 귀엽다!
“플리.”
“삐-?”
“그림을 배워야겠어.”
지금, 이 순간.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소망한다.
나는 그림을 배울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비명 소리가…!”
쾅쾅, 하고 문을 치는 엔프리제의 목소리. 나는 한달음에 문으로 달려가 벌컥 열어젖혔다.
문 앞에 서 있던 엔프리제가 당황한 듯 한 발 물러서며 나를 보고 있었다.
“샤페릴…?”
“대공님! 저 그림 배우고 싶어요!”
“네? 아, 네. 그건 전에도 말씀하셨습니다.”
“당장 배워야겠어요!”
“당장…이요?”
일단 다른 건 다 모르겠고, 플리의 귀여움은 남겨야겠다.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생각에 슬쩍 어깨를 내밀에 목에 감긴 플리를 보여 주었다.
“이걸 보면 왜인지 아시겠죠?”
“…….”
하지만, 슬프게도 엔프리제는 살짝 고개를 돌려 버렸다. 게다가 얼굴은 새빨개져서.
아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데!
“제 목 말고 플리를 보시라구요!”
“플리…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힐끔, 하고 내 목으로 온 시선이 다시 허공으로 사라진다.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하던 엔프리제가 입가를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귀…엽습니다…?”
“맞아요! 귀여워요! 플리는 무지하게 귀여워요! 그럼 이 귀여움을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림으로 그리고 싶으신 겁니까?”
“네!”
드디어 알아주는구나!
나도 모르게 엔프리제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탈탈 흔들었다.
“그림 배우게 해 주세요!”
“알겠으니 조금만 진정을…, 그….”
엔프리제의 시선이 다시 옆으로 향한다. 어딜 자꾸 저렇게 보는 거야!
라고 생각해서 나도 그쪽을 보았다.
“…….”
“…….”
“…….”
아, 그러고 보니 이 저택…. 지금 손님이 와 있었지.
“사이가 굉장히… 좋으시군요.”
남자가 난감한 듯 웃으며 그리 말했다.
…으, 으아아!
설마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소리 지른 것도 다 들은 건가? 엔프리제한테 한 이야기들도?
대체 엔프리제는 왜 이 남자를 달고 온 거야!
“…….”
일단 엔프리제를 놓았다. 내가 꽉 쥔 탓에 흐트러진 셔츠를 탁탁 털어 펴 주고 나 역시 바로 섰다. 그리고 남자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 흠흠. 지금 보신 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는 아무것도 못 보았습니다.”
아니, 좀 전에 사이 좋다느니 어쩐다느니 하셨잖아요. 그건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모르는 척해 주겠다는데 굳이 내가 그걸 방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두 분께서는 무슨 일로 제 방에….”
“자하 경께서 앞으로 당신의 상태를 살피며 약을 지어 주실 겁니다.”
“약이요?”
“네. 당신께는…, 그, 지병이 있어서 주기적으로 약을 드시지 않으면 악화될 수 있습니다.”
병에 대한 걸 말해 주는 건가? 이제 정말로 나를 믿어 주는 건가.
이게 바로 닫혀 있는 마음을 열었을 때의 쾌감…!
“무슨 약인데요?”
“…아, 그건, 저….”
“레이디 리베테. 전하께서는 약초에 대해 잘 모르십니다. 제가 따로 알려 드리도록 하지요.”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빙의한 지 3주 가까이 지났고, 샤페릴에게 족쇄가 달린 건 감금된 지 최소 한 달은 지난 후였다.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샤페릴에게 계속 약을 먹인 건 엔프리제였다.
그런 엔프리제가 약에 대해 모를 리가….
“…그래요?”
어딘지 가슴에 남는 찝찝함에 엔프리제를 보았다. 그러자….
금색 눈동자가 내 시선을 피했다.
몹시 수상쩍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