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29)
“…대공님?”
“네.”
“진짜 대공님이에요…?”
아직 꿈을 꾸는 건가? 아니면 아까 그게 꿈이었나?
내가 수희인지 샤페릴인지 모르겠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언제나라면 찰그랑 소리가 났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별 소리가 안 들린다. 멍하니 내 손목을 보자 있어야 할 게 없었다.
“…이거 꿈이에요?”
“아닙니다.”
이상하다. 자각몽에서는 꿈이냐고 물으면 다들 정색하거나 못 들은 척하거나 한다고 들었는데. 아니면 괴물로 변해서 쫓아오거나 잠에서 깬다고.
뭐지. 새로운 자각몽의 패턴인가.
“사슬이 없어요.”
“다시 묶지 않았으니까요.”
“왜요?”
그건, 내게 있어서는 중요한 것이었다.
불편한 건 맞았다. 그래서 가벼운 걸로 바꿨으면 했다. 하지만 벗겨 주길 바라진 않았다.
그게 있어야 엔프리제는 안심하고 날 감금해 둘 수 있을 테니까.
언젠가 날 믿을 수 있게 되면 풀어 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조금 전에 탈출할 뻔한 날 믿을 리가 없잖아, 이 남자가.
그럼 꿈인가 보다.
“…….”
뚝, 하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엔프리제. 당신은 당신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까?
내가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달콤함을 몇 번이나 주었다. 몸도 마음도 편해지는 감각을, 나는 여기서 생전 처음 알았다.
누군가에게 어리광 부려 보기도 하고 그걸 받아 주기도 하는 경험을 했다. 내 말이라면 뭐든 이루어 주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경험을 했다.
내가 꿈도 꿔 보지 못했을 정도로…, 바란 적도 없는 과분한 행복을 손에 넣었다.
“많이 아픕니까? 지금 약을….”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엔프리제가 내게 컵을 건넸다. 그 꽃향기가 나던 달콤한 차인가.
얌전히 받아서 마셨지만, 솟아나는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일상으로 돌아가 보고 알았다. 나는 정말로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안에 속해 있었을 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벗어났다가 다시 들어가니 보였다.
난 정말 그 자리가 싫었다.
“이제 좀 더 주무십시오.”
“자기 싫어요.”
여기서 다시 눈을 감으면 내 일상이 돌아오는 걸까? 그렇다면 평생 잠자고 싶지 않다.
혹여 엔프리제가 떠나기라도 할까 봐 그의 옷소매를 잡았다. 열 때문에 손가락이 마디마디 둔한 느낌이라 빼려면 얼마든 빼 버릴 수 있을 텐데. 그는 얌전히 소매를 잡힌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당신이 옆에 있어도, 소용없다.
꿈속의 존재는 꿈속에서만 힘 있는 법이다. 눈을 뜨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아무런 힘도 없다.
나는 결국 또 그 속으로 돌아가게 될 텐데.
“대공님.”
“네.”
“날 절대 놓지 말아 줄래요…?”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바랐다.
여기에 있고 싶다. 나만의 천국. 나에게만 허락된 좁은 천국.
여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평생 여기 갇혀 있어야 한대도 좋다. 내가 누군가에게 존중받고, 사랑받는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나를 마치 빛처럼 봐 주는 이 사람 옆에 언제까지고 머물고 싶었다.
“물론입니다.”
엔프리제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예전에 만졌을 땐 따뜻하고 딱딱하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차갑게 느껴진다. 나한테 열이 나기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그 손을 잡아 뺨에 문질렀다.
“시원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공포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대공님, 정말로 제 곁에서 떠나지 않을 거예요?”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항상 당신 곁에 머물 겁니다.”
“제가 어디에 있더라도?”
“네.”
제가 샤페릴 본인이 아니더라도요?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나오는 것은 뜨거운 열을 품은 숨뿐.
잠시 더 입을 열고 있다가 그대로 어둠 속에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잠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일까. 이 꿈에서 깨어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 때문이었을까.
소리가 들린다.
몸은 움직이지 않는데 살며시 내 뺨에서 벗어나려 손을 빼내는 엔프리제의 움직임은 느껴진다. 그게 아쉬워서 잡으려 했지만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을 겁니다.”
내 뺨과 이마에 엔프리제의 손이 와 닿는다. 잠시 열을 재려는 듯 가만히 있던 그가 낮은 한숨을 흘렸다.
“부족한가.”
뭐가 부족하다는 걸까. 약이?
잠시 침묵하던 엔프리제의 손이 뺨으로 옮겨 간다. 부드럽게 뺨을 어루만지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샤페릴. 하지만, 당신을 낫게 하려면 지금은 이 수밖에….”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입술에 닿았다.
열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까 봐 뭔가를 먹여 주려 하는 걸까? 하지만 이런 감촉의 음식은 먹어 본 적이 없다.
살짝 메마른 것 같은데 이상할 정도로 촉촉하게 느껴진다.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젤리처럼 차가운데 그렇게 끈적이거나 물렁거리진 않는다.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무언가.
살며시 입술을 열고 들어오는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꼬물거렸다.
이게 뭐지. 그렇게 생각하자 꼼짝도 않던 손과 달리 혀가 살짝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움직인 건지도 모르겠다. 들어온 먹을 것을 처리하기 위해서.
반사적으로 씹으려는 건지 입이 꾹 닫긴다. 그러다 흠칫, 하고 말캉한 것이 움직였다. 거기에 놀라 내 이도 열렸다.
뭐지. 이거 살아 있는 거야? 산낙지 같은 건가?
들어온 무언가는 처음엔 조심스럽더니, 조금씩 입안을 살피기 시작한다. 또 자길 깨무는 게 아닌가 싶었는지 이를 살짝 건드리며 훑기도 하고 더 안쪽까지 파고들어 보기도 한다.
그 움직임에 긴장한 목이 꿀꺽, 하고 무언가를 삼켰다. 말캉한 것에서 나온 것일까. 삼킨 침에서 달콤한 맛이 났다. 열기로 가득 차 있던 입안이 조금씩 시원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열기가 훅, 하고 빠져나간다. 갑자기 온도가 내려가는 몸에 나도 모르게 덜덜 떨었다. 입에서는 옅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 흐으…응.”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어딘가에 막혔다. 목소리는 흘러나가지 못하고 목 안에서만 머물렀다.
웅웅, 울리는 그 감각과 갑자기 추워지는 감각.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이불을 끌어안을 생각이었는데, 무언가 단단한 것이 만져졌다. 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꽉 끌어안자, 묵직한 무게감이 몸 위로 떨어져 내렸다.
“잠…, 샤페릴.”
낮은 목소리. 엔프리제인가.
그새 입안에 들어왔던 것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빠져나가던 열기도 멈췄다. 다시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뜨거운 느낌을 내보내려 푹 숨을 내쉬었다.
“샤페릴, 놔 주십시오. 제발.”
다급한 목소리에 손을 풀었다. 아까보단 훨씬 몸을 움직이기가 쉬웠다. 꽉 감았던 눈을 뜨자 상체를 일으키던 엔프리제와 눈이 마주쳤다.
“…읏.”
“대공님…?”
뭐지.
열기에 잠식되어 제대로 돌아가지 않던 머리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까 그건 꿈이었나? 원래의 몸으로, 수희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움직이면서 제대로 된 감각을 느끼지는 못한 것 같다. 김을 구울 땐 원래 뜨거워서 어쩔 줄 몰랐었는데, 담담하게 했었고.
젤리를 가르는 듯한 움직임도 꿈에서 많이 봤던 것 같다.
그렇다는 건 역시 이쪽이 현실이라는 거겠지?
“저 손 좀 잡아 주세요.”
손을 내밀자, 빨갛게 물들어 있던 엔프리제가 머뭇거리며 손을 맞잡았다. 아까 잡았을 때는 시원한 것 같았는데, 지금 잡으니까 뜨겁다.
온도가 느껴진다는 거 보면 역시 여기가 현실인가.
아아, 다행이다.
“꿈을 꿨어요.”
“꿈… 말입니까?”
“엄청 끔찍한 꿈이었어요.”
그렇게만 중얼거리고 눈을 감았다.
잠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아까와 달리 마음을 놓아서 그런가.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끔찍….”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엔프리제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먹인 건 뭐였지? 역시 약이었겠지.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달콤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음, 다행이네요. 열이 거의 내렸어요.”
“그래요? 다행이다.”
눈을 뜨자 템버가 앞에 있었다. 체온계를 들여다본 그녀가 왠지 모르지만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내 열이 내린 게 기쁜 건가?
템버 본인이 아팠던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많이 걱정했어요, 아가씨. 제가 지켜 드리지 못해서….”
생각을 끝내기가 무섭게 템버가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그리 말했다. 아니, 진짜 내 마음 읽는 거 아냐?
이 타이밍 뭐지?
“네?”
게다가 지켜 주다니, 누가 누구를. 템버가 나를?
나도 모르게 템버를 훑었다. 그냥 평범한 중년과 노년 사이의 여자. 그것도 약간 마른 인상의. 그런 그녀가 남자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나마 젊음이라도 내세울 수 있는 나도 반항이 불가능했는데.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레이디 템버.”
“하지만…, 제가 조금만 더 일찍 침입자를 눈치챘으면 전하께서 더 빨리 오셨을 테고… 이렇게 열을 내시는 일도 없었을 텐데.”
으음…. 이건 조금 반박이 어렵긴 하다.
지병이 있어서 그런가 샤페릴은 몸이 좀 약하다. 원작에서도 도망가다가 잡혀 올 때마다 열을 냈었다. 그런 상태도로 엔프리제를 보면 날뛰어서 결국은 그, 흠, 그, 그런 씬으로 넘어가곤 했었다.
그걸 보며 뽕빨물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환호했고, L이 있는 씬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눈살을 찌푸렸었지. 나는 어느 쪽이었냐면….
크흠.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자.
“그래도 별일 없었으니까요. 네?”
“아가씨….”
“게다가 어제 주신 약이 잘 들었나 봐요.”
“약이요?”
템버가 고개를 갸웃한다. 나도 덩달아 고개를 갸웃했다.
“대공님께서 저한테 뭔가 먹이셨어요. 되게 말랑말랑한 거였는데.”
“말랑말랑…이요?”
꿈틀거리는 게 좀 기분 나쁘긴 했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입안에 달콤한 향이 퍼졌었고.
“네. 다시 먹고 싶어질 정도였어요. 약인데도.”
“그런가요? 흠, 전하께 뭐였는지 여쭤보고 준비해 두겠습니다. 앞으로 아가씨께 열이 나면 그 약을 드려야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템버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안 됩니다.”
“네?”
뜻밖의 방해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