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28화 (28/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28)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아무런 특성도 없는, 그냥 새하얀 천장. 그 중앙에 덩그러니 켜져 있는 형광등이 눈부셔서 나도 모르게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또 할머니한테 혼나겠구나.

“이 미친년이! 얼른 안 일어나냐? 뭐 한다고 계집년이 지금까지 자빠져 자고 있어? 불은 훤히 켜 놓고! 전기세는 그냥 나오냐, 이년아!”

아아, 역시.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젤리로 꽉 찬 수조 안에서 바둥거리는 기분이다. 움직여도 움직여지지 않는 팔다리에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운데, 꾀병으로 보인 걸까. 할머니가 들고 있던 효자손으로 내 등을 내리쳤다.

“얼른 일어나라니까, 이년아! 우리 장손 배고프겠다!”

“잠깐만요…, 몸 상태가 좀 이상해서….”

“옷을 그따위로 입으니까 그렇지! 계집년이 조신하게 입고 다닐 생각은 않고 펄렁펄렁하니, 그게 뭐야?”

“그냥 잠옷이에요, 할머니….”

“잠옷이 뭐가 필요하냐! 그냥 적당히 주워 입으면 될 것을. 에잉. 빨리 나와서 밥이나 차려!”

할머니의 목소리가 울린다. 머리가….

열이라도 나는 걸까.

억지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 앞치마를 두르면서 어제 장을 보면서 뭘 사다 놨는지 떠올려 보려 하지만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결국, 냉장고를 뒤졌다.

그러고 보니 동생이 어제 갈비찜 해 달라며 노래를 불러서 핏물을 빼놨지.

일단 물을 올려 뼈부터 삶았다. 그리고 아침에 먹을 가자미를 꺼내 페트병에 항상 모아 두는 쌀뜨물에 담궈 두었다. 생선만 있으면 투정을 부리기 때문에 스팸도 미리 꺼내 놓는다.

계란 물을 풀어 스팸을 담궈 두고 삶은 뼈를 채에 받혔다. 무거워. 1kg 정도의 갈비가 삶으니 꽤 부피가 줄어들었다. 찬물에 헹궈 두고 채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무, 양파를 깍둑썰기 해 두고 파를 큼직하게 자른다. 그러면서 있다가 할 무나물을 위해 무의 일부는 잘게 채 썰어 둔다. 홍고추와 청고추를 송송 자르고 팽이버섯을 씻어 뿌리 부분을 잘라 둔다.

이참에 콩나물국 끓일 것도 해 두자.

비린내가 싫으니 콩이 싫으니 투덜거리는 주제에 콩나물은 또 좋아한다. 콩을 뺀 부분의 아삭거리는 식감이 좋다나. 콩 대가리를 다 떼 버리면 국물 내기 힘든데.

작게 한숨을 내쉬며 콩 대가리를 일일이 떼어 낸다. 그리고 미리 주말에 대량으로 내어 두는 멸치 육수를 꺼내어 냄비에 부었다.

보글보글 끓도록 두고 일단은 옆에서 김을 굽는다.

파는 김은 짜니 느끼하니 말이 많고 미리 구워 두면 별로 눅눅해지지도 않았는데 구시렁거리는 일이 많아 김은 아침마다 새로 굽는다. 생김을 꺼내 가스레인지를 켜고 못 쓰는 프라이팬을 꺼냈다. 저녁에 기름에 재워 둔 김을 꺼내 그 위에서 맨손으로 슥슥 휘두르며 뒤집어 준다. 가만히 두면 금방 탄내가 배어서 맛이 없다고 또 투덜거리기 때문에 뜨거워도 손을 바꿔 들어 가며 다섯 장을 구웠다.

아침에만 먹는 게 천만다행이지, 이런 걸 매일 열 장, 스무 장씩 구워 대면 내 손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김을 굽다가 육수가 끓어오르면 마늘 한 숟가락을 미리 넣고 거기에 콩나물을 넣는다. 콩 대가리가 빠졌으니 파에서라도 육수가 우러나야 한다. 큼직하게 썰어 둔 파를 넣고 국 간장을 넣고 더 끓인다. 그사이 김을 다 구웠다.

프라이팬을 끈 후 김을 잘라 그릇에 담아 놓고 국 냄비로 향한다. 간을 제대로 맞추고 고추를 넣어 매콤한 맛을 더한 후 한소끔 더 끓여 끈다. 콩나물 특유의 시원한 냄새가 피어오른다.

뜨거우면 뜨겁다고 투정, 차가우면 차갑다고 투정 부리기 때문에 미리 반 그릇만 떠서 식혀 둔다. 그리고 나중에 뜨거운 국물로 반을 채워 주면 덜 투덜거린다. 동생의 국그릇만 채워 두고 이번엔 갈비찜 할 냄비를 꺼냈다.

고기를 넣어 주고 간장, 설탕, 배즙, 사과즙, 마늘, 생강, 맛술, 물 등을 넣어 양념한다. 이건 맛을 볼 수가 없으니 부족한 간은 나중에 맞출 수밖에 없다.

뚜껑을 닫아 주고 중불에 올려 끓인다. 중간중간 간이 잘 배게 뒤집어 주는 것 외에는 편해서 나쁘지 않다. 그사이에 다른 반찬을 준비한다.

그러는 사이 할머니가 동생을 깨우러 들어간다.

“우리 장손~. 얼른 일어나서 밥 먹자.”

“아, 싫어요…. 좀 더 잘래요.”

“식으면 맛없으니까 밥만 먹고 자. 응?”

“아이씨, 싫은데….”

벌써 깨우면 또 짜증 부릴 텐데. 오래 기다린다고.

하긴 갈비찜은 어차피 점심때에나 먹을 테니 이대로 끓여 두면 된다. 그럼 가자미부터 구워 둘까.

멀쩡한 팬을 꺼내 기름을 살짝 두르고 달궈지는 사이 가자미에 밀가루를 살짝 묻혀 준다. 모양이 흐트러지면 흐트러진다고 뭐라고 하고 껍질이 벗겨져도 입맛 떨어진다고 투덜거리는 장손님 때문이었다.

모양만 좀 망가지는 거지 맛은 별 차이 없는데. 까다로운 놈.

프라이팬 위에 가자미를 올리고 밀가루를 치운다. 그리고 이번엔 느타리버섯을 꺼냈다.

채소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놈이 버섯은 꽤 잘 먹는다. 그래서 식탁에는 항상 버섯이 두세 종류 이상 올라가야 했다.

물에 가볍게 흔들어 씻어 준 느타리를 손으로 쫙쫙 찢는다. 너무 세게 하지만 않으면 결대로 잘 찢어져 주기 때문에 의외로 스트레스 해소도 되고 좋다. 어렸을 때는 재밌어 보인다며 동생도 같이 하곤 했었는데.

최근엔.

“야, 너무 잘게 찢지 마. 씹는 맛 안 나니까.”

“알았어.”

“근데 멀었어? 넌 뭐 했길래 아직 아침도 덜 만들었냐?”

“거의 다 되어 가. 세수라도 하고 와.”

“이제 씻으면서 다 되긴 뭐가 다 됐대. 에이씨, 짜증 나네.”

가까이 오더니 투정만 늘어놓은 후 화장실로 향하는 동생은, 편식 때문인지 운동을 하지 않아서인지 은근 변비가 있다. 최소한 20분은 나오지 않을 테니 아직 여유롭다.

항상 미리 까서 넣어 두는 양파를 꺼내 송송 썰어 준다. 당근을 넣으면 색도 좋고 맛도 좋아지지만, 저 빌어먹을 놈이 당근이라면 치를 떨기에 아쉽지만 파만 넣기로 한다.

재료 준비를 해 두고 가자미를 뒤집어 가며 구워 준 후 그릇에 담아 놓고 키친타월로 한 번 닦아 낸다.

생선 비린내가 어쩌고 하는 말이 나오지 않게 꼼꼼하게 닦아 낸 후 다시 기름을 두르고 마늘을 볶아 준다. 살짝 노릇해졌을 때쯤 채소를 먼저 넣어 주고, 한숨 죽으면 버섯을 넣어 달달 볶아 준다.

채소를 기름에 볶으면 나는 특유의 달콤한 냄새가 슬슬 역하게 느껴진다. 아까 전부터 기름 냄새를 계속 맡았으니 당연한 일이긴 하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프라이팬에 굴소스, 설탕, 참기름, 간장, 깨소금을 넣어 준다. 잘 섞이게 볶아 준 후 불을 끄고 아침에 먹을 걸 따로 접시에 담아 두고 나머지는 그릇에 담아 뒀다.

프라이팬을 가볍게 닦아 이번엔 스팸을 굽는다. 워낙에 짠 맛이라 한 번 삶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맛이 없다고 짜증 내기 때문에 이건 사실 솔직히 동생 전용의 메뉴였다. 그래도 거의 반통은 혼자 아침에 뚝딱 먹어 치우기 때문에 넉넉하게 굽는다.

그사이 김치 통에서 김치를 꺼내 송송 썰었다. 치익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갈비찜을 끓이는 냄비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아, 씨!”

황급히 불을 줄인다. 분명 불을 중불로 해 놨었는데 강불로 바뀌어 있다. 동생이 불을 올린 모양이었다. 불 조절도 할 줄 모르는 게 왜 괜히 건드려선.

어젯밤에 미리 해 둔 땅콩조림, 진미채를 꺼내 접시에 담아 두고 할머니가 먹을 연근이랑 우엉조림, 젓갈을 꺼낸다. 할머니는 콩나물국은 국물만 먹기 때문에 콩나물을 조금 건져 소금, 참기름으로 양념을 해 주고 나물로 올린다.

이러면 가짓수가 많아 보여서 좋다.

스팸이 노릇하게 잘 구워진 걸 꺼내 접시에 올리고 옆에 종지 두 개를 꺼내 케찹과 허니 머스타드를 담아 둔다. 그리고 다시 닦아 낸 프라이팬에 참기름을 두르고 채 썬 무를 넣어 준다.

어느 정도 볶아졌다 싶으면 물을 부어 주고 소금을 넣어 간을 한 뒤 골고루 섞으며 볶아 준 후 뚜껑을 닫는다. 그사이에 밥을 푸고 미리 식혀 준 국에 뜨거운 국물을 마저 채운다.

할머니가 먹을 국도 푸고 시계를 본다.

시간은 벌써 6시 30분. 손이 느려서 늘 이 정도는 걸린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상차림을 확인하고 무나물을 꺼내 접시에 담는다.

저녁에 먹을 어묵볶음이랑 취나물은 나중에 해야겠다. 두 사람이 밥 먹는 사이에 씻고 청소를 한 번 돌려 둬야 하니까….

평소엔 8시 30분에 출발하지만 오늘은 8시에는 출발해야 한다. 곧 서류 감사가 뜬다고 해서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진짜 빠듯하겠네.

일찍 일어났어야 했는데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나선.

작게 한숨을 내쉬고 앞치마를 벗었다.

그사이 오늘따라 빠르게 일이 끝났는지 동생이 나온다. 덕분에 빨리 씻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어느 새 식탁 앞에 앉은 할머니가 동생을 부른다.

“어서 이리 오너라, 수혁아. 밥 먹자.”

“뭐야? 갈비찜 아직 덜 됐어?”

“그건 점심 때….”

“에이씨, 점심 때 먹을 걸 왜 지금 해? 괜히 기대했네.”

“저년은 왜 아침부터 수혁이 심기는 거스르고 지랄이야? 하여간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아, 나 밥 안 먹어.”

“아이고, 수혁아. 그러지 말고 한 술만 떠. 너 좋아하는 스, 스…, 뭐시기 햄도 여기 있으니까. 응?”

“에이씨.”

투덜거리면서도 음식 냄새가 나니 배가 고팠는지 슬쩍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든다. 저놈의 새끼는 왜 젓가락질을 저렇게 하는 건지, 원.

아무리 가르쳐 줘도 고칠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러니까 생선을 못 바르지. 주먹 쥐듯 저렇게 쥐는데 생선 가시를 어떻게 발라 내?

하긴, 할머니가 다 해 주니 상관없나.

“저 좀 씻고 나올게요. 먹고 싱크대에만 담아 주세요.”

급하게 머리만 감고 나왔다. 그사이 식탁에서는 전투라도 벌어졌는지 개판이 나 있다. 역시나 그릇은 담아 놓지 않았다.

또 한숨을 쉬곤 머리에 수건을 만 채 설거지부터 한다. 원래라면 설거지 전에 아침을 먹지만, 오늘은 급하니 어쩔 수 없다. 그냥 굶고 나가야지. 사실은 설거지도 나중에 하고 싶지만, 이걸 미뤄 두면 저녁에 집에 왔을 때 너무 힘들어지니 어쩔 수 없다.

이거 끝나고 머리만 빗고 빨리 엉망이 되어 있을 동생의 방을 치우고, 나중에 먹을 반찬을 해 둬야지. 그러면 그사이에 머리카락이 마를 테니까.

그렇게 설거지를 하는데 왜일까.

갑자기 눈물이 울컥 찼다.

눈앞이 흐려지는 걸 보고 당황했다. 이러다가 그릇 놓쳐서 깨뜨리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정신 차려. 내가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건 그냥 꿈이었던 거야.

달콤한 향기가 가득하던 식탁. 내가 손 하나 꼼짝하지 않아도 모든 게 완벽하던 방. 다정한 사람들.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

그 모든 게.

꿈.

-샤페릴….

그래서 그토록 바랐는데. 꿈이라면 차라리 빨리 깨기를.

이렇게, 현실은… 언제나와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꽉 감았다가 뜨자.

“…괜찮으십니까?”

엔프리제가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