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27)
“…접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낮은 노크 소리와 함께 엔프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지. 들, 들어오라고 해야겠지? 아까 막 뭐라고 하면서 펑펑 울었던 것 같은데 다 기억하려나?
에이씨, 울긴 왜 운 거야, 대체.
“드, 들어오세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찰칵, 하고 문손잡이가 돌아간다. 나도 모르게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뭐야,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건데!
“템버와… 플리는 괜찮다고 합니다. 잠시 기절한 것뿐이라고 하는군요.”
다행이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엔프리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잠시 이어진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죄송해요.”
“뭐가 말입니까?”
“제가 괜히 드레스에 어울리는 액세서리를 가지고 싶다고 해서…. 그 침입자, 보석상인 척 저택에 들어온 거죠?”
엔프리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이게 아닌가?
“아니에요?”
“아닙니다.”
“어? 그럼 어떻게 들어왔어요?”
엔프리제가 샤페릴을 아무데나 가둬 놨을 리가 없는데. 뭔가 분명히 대비해 놨을 텐데.
그 남자는 어떻게 여길 들어온 거지?
“그건 지금 조사 중입니다. 남자를 생포했으니 어떻게든 알아내야겠죠.”
“그럼 보석상은 어떻게 됐어요?”
템버는 잠시 기다리라며 보석 상자를 들고 나갔었다. 그거, 보석상한테 돌려주러 간 거 아니었나?
“보석상은 애초에 이 저택에 들어온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라? 보석 상자가 스무 개도 넘게 있었는데….”
“그건 다 샘플로 받아 온 겁니다.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귀족 가문에서는 종종 하는 방법입니다.”
“아, 그랬군요.”
내가 설마 하며 떠올렸던 그 갑질이 진짜 자행되고 있었던 건가. 그래도 뭐, 다들 그렇게 한다면 갑질은 아닌가.
“…제가 당신이 계신 곳에 외부인을 함부로 들일 리 없지 않습니까.”
일부러 내뱉은 말인가. 아니면 실수로 내뱉은 말인가.
어느 쪽이건 나쁘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단 말이다! 왜 사람을 막 들었다 놨다 할 만한 말을 내뱉냐고!
“대공님, 그거 일부러 그러시는 거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엔프리제가 살짝 눈살을 찌푸린다.
세상에. 누가 로판 남주 아니랄까 봐 플러팅 기술을 기본 탑재하고 있나 보다. 평소에 까끌거리는 만큼 한 번씩 저런 말을 내뱉으면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
“아니에요.”
무서운 놈 같으니.
하긴, 피폐 뽕빨물이라도 보통 엔딩은 해피 엔딩이다. 저런 면이 있으니까 샤페릴과 해피 엔딩을 본 거겠지.
“…….”
엔프리제는 가만히 서서 내 눈치만 보고 있다. 왠지 그 얼굴을 보기 좀 그래서 한참 딴청을 부려 봤지만, 엔프리제는 나가지도 않고 앉지도 않고 그냥 서 있기만 했다.
결국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내가 또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앉으세요, 대공님.”
“…당신께서 끌어들인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제가요?”
내가 뭐 하러. 애초에 어떻게?
“역시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였다고. 당신이 절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러셨던 거라고.”
요즘 좀 믿나 싶었더니, 또!
하긴, 오해할 만하지. 나도 그 생각하긴 했으니까. 하다못해 플리를 통해 연락이라도 했으면 좀 덜 했을 텐데.
“죄송해요. 사실대로 말하면….”
어디서부터 설명할까.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 남자가 절 안다고 했어요.”
“당신을, 말입니까?”
“네. 구하러 왔다고. 하지만 전 그 남자를 기억도 하지 못하고, 여기서 나갈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설득하려고 했어요.”
“설득…?”
“그 상황을 보면 대공님께서 오해하실 것 같았어요. 어쩌면 정말로 기억을 잃기 전의 제가 뭔가 한 걸지도 모르고. 그래서 이제는 도망갈 마음이 없어졌다고 설득하려고 했어요.”
괜한 거짓말은 사태만 악화시킨다. 내가 소설을 보며 터득한 인생의 지혜였다.
“근데 설득이 안 돼서 알리려고 했는데 플리가… 제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그 사람한테 덤벼들다가 기절해 버려서.”
생각하다 보니 또 눈물이 차오른다.
우리 플리, 그 작은 게 그 큰 사람한테 덤벼들고. 평소에 엔프리제에게도 덤벼들긴 했었지만.
만약 그대로 잡혀 갔으면 우리 플리는 다시 보지도 못했을 거 아냐. 엔프리제도, 템버도. 내게 이 세계는 그 셋이 전부인데.
“그래서, 잡혀 가면서 대공님도 부르고 템버도 부르고…. 그랬는데 아무도 안 와서….”
나도 모르게 울먹울먹하기 시작한다.
엔프리제가 당황하는 게 느껴진다. 좀 전까지 묘하게 삐딱하더니 지금은 자세부터 다르다. 허리 펴고 앉아서 나한테 손수건이라도 줘야 하는지 토닥토닥을 해 줘야 하는지 고민되는 듯 손이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근데 왜 안 오셨어요.”
“그게….”
“제가 도망갈까 봐 무서우면 딱 붙어 계셨어야죠! 왜 불러도 안 와요?!”
“죄송합니다.”
구해 준 사람에게 적반하장이라는 건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제멋대로인 이야기를 하는 건지도.
나야 이 세계의 전부가 이 저택이지만, 엔프리제에게는 아닐 테니까. 대공이니까 맡은 일도 있고 저택도 돌봐야 할 테고. 그걸 알면서도.
그래도.
“앞으로 저한테 딱 달라붙어 계세요! 아셨어요?”
“알겠습니다.”
“제가 혹시 또 구해 준다는 사람한테 납치당할 것 같으면 막아 주셔야 돼요?”
“네.”
엔프리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슬쩍 내 옆으로 옮겨 앉았다. 그러고는 어설픈 손놀림으로 내 등을 토닥였다.
나는 그 손길에 등을 맡긴 채 한참을 씩씩거리는 척을 했다.
* * *
“끄응.”
몸이 화끈거린다. 소설 같은 데서 아프면 끙끙거리는 거 보고, ‘누가 아플 때 저러냐!’면서 비웃었는데 실제로 끙끙 소리가 나오는구나.
죽겠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일단 따뜻한 차라도 좀 드세요.”
“고마워요, 템, 아니, 레이디 템버….”
감기인가 싶었는데 뭔가 좀 다르다. 목이 아프다거나 콧물이 나온다거나 기침이 나오지도 않는다. 그냥 열만 난다.
체온계에서는 미열로 나온다는데 온몸이 늘어져서 움직이기가 힘들다. 몸 안에 무언가 열기 같은 게 가득 차 있는 느낌.
바늘로 쿡 찌르면 펑 하고 터지거나 푸쉬식 하고 바람 빠지는 게 아닐까 싶은 그런 느낌이었다.
엔프리제한테 한참 적반하장의 투정을 부린 후, 밖으로 나가려는 그를 배웅하려다.
-아.
-샤페릴?!
갑자기 발밑이 흔들렸다.
세상에, 지진인가. 일본이라는 아주 훌륭한 지진 방벽이 있던 우리나라와 달리 여기는 지진이 종종 일어나는 건가!
지진 났나 봐요! 라고 외치고 싶은 내 마음과 달리, 이내 머리까지 핑 돌더니 그대로 어둠 속으로 처박혔다. 눈을 떴을 때는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열이 좀처럼 내리질 않네요.”
걱정스러운 듯 이마를 짚는 그녀의 모습이, 낯설었다.
아플 때 혼자인 게 제일 서럽다고 누가 그랬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였을걸.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반대한다. 아픈데 혼자인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은데도 혼자 다 해야 하는 것에 비하면.
초등학교 때까지는 열이 나면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 때가 되니까 더는 쉬게 두어 주지 않았다.
-이년아! 누가 몸땡이 막 굴리고 다니래? 조신하게 하고 다녔어야지? 네년 잘못인데 왜 우리 장손이 피해를 봐야 하냐. 잡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해라.
누가 들으면 내가 막 나가는 줄 알았을 거다. 여름에 반팔, 반바지 체육복을 입고 다닌다고 들은 소리였을 뿐이지만.
집안의 장손께서 덥다는 이유로 하루 종일 에어컨을 18도로 틀어 놓고, 컴퓨터 게임에 빠져 계신 덕에 위에 얇은 가을 가디건을 걸쳤는데도 집 안은 항상 추웠다. 밖에는 찌듯이 덥고 안에는 춥고.
감기에 안 걸리는 게 신기한 거 아닐까.
어쨌건. 쉬게 놔두질 않는 할머니 덕분에 나는 38도가 넘는 고열에도 불구하고 집안일을 다 해야만 했다. 끙끙거리며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끌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했다. 그 와중에 또 먼지라도 남겨져 있으면 더럽다고 혼나야만 했다. 몸이 너무 무거우니까 귀찮아서 얼룩 제거를 하지 않고 빨래를 돌렸다가 혼난 적도 있다. 귀한 장손의 하얀색 교복 셔츠에 묻은 음식 얼룩이 지워지질 않는다고.
-아씨, 이게 뭐야? 더러워서 이걸 어떻게 입어?
내 교복은 아깝다는 이유로 두 치수를 크게 맞춰 주더니, 동생의 교복은 얼룩이 묻었다는 이유로 바로 새로 사 주더라. 그때는 좀 서럽긴 했다.
여하간. 아파도 내 몸 하나만 건사하면 되기는커녕 장손께서 계속 어지르는 집 안을 끝도 없이 치워야 했던 나는 차라리 혼자이고 싶었다.
귀찮다는 이유로 밥 안 차리고 그냥 대충 시켜 먹거나 굶고 싶기도 했고, 빨래 그거 안 하고 며칠 버텨 보고 싶기도 했다. 땀내 나는 이불 덮고 있어도 그냥 마냥 행복할 것 같았다.
내게는 그것조차 사치였지만.
그랬던 내게 아프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돌봐 준다는 건 되게 낯선 경험이었다.
“저는 이제 괜찮아요, 템버. 가도 돼요. 이제 곧 저녁 시간이고…. 저야 그렇다고 쳐도 대공님은 식사 하셔야 하잖아요.”
“어차피 지금 아무것도 안 들어가실걸요. 아가씨께서 아프신데 전하께서 입맛이 나실 리가 없잖아요.”
…그런가?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 밥을 먹지 않으면 하루가 고되었다. 빨래는 물에 젖으면 생각보다 무거워서 꽤 중노동이었고, 대청소할 때 가구를 들어내면서 청소할 때는 진짜 힘들었다.
누가 아프건 말건 밥을 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에, 심지어 내가 아플 때조차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곤 했다. 아플 땐 더 힘들었으니까.
그런가. 샤페릴은, 나는… 엔프리제에게 그런 존재구나.
속을 꽉 채우고 있는 열과 다른 무언가가 살랑살랑 가슴을 간질였다. 그걸 느끼며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